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와 <케빈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에 대한 신형철의 글
신형철은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에 대해 씨네 21에 <어떤 사랑의 실패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다. 글에서 그는 작중 케빈의 엄마 에바의 육아가 미숙함을 문제삼다가, "좋은 엄마가 아니라고 해서 나쁜 여자인 것은 아니다"는 말로 에바를 두둔하며 성급하게 논의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 문장도 결코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는 못한다.
좋은 엄마인지 여부가 여성을 평가하는 중대한 기준이라는 전제하에 쓰인 이 문장은, “엄마 역할을 못하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만회하면) 나쁜 여자까지는 안 될 수 있어”라는 시혜적인 태도가 깔려 있다. 표면적으로는 에바와 여성을 옹호하는 듯한 이 문장이 실은 ‘여성의 가치는 모성으로 판단된다’는 가부장적인 전제를 구조적으로 내포하는 것이다. 나쁜 질문에 친절하게 답하는 이 문장에서는 시혜의 언어가 억압의 구조를 공고히 한다.
자식은 결코 부모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 좋은 뜻을 지닌 부모 밑에서도 나쁜 자식이 자랄 수 있는 것이다. 문제적인 저 문장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에바가 나쁜 여자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사실 나쁜 엄마도 아니다. 에바는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차마 껴안아주지는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아들을 현실적으로 돌봐주었다.
케빈과 에바의 심리전
케빈이 벌이는 일련의 ‘시위’는 엄마에게서 사랑이라는 보물을 빼앗아 내려고 하는 쟁탈전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결국 엄마에게서 사랑을 뺏어오는 데 실패한다. 결국 그의 시위는 활시위로 옮아간다.
과연 케빈은 괴물이다. 그렇다면 그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괴물이 되었나? 케빈은 그가 활을 든 순간 괴물이 된 것일까? 아니다. 진정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구애의 편지를 화살로 대신하지 않는다. 케빈의 방식은 일찍부터 잘못되었다.
신형철은 그런 케빈이 잘못된 만큼 에바도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케빈의 악의가 온전히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에바의 무의식적인 거부감과 충돌하며 빚어진 비극적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이의 극단적인 파괴성을 '어머니의 사랑 결핍' 탓으로 돌리는 것, 그리고 에바에게 모성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훼방꾼 케빈과 에바의 불구성
에바의 돌봄이 분명 사랑 없는 노력의 형태였을지언정, 그녀는 언제나 좋은 쪽으로 최선을 다했다. 반면 에바를 사랑하는 케빈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렇지만 자신이 바뀌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끊임없이 상대방을 괴롭힌다. 아이라고 해서 관계성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못한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신형철의 말대로 관계라는 것은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이때 한쪽이 끊임없이 훼방을 놓고 있다면 다른 한쪽은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케빈의 본성에 대한 복잡한 질문을 차치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케빈이 자신의 결핍을 무기화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다. 에바가 그런 케빈을 껴안아주지는 못했다고 해서 그녀를 나쁜 엄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인간은 괴물을 사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마더>
봉준호 감독의 <마더> 속 혜자(김혜자 분)와 도준(원빈 분)의 관계성은 <케빈에 대하여> 속 모자의 그것과 비슷한 듯 다르다. 케빈은 엄마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을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도준은 엄마가 자신에게 농약을 먹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혜자는 그 과거를 묻어두고 싶어 하고, 에바는 돌아가고 싶어 한다. 혜자는 번번이 발가벗겨지면서, 에바는 토마토와 피에 파묻히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혜자는 스스로 진통제보다 마취제에 가까운 침을 허벅지에 놓고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고, 에바는 그 자리에서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게 두 모자의 불편한 관계는 각자의 방식으로, 끊어지지 않고 지속된다.
봉준호의 특별한 시선
봉준호는 이러한 공생의 구조를 독특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개를 훔쳐간 노숙자가 의외로 친절했던 것처럼, 〈마더〉에도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혜자는 억척같이 아들의 우산이 되어 살아가지만, 정작 세상의 우산은 그녀를 제때 가려주지 않고 이용해먹기만 한다. 그런 세계 안에서 물건을 제값으로 바라봐주는 인물은 고물상뿐이다. 노숙자가 자신으로부터 도망가는 현남에게 무말랭이를 주워다 주는 장면과, 고물상이 혜자에게 천 원을 돌려주는 장면은 닮아 있다.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 인물들은 남들이 외면하는 곳을 은밀하게 보여준다.
고물상은 도준을 보고, 도준은 혜자를 본다.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혜자에게 도준은 마주하기 싫은 시선이자 거울이다. 혜자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도준의 눈길을 견디지 못하는 만큼, 도준을 똑바로 보는 고물상의 시선 역시 견디지 못한다. 감옥에서 도준에게 그랬듯 그에게도 마취침을 놓아주려 하지만, 그가 도준을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홧김에 그를 죽여버린다. 도준이 잡혀가는 것은 곧 공생 관계의, 그리고 자신의 생존법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패한 사랑의 공존
혜자는 아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라 부르거든 가만있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사랑의 언어를 빌렸지만 실은 복수의 문법으로 쓰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으로 사람을 죽인 도준을 괴물로 보았지만, 도준이 진정으로 비춰준 것은 혜자가 평생 외면해 온 자신 안의 괴물이었다. 아들에게 좋은 엄마였다는 믿음과 자신의 부끄러운 삶은,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들추어지는 순간 산산이 무너진다. 혜자는 공들여 쌓아 온 탑이 모래성이었음을 깨달으며 발가벗겨진다.
사랑받지 못한 아들들과 최선을 다하는 엄마들. 그들은 저마다의 관계성과 생존법을 끝내 놓지 않으며, 그렇게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진정한 사랑이 연민의 형태로 잠깐 얼굴을 내미는 순간이 있다. 면회실에서, 도준을 대신해 범인이 되어버린 진정한 약자를 바라볼 때다. "너 부모님은 계시니? 없마 없어? 으흐흑……" 그 울음소리만이, 이 영화들 안에서 계산 없이 새어 나온 유일한 사랑의 감정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