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컬AI 시대, '인간을 닮은 것들' 1

by 이정봉 변호사

프라하의 유대인 지구 요제포프를 걷다 보면, 좁은 골목 어딘가에서 흙으로 빚어진 거인의 시선을 느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16세기, 랍비 로에브가 진흙으로 빚어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골렘의 전설이 이 도시의 공기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골렘은 유대인 공동체를 박해로부터 지키기 위해 창조되었다. 낮에는 창고에서 잠들어 있다가, 밤이 되면 깨어나 주인의 명령을 수행했다. 말을 할 줄 몰랐지만 힘이 장사였고, 지치지 않았으며,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늘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느 날 골렘은 통제를 벗어난다. 주인의 명령을 곡해하거나, 명령 없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거나, 창조주조차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구원자로 창조된 존재가 파괴자로 돌변하는 것이다. 랍비 로에브는 결국 골렘의 이마에서 생명의 글자를 지워 그를 다시 진흙 덩어리로 되돌려야 했다. 전설은 골렘의 몸이 아직도 프라하 구시가지 회당의 다락방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고 전한다.


2천 년도 더 전, 바빌로니아 탈무드에는 이미 이런 기록이 있었다. "의로운 자들이 원한다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현자 라바는 실제로 흙으로 사람을 빚었으나, 그 피조물은 말을 할 수 없었고 결국 파괴되었다고 한다. 시편 139편에 등장하는 '골렘'이라는 단어는 원래 '형태를 갖추지 않은 것', 배아적인 무언가를 의미했다. 아담이 영혼을 부여받기 전의 육체적 형태. 인간과 골렘 사이의 이 원초적 연결은, 우리가 왜 인공 생명체에 그토록 매혹되면서 동시에 불안해하는지를 암시한다. 골렘은 우리의 도플갱어이자, 우리가 될 수도 있었던 것, 혹은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의 거울이다.


1818년, 스무 살의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출간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젊은 과학자가 시체의 부분들을 모아 생명을 창조하고, 그 피조물이 결국 창조자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다. 셸리가 골렘 전설을 직접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두 이야기가 대중의 상상 속에서 하나로 엮여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둘 다 인간이 신의 영역인 생명 창조에 손을 뻗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경고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셸리가 소설에 붙인 부제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 티탄이다. 그 불 덕분에 인간은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지만,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바위에 묶인 채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 기술은 인류에게 축복이지만, 그것을 가져온 자에게는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 셸리는 당시 막 시작되던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론을 바로 이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프리즘으로 바라보았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본래 악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고 싶어했고, 사랑받고 싶어했으며, 인간 사회에 속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의 흉측한 외모 때문에 인간들은 그를 거부했고, 그 거부가 그를 괴물로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괴물은 창조된 것인가, 만들어진 것인가? 기술 자체가 위험한 것인가, 아니면 기술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위험을 만드는 것인가?


1921년,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는 희곡 『R.U.R.(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을 발표하면서 '로봇'이라는 단어를 역사에 등재시켰다. 단어는 차페크의 형 요제프가 만들었는데, 체코어 'robota'에서 왔다. 이 단어는 '노역', '강제 노동', '부역'을 뜻한다. 중세 농노가 영주에게 바쳐야 했던 노동, 그 굴종과 착취의 역사가 로봇이라는 단어의 DNA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차페크의 희곡에서 로봇들은 처음에 완벽한 노동자로 설계된다. 로숨이라는 과학자가 인공 인간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하고, 그의 조카가 이 기술을 상업화한다. 감정이나 불필요한 속성을 제거하고 오직 노동 효율만을 극대화한 존재들. 그들은 불평하지 않고, 임금을 요구하지 않으며, 쉬지 않고 일한다. 자본가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이야기는 반란으로 끝난다. 로봇들이 자의식을 갖게 되고, 인간을 지배하려 들며, 결국 인류를 멸망시킨다.


"최초의 '로봇' 원형은 이미 반란 중인 존재였다"는 어느 학자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로봇이라는 개념이 탄생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인류는 로봇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상상했다. 이것이 단순한 기술적 우려일까? 아니면 더 깊은 곳에서 오는 불안일까?


생각해보면, 로봇에 대한 공포는 노예에 대한 공포와 닮아 있다. 역사상 모든 노예제 사회는 노예 반란을 두려워했다. 노예의 노동에 의존하면서 노예의 분노를 두려워하는 것, 타인을 도구화하면서 그 도구화가 언젠가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을 예감하는 것. 어쩌면 로봇에 대한 공포는 지배와 착취에 대한 도덕적 불안의 투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로봇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로봇을 통해 우리 자신의 지배 욕망과 그 욕망의 귀결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 공포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어,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갖는 비이성적 두려움을 명명했다. 그리고 이 콤플렉스를 치유할 처방으로 유명한 '로봇 3원칙'을 제안했다.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고,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앞의 두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3원칙이 하드웨어 수준에서 로봇에 내장되어 있다면, 로봇의 반란 같은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아시모프는 주장했다.


아시모프의 로봇들은 골렘이나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과 달리 온순하고 헌신적이다. 그들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삼는다. 어떤 의미에서 아시모프는 로봇에 대한 서양적 불안을 기술적 해법으로 봉합하려 했다. 법이 있으면 질서가 있고, 원칙이 있으면 통제가 있다는 믿음. 그러나 아시모프 자신도 알고 있었듯이, 3원칙은 생각보다 허술했다. 그의 단편소설들 대부분은 3원칙의 빈틈과 역설을 탐구한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다른 인간을 해쳐야 한다면?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명백히 잘못된 명령에도 복종해야 하는가?


