(긴글주의)
2024.12.31. (화)
여러 길고 짧은 여행들로 이제 짐싸기(=짐줄이기)의 준달인급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의 여행이라 감을 잃었는지 이번 여행에 괜히 가져왔다 싶은 물건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고 온 크록스 외에 여분으로 챙겨온 운동화였다. 나는 내가 매일 아침 러닝이라도 할 줄 알았지. 코스타리카에서도 혼자 절대 안뛰면서 갑자기 어떤 사고의 경로로 에콰도르까지 와서 뛰어다닐거라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까지 들고와버린 운동화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여행 마지막 날인 오늘, 드디어 새벽 러닝을 결심했다.
아직 주무고 계신 동료분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용히 운동복을 챙겨 입은 뒤 운동화 끈을 다시 한 번 묶고 숙소를 나섰다.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비장한 준비 과정을 마쳤지만 막상 뛰려니 옷 천이 몸을 스칠 때마다 썬번을 입은 피부가 너무 따가워서 도저히 뛸 수 없었다. 그래도 나오긴 나왔으니 어슬렁 어슬렁 동네 한 바퀴를 돌기 시작했다. 한참 산책을 하다 단체 운동복을 맞춰입은 갈라파고스 러닝 크루(?)를 마주쳤다. 나도 무조건 달린다의 복장을 입고나왔는데 안뛰는 것이 좀 민망하기도 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바닥에 바다사자 모양의 땅따먹기가 그려져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괜히 그 땅따먹기를 하는 척을 하다 결국 크게 넘어져서 안뛰는 것보다 훨씬 민망해졌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까지 좀 누워있을까도 싶었는데 러닝크루 후발대가 일으켜 세워줘서 그분들과 살살 같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뒤에 낙오멤버들이 갑자기 달리기를 포기하고 바다로 그냥 들어가서 누워버렸다. 나는 살이 따가워서 도저히 따라 들어갈 수는 없겠다 싶어 바다사자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바다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와인을 마시다 바다에 들어갔다를 반복하는 여자 두 분이 계셨다. 다른 사람들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그 분들이랑 대화를 하게 되었다.
두 분 모두 여기 산크리스토발 섬 주민인데 매년 마지막 날 새벽에 이렇게 나와 와인을 마시면서 한 해를 보내는 행사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와인을 한 잔 가득 따라주셔서 빈속에 와인과 갈라파고스 과일 ciruela를 권해주었다. (ciruela는 자두라는 뜻이지만 받아든 과일은 자두처럼 생기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코스타리카에서도 많이 먹는 jocote랑 비슷했던 것 같다.) 새벽 러닝으로 2024년 마지막 날을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결국 빈속에 와인 한 잔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다시 숙소로 슬슬 돌아오는데 마을 한 가운데 동네 아저씨들이 전부 모여서 양파를 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하시는지 궁금해서 기웃거리니 아저씨들이 신난 목소리로 이따 10시에 동네 잔치를 해서 물고기를 구워줄테니 꼭 이따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무슨 동네 잔치요?하니 오늘 올해의 마지막 날이니까 그렇지!하고 행복 지수 1000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갑자기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해 숙소로 돌아와 이 모든 아침 스토리를 동료분께 전했다. 그리고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뒤에 공항으로 가기 전에 동네 잔치에가서 물고기 아사도를 먹자 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그래도 어연 도합 12개월의 중남미 생활의 우리.. 한편으로는 절대 10시에 물고기를 먹을 수 없을 것이라는, 빅데이터로 학습한 예측 알고리즘의 아웃풋을 얻었다.
먼저 아침으로 가장 에콰도-리쉬해보이는 Tigrillo를 골랐는데 예상치 못한 치즈+반죽+치즈 요리가 나왔다. 그래도 오늘 이제 비행기를 타면 2025년이 올 때까지 언제 뭘 먹을 수 있을지 몰라!하는 생각에 열심히 먹었다. 이때 에콰도르 시간으로 아침 9시가 되어 15시간 빠른 한국에서는 2025년 신년이 되었다. 가족, 친구들과 신년 메세지를 주고 받으며 새해가 실감이 나는 것 같기도, 눈 뜨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햇살 아래 바다를 보니 항상 추운 날씨에 맞이하던 신년이 아득히 먼 이야기 같기도 했다.
