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부를 왜 할까?
나 자신부터 되돌아보자. 나는 공부를 왜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을 때, 여러 가지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그중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발전'이다. 그럼 왜 '발전'하려는 것일까? 발전하려는 이유는 '생존'때문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꼭 '생존'을 위해서만 공부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수많은 동물들 중 가운데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아니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식'에 대한 갈망. 이도 어떻게 보면 '생존'을 위한 본능이 아닐까?
본격적인 시작은 언제일까. 대략 대한민국에서는 초등학교 고학년정도부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공부에 대한 압박은 그 시기정도부터 시작된다.
대부분 학생의 의지와는 연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부모의 욕심, 걱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럼 부모는 왜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자녀에게 '공부'를 시키려고 할까? 공부를 시키려 한다는 게 잘못되었다니 보다는, 왜 원하지도 않는 공부를 시키려 하냐이다. 부모들도 알고 있다. 아는 게 많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잘 사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타인의 삶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주변 사람을 의식하고, 눈치 보고,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춰 살아간다. 명품 브랜드에 대한 이례적인 지출, 인스타그램의 사용. 잘못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이 있기에 비난하지 않는다.
타인의 기대는 양날의 검이다. 공부를 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공부를 그만두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과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조차도 공부할 때 타인의 기대를 고려하지 않을까?
호기심
이번주 일요일에는 토익시험이 있다. 나 자신을 점검하고자 이따금씩 보곤 했는데 사실 제3 대학의 진학을 염두고해 두고 보는 시험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부는 쥐꼬리만큼 했다. 공부라고 할 것도 없다. 그럼 나는 왜 제3 대학의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 나는 총 3개의 대학을 경험했다. 한 대학은 20살 때 입학한 대학, 두 번째는 3학년 때 25의 나이로 편입한 대학, 3번째는 대학원으로 진학한 대학. 사실 대학원으로 진학한 대학은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생업과의 병행이 어렵기도 했고, 주제를 선정할 때마다 매번 교수에게 Reject(거절)을 당했더니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다시 재입학을 고민 중임과 동시에 다른 대학으로의 편입을 고민 중에 있다. 물론 내가 원한다고 되리라는 법은 없지만, 되면 다니고 아니면 말고 식의 마인드이다. 그럼 왜 대학을 다시 다니는 것을 고려하고 있을까? 첫 번째는 상위권 대학에서의 삶이 궁금해서이다. 내가 졸업한 대학이 뒤떨어진다거나 하는 대학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일류대학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일류대학을 다니려고 하는 걸까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는 배우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일류대학은 수도에 몰려있다. 즉, 서울에 있다. 서울을 안 가본 것은 아니지만, 서울에서 살아본 적은 없다. 서울에서의 삶이 어떻기에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가고 싶어 할까? 그 경험에 대해 배우고 싶다. 이에 더해 일류대학에서 배우는 수업과 그곳에서의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막상 경험해 보면 정말 별거 아닌 것일 수 있다.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으랴. 그래도 궁금하다. 그 경험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값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궁금하다. 나는 학생들을 마주하면 꼭 서울로 가보라고 한다. 갔다가 다시 내려오더라도 일단 가서 겪어보라고 한다. 가끔 이런 말을 하면서 서울에서 살아보지 않고, 일류대학을 겪어보지 않고 일류대학을 가보라고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렇다. 내가 학생들에게 권하는 대학, 삶이 실제로는 어떨지 궁금하다. 그래서 공부한다.
가족
가족과의 관계가 나쁜 것 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 것이다. 공부가 잘 되려면 잘 쉬어야 하는데, 좋지 못한 관계를 가진 가족과 함께 산다면 어찌 집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무엇보다 큰 힘이 되는 것이 가족의 응원인데, 그게 없다면 무엇을 원동력 삼아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시험을 잘 봤는데 가족이 칭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이 지내는 가족이 없다면 혹은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면 상황이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무조건적으로 좋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좋게 만드는 것이 좋다. 나는 지금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아파트가 완공된다면 나가야 하지만, 나는 혼자 있는 황량한 집보다는 누군가 맞이해 주는 집이 더 좋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느낀 것은 가족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기본적으로 나도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내가 사용하는 방을 청소하고, 키우고 있는 토끼의 변을 정리하고, 내 빨래는 내가 세탁기에 넣어 돌린 후 빨랫대에 널어둔다. 가끔은 설거지를 안 하는 날도 있지만 내가 먹을 때 사용한 그릇은 내가 치우려 한다. 집에서 내 역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편하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서는 안된다. 연애를 할 때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말하듯 가족에게도 그런 마인드가 필요하다.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면, 반드시 사과해라.
강제성에 대한 의문
성과만 있다면 강제성을 부여하도록 하여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공부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스스로 공부하기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맞을까? 많은 학생들이 학원을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다른 방법이 존재하겠지만, 관리자 혹은 강사입장에서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학부모에게 티 내기에도 좋은 방법이다. 어찌 되었건 아이가 학원에 앉아있으니까. 그렇다면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고 어떻게 공부하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단어장을 매일 보는 이유
언어의 가장 기본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제2 언어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각 단어의 의미가 아닐까. 문법, 말하기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단어의 의미를 모른다면 어떤 학습이 가능할까? 영어를 매일 하는 나 조차도 글을 읽다가 막히는 경우는 10중에 9는 단어의 의미 때문이다. 그런 막힘이 생겼을 때 매우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물론 한글조차도 다 알지 못하지만, 무슨 욕심에서인지 가능한 많은 영단어를 알고 있고 싶고, 글을 읽음에 있어서 막힘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 있기에 단어장을 매일 볼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뭐 하러 단어장을 볼까? 이렇듯 공부라는 행위의 이면에는 그 이유가 꼭 있다. 그냥 하는 공부는 없다.
책을 읽는다는 것
바라볼 곳이 없다는 것만큼이나 외롭고 힘든 경험은 없을 것이다. 일 년에 수십 번이고 방황하며 가야 할 길을 잃는다. 책은 마치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 같다. 모든 책을 내 삶의 지표로 삼지는 말아야 하지만, 방황하던 나 자신에게 한줄기 희망이나 빛을 제공해 주는 책이라면, 지표로 삼아도 괜찮지 않을까. 책은 어질러진 내 책상과도 같은 내 마음을 하나하나 정리해 주는 역할을 한다. 내 마음은 항상 복잡하다. 누군들 복잡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