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트로픽 갈등 사태로 돌아본 노벨의 도덕적 부채
엔트로픽 사태로 노벨상 제정계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첨단 기술의 '이중용도'(원래 목적과 달리 군사용도 등에 사용되는 dual use) 문제에 대한 역사적 사례의 탐구이가도 합니다.
노벨은 당대 최고의 화학자이자 기술의 군사화를 가업으로 삼았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은 크림 전쟁(1853~1856) 당시 러시아 차르의 군대에게 해저 기뢰를 납품하여 영국 해군의 진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며 거대한 부를 축적했던 무기 제조업의 선구자였습니다.
노벨은 이러한 가업의 토대 위에서 불안정한 니트로글리세린을 실용화하는 데 매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1864년 실험실 폭발 사고로 막내동생이 목숨을 잃고, 아버지 임마누엘이 중상을 입는 참극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비극에 굴하지 않은 노벨은 1865년 기폭장치를 발명하고, 1867년에는 규조토에 니트로글리세린을 흡수시켜 안전하게 운반 및 폭발시킬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본래의 의도는 철도 개설, 터널 굴착, 파나마 운하 건설 등 산업 혁명기의 거대한 토목 공사에서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하고 굴착 효율성을 비약적으로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적 의도의 발명품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들의 군비 경쟁 속에서 대량 살상 무기로 빠르게 편입되었습니다.
노벨 스스로도 군사적 응용에 기여하는 무기들을 후속 개발하며, 산업가와 무기 제조업자 사이의 경계에서 모순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노벨의 인생관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1888년 4월 15일자 프랑스 르피가로(Le Figaro)에 부고기사가 실렸습니다. 실제로는 노벨의 형의 사망에 대한 부고기사였는데, 노벨로 착각하고 나온 오보였습니다.
프랑스어 원문은 이랬다고 합니다.
"인류의 은인으로 여겨지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한 남자가 어제 칸에서 사망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인 노벨 씨다. 노벨은 스웨덴인이었다."
르 피가로가 던진 "인류의 은인으로 볼 수 없다"는 냉소적인 평가는 살아있는 발명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충격을 남겼고, 사후에 자신이 인류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될 것인지에 대한 통렬한 자각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의 무기화를 되돌릴 수 없음을 직시하고, 1895년 파리의 스웨덴-노르웨이 클럽에서 자신의 막대한 유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최종 유언장에 서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매년 수여되는 물리학, 화학, 생물의학, 문학, 평화 부문의 노벨상이 탄생했습니다.
AI선구자들인 제프리 힌튼, 데미스 허사비스 모두 2024년도에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벨의 선택은 개인이 발명한 '이중용도' 기술의 창조자가 자신의 사적 자본을 재분배하여 도덕적 결함을 보상하려 한 역사상 최초의 적극적인 거버넌스 행위로 평가됩니다.
자사 AI 모델을 통한 감시와 자율 무기 탑재를 방지하기 위해 벌어진 앤트로픽 사태는 노벨이 느꼈던 윤리적 부채 의식이 현대 실리콘밸리에서 작동하는 방식이 아닐지요.
기술개발자들이 종종 언급하는 '기술중립성'이란 가치를 세상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역사적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