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숙제

1. 때

by 김빗


소설 연재를 하지 않는 요일에, 잠시 쉬어갈 겸 가벼운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독자님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작 전에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 글이 냉철한 논리보다는 무지성에 가까운 주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의 구조를 엄정하게 구축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제가 숨을 돌리기 위한 막간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1.

알랭은 배꼽에 대해 곰곰 생각한다

......

하지만 몸 한가운데, 배꼽에 여성의 매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 남자(또는 한 시대)의 에로티시즘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무의미의 축제 10pg, 밀란 쿤데라 -


*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에서 여성의 '배꼽'에 대한 에로티시즘을 언급했습니다.

저는 저 문장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해봤습니다. 바로 배꼽 때입니다. 배꼽에 때가 끼려면,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안 씻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종류의 치욕스러운 말을 듣게 됩니다. 물론, 운이 아주 좋은 분들은 이러한 치욕을 비껴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치욕적인 말을 듣거나, 그러한 일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은 내 뜻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니까요.

우리말에 자학적으로 자신을 낮추는데 쓰이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 비하면 저는 발톱 때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언어는 다양할진대, 왜 이런 극단적인 말이 생겨난 걸까요?

우선 때에 관해 알아봅시다.


<때>

1. 옷이나 몸 따위에 묻은 더러운 먼지 따위의 물질. 또는 피부의 분비물과 먼지 따위가 섞이어 생긴 것.
2. 불순하고 속된 것.
3. 까닭 없이 뒤집어쓴 더러운 이름.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배꼽 때와 손발톱 때는 1번에 해당하는 의미일 겁니다.

각질과 먼지가 땀과 뒤섞여 손발톱 아래에 쌓이면 그것이 때가 됩니다. 때는 때때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평소 타인의 배꼽 때나 발톱 때를 볼 일은 거의 없지만, 손톱 때는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손톱 아래가 시커멓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 지저분한 사람, 자기 관리가 안 되는 사람 같은 이미지로 말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때는 정말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브런치 북을 통해 무의미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때에서 어떠한 의미나 가치도 발견할 수 없는 걸까요?


우선 이 질문에 답하려면, 프랑스에서 수학한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말을 들어봐야겠습니다.

그녀는 문명 내에서 정상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타자를 괴물이라 칭했습니다.

이 괴물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외형적 조건을 갖춘 존재일 수 있고, 정립된 사회 규범과 정체성을 무너트리려는 대적자일 수도 있습니다.

또 똥오줌, 생리혈, 썩어가는 시신 같은 물질일 수 있으며, 자기 내부의 더러움을 투사한 정신작용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녀가 정의하는 괴물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기거하는 불안정한 존재인 것입니다. 내 안에 이미 포함하고 있지만, 내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에 질서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려는 요소들 말이죠.

나는 정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기에 정상적이지 않은 요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내 것이 아니어야 나는 정상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사회에 소속되어 성실하게 일하고 세금도 납부하는 건강한 문화인이다. 이런 내가 때나 끼어있는 인간들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시민일 리가 없다. 그렇기에 몸을 깨끗이 씻고 손발톱을 정리해, 나의 일부지만 혐오스러운 물질인 때를 제거해야 한다.

대강 이런 논리일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우리 사회와 문화가 숨기고, 밀어내고, 부인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바로 괴물입니다. 한 사람이 피치 못할 일로 인해 지금의 자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많은 걸 잃게 되면, 그토록 혐오하던 괴물이 될 수도 있겠지요.

언젠가 내게 닥칠지 모를 불안정한 삶에 대한 공포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밀쳐내고, 도려내고, 배제하여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난민, 이주자, 외국인노동자, 성소수자들이 이런 괴물에 포함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좀비, 에일리언, 프랑켄슈타인이 이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테바 주장의 핵심은 잘못된 혐오로 인해, 잘못된 주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내가 혐오하는 대상은 괴물이고, 그들을 혐오하는 나는 정상인이라는 기이한 정체성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만연한 남녀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 종교 갈등, 인종 갈등, 정당 갈등도 이러한 선상에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건 괴물로 상징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한 축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 존재들이죠.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조선족을 포함한 외국인노동자가 없다면 우리나라의 건설업과 제조업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때의 무의미함과 무가치함에서 의미를 찾으려다가, 괴물은 문화의 외부자라는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얘기를 한참 했는데요.
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의 손톱에 때가 잔뜩 끼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혐오하는 게 정당한 걸까요?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또 나와 마주치기 전까지 무엇을 하다 왔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의 손톱에 낀 때는, 신성한 노동의 결과물일지 모릅니다. 가족을 위해 땀 흘려 일한 보상물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때는, 정말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물질일 겁니다.


짧은 메모

한 사람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금물. 하지만 쎄한 느낌이 든다면 경계하자. 쎄함은 본능에 의거한 과학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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