방으로 돌아가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고 나와(짐을 챙기며 이사벨라섬에 선글라스를 놓고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마을 잔치를 한다던 마을 중심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동료분이 오늘 왜이렇게 가발을 쓴 사람들이 많지? 했는데 자세히보니 동네 청년들이 여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 무리를 결국 마주쳤는데 하이톤으로 아가 밥 주세요하며 달려들어서 무서운 마음에 제대로 리액션 해주지 못했다. 같이 사진이나 찍고 아가 아자잣!하고 말아버린..
그리고 아까 10시까지 오라던 아저씨들..당연히 그릴에 불도 안올라와있었고 그저 큰 스피커에 더 큰 소리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저 신난 아저씨들과 춤이나 추다 결국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져 공항으로 발길을 돌려야했다. 처음 도착했던 산타크루즈 섬과 달리 산크리스토발 섬의 공항은 중심부라 굉장히 가까워서 걸어 가보기로 했다.
가면서 생각해보니 코스타리카에 도착하면 2025년 1월 00시가 넘은 뒤인데 공항 물가로 음식을 사는 것보다 미리 사가는게 나을 것 같아서 빵집에 들러 점심, 저녁이 될만한 빵을 몇 개 골랐다. 당근 케이크는 싫고..비건 옵션은 안되고..하며 열심히 고르던 중에 아까 그 여장 무리가 이번엔 빵집에 들어와서 같은 소리를 해댔다. 자세히 보니 아까 만난 청년들과 또 다른 무리이다.
빵집 주인에게 물어보니 동네 청년들이 저렇게 12월 31일에 여장을 하고 다니며 아가인형을 들고 동전따위를 받는 것이 에콰도르의 전통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주 경계했는데 빵집 아주머니도 전부 아는 청년이라고해서 마음이 놓였다. 그렇지만 길가로 나오자 동네 아저씨들 붙잡고 약간의 삥을 뜯는(?) 모습을 보고 호다닥 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공항에서도 이어지는 그들의 전통..이번엔 공항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가발을 쓰고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어제 들었던 인형을 만들어 태우는 전통의 일환으로 가짜 인형을 만들어 짐 체크 담당자 자리에 올려놓은 것을 보고 전통이 참 많기도 하고 정말 진심이구나 싶었다.
예상했지만 공항이 아주 간소해서 지금 당장 다음 비행기 탑승자가 아닌 사람들은 게이트 앞에서 기다릴 수 조차 없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료분과 함께 어제 다운 받아뒀던 오징어게임2를 봤다. 이렇게 미리미리 일을 안하면 비행기가 제시간에 뜰 수 없을 것 같은데 하던 내 걱정이 무색하게 비행기는 정시에 잘 출발했다.
비행기 안에도 귀엽게 Feliz año! 가랜드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잠시 날아 에콰도르 과야킬에 도착했다. 갈라파고스에 들어올 떄는 에콰도르의 수도인 키토에서 하루 자고 들어왔는데 과야킬 공항에 와보니 수도보다는 이곳이 진정 에콰도르의 메인 도시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콜롬비아 보고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맥도날드에서 아이스크림도 먹어주고(콘 안에 초코가 들어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안에 들어있는 초코가 아주 뜨끈해서 아이스크림이 줄줄 녹았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시 몰라 종이 보딩패스를 받으려는데 체크인 카운터로 가라는 안내 문구가 떴다.
이미 체크인도 마쳤고 걸릴 것이 없는데 무슨 일인지 가보니 혹시 코스타리카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가 있는지 물어봤다. 그래서 코스타리카에서 살고 있다고 외교관증을 내밀었더니 한참을 뭘 작성하고 확인했다. 저멀리 기다리시던 동료분이 보딩패스 손으로 그리고 계신가요 하고 문자하실 즈음 보딩패스를 받아들고 게이트로 향할 수 있었다. 또 게이트에 가서는 동료분을 찾는 안내 음성이 나왔고 동료분에게도 콜롬비아에서 나가는 비행기표를 갖고 있는지 물어봤다. 예상치못한 우여곡절을 지나 콜롬비아 보고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이번 비행기에도 비슷한 가랜드와 함께 2025 풍선이 달려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비행기부턴 벌써 조금 지쳐서 첫 비행기 데코보단 감흥이 덜했다.
금세 콜롬비아 보고타에 도착했고 여기서 콜롬비아에서 일하는 동료분과는 헤어져야했다. 언제 봤다고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조금 슬픈 마음이 들려던 찰나에 이미그레이션 검사 예상 대기 시간이 90분이나 되길래 언제 집가시냐..했는데 문제없다고 외교관 전용 라인으로 슝 들어가시는 모습에 나도 이따 코스타리카에 가서 꼭 외교관 전용줄에 도전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이젠 다시 혼자가 되어 코스타리카로 향하는 비행기 게이트로 향했다.
