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의 어느 저녁,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심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천천히 걸으면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은 걸리는 큰 공원이었다.
이 더운 날에 왜 야외에서 만나자는 건지 모르겠다. 해가 져도 더운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공원 안에 카페가 있으니 힘들면 그곳으로 유도해야겠다.
나는 만남 장소인 동문 앞으로 갔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5분 정도 기다려도 선배가 나타나지 않아, 나는 문자를 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원 입구를 통과하자 왼편에 큰 연못이 보였고 야외 계단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계단에 앉았다.
연못 중앙에 설치된 수십 개의 노즐이 높낮이와 강도를 바꿔가며 물줄기를 뿜어댔다. 바닥에 설치된 LED 수중등은 수시로 색을 바꾸었고, 곳곳에 배치된 고출력 스피커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집에서 공부만 하던 나는 오랜만에 힐링하는 기분이 들었다. 음악분수가 선사하는 시청각 향연에 피로감도 사라지는 듯했다. 나는 그와의 약속도 잊은 채, 눈을 감고 음악에 심취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어디선가 진한 향수 냄새가 훅 풍겨왔다. 나는 눈을 뜨고 향이 풍겨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가 미소 짓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안녕."
'이 니글거리는 말투는 어디서 배워왔지? 머리는 또 뭐람. 덥수룩하던 앞머리에 왁스를 발라 넘겼네. 피부는 푸석했는데 뭘 발랐는지 광이 다 나네. 어우 냄새. 향수를 통째로 들이부었나? 눈빛은 왜 이렇게 축축해.'
"무슨 생각해?"
"맞아...요?"
"뭐가?"
"구려 선배 맞아요?"
"나 아닌 것 같아? 그냥 돌아갈까?"
'엥? 설마 밀당하는 거야? 이런 허접한 수에 말릴 수는 없지.'
"씻고 와요. 향수 냄새 너무 역해요."
나는 일부러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순식간에 물이 고였다. 선배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뭐야, 이 인간? 황당하기 짝이 없네.'
"왜 울어요?"
내 물음에 선배는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보란 듯이 들이밀며 말했다.
"온 세상이 여름인데 너 혼자 겨울을 살고 있잖아. 그게 너무 슬퍼."
"뭐, 뭐요? 선배가 슬프단 거예요, 내가 슬퍼 보인단 거예요?"
"둘 다."
"착각마요. 난 안 슬퍼요."
"아니야, 넌 슬퍼."
"안 슬프다구요."
"슬픔은 사람마다 달라. 내가 느끼는 슬픔을 너의 차가운 논리로는 설명 못 해. 이 슬픔은 나에겐 진실이야. 내가 슬프다면 슬픈 거야."
"하아... 슬픈 건 선배 마음이고, 나는 하나도 안 슬프다고..."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짜증이 났다. 그는 눈물을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부모에게 꾸중 듣는 아이처럼 계속 울어댔다. 나는 떼쓰는 자녀를 보고 있는, 엄마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미안해요. 그만 울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티슈를 건넸다. 그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전에 그랬지. 사랑이 뭐냐고? 곰곰이 생각해 봤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교류가 아니야.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우리 둘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마법이야."
'우리 둘만의 세계라니.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는데, 왜 멋대로 끌어들이는 거지. 아까운 시간을 이런 식으로 낭비할 줄이야. 애초에 만나는 게 아니었어. 집에 가야겠다. 선배가 상처받겠지만 어쩔 수 없지. 내 시간은 소중하니까.'
나는 일어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보겠다고 입을 떼려는데, 잔뜩 움츠린 그의 등이 애잔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걸까. 갑자기 그가 불쌍해 보였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선배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이렇게 많이 변했어요?"
걱정하는 듯한 내 물음에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달라지겠다고 너한테 약속했잖아."
"나 때문이라는 거예요?"
"응. 얼마나 노력했는데."
"난 약속한 적 없어요. 권유만 했지. 선배가 일방적으로."
그는 내 말을 끊었다.
"거짓말하지 마. 우린 분명히 약속했어. 바뀌어서 돌아오면 나 만나주기로 했잖아."
나는 답답함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데 어쩌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것 같지가 않은데. 나는 짜증 내기보단 달래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는 선배가 예전처럼 돌아오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충분히 오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다고 우리가 사귈 순 없어요. 저에겐 선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제 맘 알아주셨."
그가 또 말을 가로챘다.
"알아. 나도 그런 적 있으니까.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여지를 주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 너는 오해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오해가 아니야. 널 정말로 좋아하니까... 갑작스러우면 거부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어. 맞아. 우린 너무 오래 안 만났으니 그런 마음은 당연한 거야. 앞으로 자주 만나자. 그럼, 너도 몰랐던 네 마음을 알게 될 거야."