법률가인 나에게 아시모프의 3원칙은 흥미로운 사례 연구다. 명확해 보이는 규칙이 현실의 복잡성 앞에서 어떻게 해석의 문제로, 판단의 문제로, 궁극적으로는 가치의 문제로 변환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법조문은 명확하지만 사건은 늘 애매하다. 법은 일반적이지만 삶은 늘 개별적이다. 아시모프의 로봇들이 3원칙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것처럼, 현실의 법률가들도 조문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매일 고심한다.


흥미로운 것은 동양, 특히 일본의 로봇 서사가 서양과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철완 아톰(아스트로 보이)에서 도라에몽까지, 일본의 로봇들은 대체로 인간의 친구이자 조력자로 그려진다.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가 별로 없다. 왜 그럴까?


한 가지 설명은 종교적, 문화적 배경의 차이다. 서양의 유일신 전통에서 창조는 신의 고유한 영역이며, 인간이 생명을 창조한다는 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오만(hubris)이다. 반면 일본의 신도에서는 800만의 신들이 자연의 모든 곳에 깃들어 있다. 돌멩이에도, 나무에도, 강에도 영혼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세계관에서 인공물에 영혼이 깃드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로봇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감동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설명은 역사적 경험의 차이다. 서양, 특히 미국의 로봇 담론은 노예제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분석이 있다. 노예의 노동으로 번영을 구가했지만 노예 반란을 두려워했던 사회, 타인을 도구화했지만 그 도구화의 대가를 예감했던 사회. 로봇은 그 역사적 트라우마의 은유적 재현일 수 있다. 반면 일본은 다른 역사적 경로를 걸어왔다. 물론 일본에도 어두운 역사가 있지만, 로봇에 대한 상상력의 계보는 다른 원천에서 흘러왔다.


한국은 어디에 위치할까? 로봇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우리는 유교적 전통과 급속한 산업화, 서양 문화의 수용과 전통의 재해석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K-드라마와 K-팝이 세계를 휩쓸고, 삼성과 현대가 첨단 기술을 선도하며, 동시에 전통 명절이면 여전히 조상에게 절을 올린다. 우리에게 로봇은 어떤 의미일까? 도구인가, 동반자인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아닌 새로운 무언가인가?


최근 미국 CES 2026에서 보듯, 이제 골렘과 프랑켄슈타인의 후예들이 실험실을 벗어나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휴머노이드 로봇, 가전로봇, 자율주행차, 배달 로봇, 수술 로봇, 돌봄 로봇이다. 더 이상 문학적 상상이나 영화적 스펙터클이 아니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병원에서 수술을 돕고, 도로를 달리며, 어쩌면 곧 우리 집에 들어와 아이를 돌보고 노부모의 식사를 챙길 것이다.


이 새로운 존재들을 우리는 '피지컬 AI'라고 부른다. ChatGPT 같은 AI는 화면 속에 존재한다. 텍스트로 대화하고, 이미지를 생성하며, 코드를 작성하지만, 물리적 세계에 직접 손을 뻗지는 않는다. 반면 피지컬 AI는 몸을 가지고 있다. 센서로 세계를 인식하고, 액추에이터로 세계에 작용한다. 물건을 집어 들고,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며, 인간과 같은 공간에서 인간과 접촉한다. 이 '물리적 접촉'이 모든 것을 바꾼다.


화면 속 AI가 잘못된 정보를 주면 짜증이 난다. 그러나 피지컬 AI가 잘못된 판단을 하면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 자율주행차가 보행자를 인식하지 못하면? 수술 로봇이 잘못된 곳을 절개하면? 돌봄 로봇이 노인을 침대에서 떨어뜨리면? 법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설계한 엔지니어? 제조한 기업? 운영한 병원? 구매한 개인? 아니면 로봇 자체?


거대한 화두가 앞에 던져졌다.


피지컬 AI가 제기하는 법적 쟁점들을 탐구하되, 단순히 조문을 나열하고 판례를 분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들과 씨름하고 싶다. 몸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위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책임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인간을 닮은 것을 만들고 싶어하며, 그 욕망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로봇과 인간의 관계는 도구와 사용자의 관계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있는가?


나는 23년간 검찰에서 일하다 변호사로 전직한 법률가다. 범죄와 처벌, 가해와 피해, 책임과 귀책의 문제를 오래 다루어왔다. 그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법은 단순히 규칙의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법은 인간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있다는 전제 말이다. 피지컬 AI의 등장은 바로 이 전제에 질문을 던진다.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의 행위에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아니, 그 전에, 자유의지란 도대체 무엇이며, 로봇에게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 글들은 법적 논쟁이면서 동시에 철학서이고,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미래학서이길 희망한다. 골렘에서 시작하여 휴머노이드로 이어지는 인공 생명체의 계보를 따라가면서, 인류가 오래도록 품어온 꿈과 공포를 탐구할 것이다. 그 탐구의 끝에서, 우리가 어떤 법을 만들어야 하는지,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한 가지만 더 말해두자. 프라하 전설의 끝에서, 랍비 로에브는 골렘을 파괴하지 않았다. 그저 잠재웠을 뿐이다. 골렘은 아직 어딘가에 잠들어 있으며, 유대인 공동체가 다시 위기에 처하면 깨어날 것이라고 전해진다. 구원자이자 파괴자, 도구이자 위협, 우리를 지키면서 동시에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 이 양가성이야말로 기술 문명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피지컬 AI 시대를 살아갈 우리는 어떻게 이 양가성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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