이번 공항은 큰 국가(콜롬비아)의 큰 도시(보고타) 공항답게 크고 팬시했지만 24년의 마지막 몇 시간이라 그런지 공항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중요한 인터넷도 30분만 무료!라고 되어있어서 아끼면서 자동 로밍된 데이터를 쓰고 있었는데 콜롬비아 동료분이 30분 뒤에 다시 또 들어가면 또 다시 30분 무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반신반의했지만 넉넉한 인심 덕분이라고 해야할지 약간은 허술한 시스템 덕분이라고 해야할지 비행기 탑승 전까지 내내 무료 인터넷을 쓸 수 있었다. 덕분에 아빠 머리를 자르고 있는 엄마와도 영상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전보다 훨씬 표정도 얼굴도 좋아졌다고 했다! (우리 셋 모두 아무래도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했지만? 코스타리카에 돌아가자마자 재본 결과 전혀 그렇지 못했다.)
드디어 꼴롬비아에서 코스타리카로 오늘의 찐막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기장 아저씨도 신이나서 2024년 어쩌고~ 2025년 어쩌고~ 하셨다. 그리고 상공 어디에선가 신년을 맞이하는 5-4-3-2-1 카운트 다운을 했는데 내 예상보다 사람들 반응이 시원치가 않아서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지금 비행기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코스타리카 사람들인데 아직 콜롬비아 타임존에 있어 코스타리카 기준 2025년 새해까지 한 시간 남았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는 예정대로 00:00에 정확히 코스타리카 공항에 도착했는데, 동시에 Feliz año nuevo!하며 모두가 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자 여기저기서 가족들에게 영상통화를 하며 새해를 맞이한 것을 축하했다. 나 또한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오늘 벌써 세 번째 맞이하는 새해기도 했고 가족들이 픽업오는 여러분들과 다르게 집에 가려면 우버를 잡아야하는데 1월 1일 00시에 다니는 우버가 있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걱정 속에서도 외교관 전용 입구에 도전해보겠다는 사명은 잊지 않고 있었는데 막상 도착하니 자국민/외국인 두 개의 종류의 줄 밖에 없었다. 조금 서운한 마음으로 외국인 줄에 서있는데 또 무슨 필요 서류로 나라를 나가는 티켓이 필요하다고해서 처음 코스타리카에 와서 고생했던게 떠오르면서 걱정 위에 걱정이 쌓였다. 주변에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려고했는데 친구를 만났는지 가족을 만났는지 너무 신나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렇게 뒤에 기다리다 물어보니 카드를 보더니 자국민 줄 맨 앞에 세워주셔서 다행히 코스타리카 아웃 비행기표 없이 입국심사를 마칠 수 있었다.
자 그리고 이제 디디와 우버 앱을 켜서 계속 택시를 부르는데 가격은 이미 처음 공항으로 왔을 때보다 4배 정도 올랐고 그 가격에도 기사를 찾기 어려웠다. 코스타리카에 도착하면서 드디어 집이다! 싶었는데 한순간 또 집에서 한없이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지금 공항에서 우버를 잡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니까 혹시 계속 안잡히면 본인이 픽업와주겠다고 이야기했다. 마음이 따땃해지면서 그건 안되지!하는 더욱 비장한 마음으로 우버를 열심히 돌렸더니 여러 번의 취소 끝에 기사분이 매칭되어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갈라파고스에서는 그렇게 설치고 다녔으면서 또 혼자가 되어서인지 아니면 오늘 비행으로 지쳐서인지 입 꾹 닫고 동네 근처까지 왔는데 아저씨가 코스타리카는 처음이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여기 산다고 했더니 아무말도 안하길래 스페인어 못하는줄 알았지!하시면서 말을 와다다 쏟아내셨다. 그저 맞져~완전 해피뉴이어져~하다가 드-디-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총 24시간에 3번의 비행기를 건너 이 방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건물로 들어와 처음 눈에 띈 것은 내가 떠난 뒤에 누가 공용공간에 가져다 놓은 나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코스타리카는 무슨 아직도 크리스마스타령을 해~하면서도 동시에 집에 왔구나!하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2024년이 가는 것이 아쉬웠는지, 시차 적응 때문인지(사실 시차 그런건 없다) 잠이 안와서 새벽 4시까지 눈을 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