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분과 대화하던 중 쌍팔년도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흔히 구시대의 부정적 잔재가 횡횡하던 시기를 특정할 때 쌍팔년도라는 은어를 사용합니다.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1955년을 가리키는 말에서 쌍팔년도가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1955년이 단기 4288년이라서 그렇다고 하네요.
88 올림픽 이후, 쌍팔년도는 1980년대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오래된 관습이나 시스템을 비판할 때 쌍팔년도식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쌍팔년도는 구시대적이고 고리타분한 사고나 이제는 사라져야 할 악습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쓰이는 말입니다.
이 생각이 떠올랐을 때 함께 있던 지인분께 쌍팔년도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중국에서는 8이라는 숫자가 매우 길한 의미를 내포해서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숫자라는 겁니다.
이 내용도 검색해 보니 중국어로 8은 '바' '빠' '파' 등으로 발음된다고 하네요. 숫자 8이 재물을 쌓다, 부자가 되다,라는 뜻의 파차이와 발음이 비슷해서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중요한 날짜나 번호에 8이 들어가길 간절히 바란다고 합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8월 8일 오후 8시 8분에 시작된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지금까지의 내용은 네이버 검색을 통해 알아낸 정보입니다.]
같은 숫자 8 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쌍팔이라는 부정적 의미이고, 중국에서는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게 조금 웃기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건 해석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무속이나 운세에 의지하는 것도 긍정적인 해석을 구하고자 함일 테고, 자기 사주팔자가 어떤 일에 부정적으로 연루되어 있으면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부적도 구매하는 것 같고요.
참고로 저는 그 흔한 점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라 당사자들의 간절함을 모르니 이 정도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무속이나 운세보다는 의미와 무의미를 결정하는 심리적 요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의미 있다거나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건 해석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개인의 해석 방식은 나고 자란 국가나 문화 같은 거시적 요소, 가족 구성원이나 동네 분위기 같은 미시적 성장환경의 영향으로 결정될 겁니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대상들이 출현하고 분배되는 기준입니다."
살아오면서 관계 맺어온 중요한 사람들이 자기 대상이 되어 자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이 자기 대상은 평생에 걸쳐 한 사람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기에, 긍정적 자기 대상을 많이 가진 사람과 부정적 자기 대상을 많이 가진 사람은 살아가면서 뚜렷하게 차이 나는 모습을 보일 겁니다. 당연하게도 자기와 타인, 세상에 대한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해석에 대해 설파한 많은 학자가 있지만 오늘 저는 폴 리쾨르의 해석학을 끌어와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학자인 폴 리쾨르는 대화의 철학자로 불립니다. 그는 주류 철학에 대한 거센 비판을 통해 자기 가치를 높인 다른 대가들과는 달리, 그들이 비판하는 요소를 다시 뜯어보고 재해석하여 수용할 부분은 수용하려는 통합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리쾨르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의심의 거장들이라 부르며 이들의 철학을 의심의 해석학이라 명했습니다. 의심의 해석학은 텍스트를 고고학적으로 해부하여 그 속에 숨겨진 억압적 구조나 욕망을 폭로하는 비판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리쾨르는 이러한 비판이 주체의 자기기만을 벗겨내는 필수적인 과정임을 인정했습니다.
리쾨르 해석학의 또 다른 갈래는 의미 회복과 신뢰의 해석학입니다. 이 해석학은 텍스트가 제공하는 의미의 풍요로움에 자신을 맡기고, 그 속에 담긴 존재론적 진리를 복원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는 텍스트의 세계를 독자의 삶 속으로 가져오는 '전유(Appropriation)'를 지향하며, 해석자가 텍스트의 부름에 응답하는 '증언'의 행위가 된다고 합니다.
전유는 분석된 구조를 통해 텍스트가 가리키는 '가능한 세계'를 독자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자기 이해를 확장하는 최종 단계입니다.
이는 자아를 텍스트에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통해 나르시시즘적 자아를 포기하고 확장된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텍스트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열어주는 새로운 존재 양식에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변화를 겪습니다.
리쾨르는 이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인간의 의식과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리쾨르에게 있어 진정한 해석학은 파괴적인 의심을 통과한 후에 도달하는 제2의 순진성(Second Naiveté)이며, 이는 비판과 수용 사이의 끊임없는 변증법입니다.
이처럼 리쾨르는 하나의 극단을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의견이든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의견이 비록 모순을 품고 있더라도 재해석을 통한 수용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 내용은 저번 글에서 다룬 혐오와도 관련이 깊습니다. 우리는 언어로 말하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언어라는 것은 무엇이든 내포할 수 있습니다. 파괴와 구원, 의심과 신뢰, 거짓과 진실, 갈등과 회복.
무엇이 됐든, 한 사람의 언어 체계를 통해 이 모든 것이 발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합니다. 언어는 단순히 실재를 지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실재를 새롭게 창조하고 인식하게 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쌍팔년도식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매우 불쾌하겠죠. 이 말 자체가 기본적으로 혐오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고요.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혐오를 상징하는 발언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 수위가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상에서 더욱 심각합니다.
왜 누군가는 특정 타인을 혐오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걸까요. 리쾨르가 말한 텍스트를 마음으로 치환하여 생각해 보면, 혐오의 씨앗이 나의 자기 대상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게 부정적 사고를 덧씌운 사람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으니, 그와 비슷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에게 감정을 전위시켜, 해소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내는 게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혐오를 쏟아내는 가해자도 누군가로부터 상처 입은 피해자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요?
의심하고 비판하는 마음이 설명과 이해를 통해 수용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재해석될 수는 없는 걸까요?
과거의 자기 대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 방식과 미래를 향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 수는 없는 걸까요?
리쾨르 말대로라면 자아는 타자와 분리되고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 내면에 타자성을 품고 있는 존재입니다.
리쾨르는 말했습니다.
양심의 목소리는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타자의 부름이며, 타자를 향한 배려는 진정한 자기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적인 경로라고요.
인간은 자신의 무한한 열망과 유한한 조건 사이의 긴장을 견뎌야 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불균형을 매개하려는 시도가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구성한다고요.
과거 사건이 현재 언어의 이야기로 환원되어 혐오 발언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상처 입은 존재라면요.
시간은 흐릅니다.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하여 자아의 성숙을 이룰 수만 있다면, 혐오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수용으로, 수용에서 신뢰로, 신뢰에서 사랑으로. 이렇게 점진적으로 새로이 해석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리쾨르는 자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혹은 읽어온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구성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잘못 해석된 과거가 현재의 자기 정체성을 형성했지만, 자신에게 자기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줌으로써, 과거의 나와 현재 나 사이의 불일치를 통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리쾨르는 주체의 해체라는 위기 속에서, 서사를 통한 자기 구성이라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 서사적 정체성을 통해 자신의 유한함을 받아들이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면 잘못 해석된 주체의 정체성과 책임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결국 자기 삶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써 내려가고 해석할 것인지는 자신의 몫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리쾨르의 감동적인 문장을 남깁니다.
사랑은 정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차가운 계산에 머물지 않도록 끊임없이 고양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정의는 사랑이 구체적인 사회적 실효성을 갖게 하는 필수적인 매개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