나는 완전히 잘못된 그의 생각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그는 자기감정에 취해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전에 나한테 꼴도 보기 싫다고 했지. 그 말이 나에겐 큰 충격이었어. 나는 그런 얘길 들을 사람이 아닌데 왜 그렇게 모진 말을 했을까? 일부러 그랬겠지. 그럴 거야. 예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거든. 그땐 내가 서툴러서 상처만 받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그러다 다른 남자한테 빼앗겼지. 이젠 알아. 네 마음이 진심이 아니란 걸.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라는 앙탈이라는 걸. 그동안 하루 종일 네 생각만 하면서 성격 개조했어.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이 꽤 멋지더라. 이만하면 널 만나도 되겠다는 생각에 연락한 거야. 어때? 나 멋있지?"
'아니야. 이건 아니야. 진짜 이건 아니야! 당신은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치료가 필요해.'
"선배... 선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왜 두 번씩이나 불러. 내가 그렇게 좋아?"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가 가진 인내심을 모조리 끌어모아 겨우겨우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끊지 말고 내 말 들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냥 들어요. 다음 학기에 휴학할 거라고 했죠? 그럼 다른 짓 하지 말고, 심리상담받아요. 환자 취급해서 기분 나쁘겠지만, 선배는 지금 치료가 필요해요."
"네가 상담해 주면 안 돼?"
"말 끊지 말고 들어요. 선배 대접해 주기도 싫으니까. 선배 지금 제정신 아니에요. 무슨 생각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너무 무서워요. 휴학하면 딴생각하지 말고, 상담치료받아요. 선배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부탁이에요. 제발..."
그는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한동안 잊고 지낸 집요한 눈빛이었다. 나는 무서웠지만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래. 네 말대로 치료받을게. 그리고... 너도 문제 있다는 얘기 들었어."
'문제? 하... 누가 또 나불거렸나 보네.'
"괜찮아. 나도 문제 투성이니까. 치료받고 괜찮아지면 다시 돌아올게."
"돌아오지 마! 두 번 다시 나한테 연락하지 마. 치료 잘 받고, 공부 열심히 해서 네가 말했던 좋은 직장에 취업해. 그러면 나 같은 건 비교도 안 되는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을 거니까."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내 머리가 젖지 않게 가렸다. 나는 팔을 휘둘러 그의 손을 쳐냈다.
"너보다 괜찮은 여자는 없어. 내 얘기 이만큼 들어준 여자는 너밖에 없어. 나, 네가 원하는 남자가 되어서 돌아올게. 반드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어떤 의도를 지녔든, 그에겐 아무 의미 없는 말일 테니까.
1.. 1.. 2..라는 번호만 생각났다.
그가 떠나자, 빗줄기가 거세졌다.
예보에 없던 소나기라 그런지 사람들은 우산을 챙겨 오지 않았다.
다들 비를 피해 흩어졌다.
이 넓은 야외 계단에 나 홀로 남겨졌다.
분수는 홀로 춤추었다.
빗발이 약해지자, 우산 쓴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두툼한 신문이나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클래식 대신 신나는 K-POP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우산 아래 몸을 숨기고, 무더운 여름밤에 마음을 내맡겼다.
우산들 틈에서, 나 혼자만 비에 젖었다.
전 남친들이 생각났다. 자기 어깨가 다 젖어도 내가 비를 맞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게 아무리 버거워도, 들어주려는 시늉이라도 하는 착한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왜 모두 날 떠났을까? 왜 모두 심리치료가 필요했을까? 내가 그런 남자들만 만날 걸까? 아님, 내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걸까?
모르겠다.
꼴도 보기 싫다,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자주 하긴 했다. 불리할 땐 우는 연기로 그들의 분노를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그 정도 일로 못 견디고 떠나간 건 아닐 것이다. 연인 사이에서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만 있는 건 아니라고 확신한다.
가끔 전 남친들 소식이 들려올 때가 있다. 나보다 좋은 여자 만나서 잘 사귀고 있다고 한다. 그 여자들은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내가 사람 만들었으니까.
오늘 일을 계기로 선배도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나보다 좋은 여자 만나서 잘 사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면 한다. 물론 어려울 수도 있다. 선배는 내 손을 거의 타지 않았으니까.
만약, 저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이 다시 돌아온다면 오늘처럼 쉽게 보내지 않을 것이다. 혹독하게 가르쳐서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견디면 나랑 사귀는 거고, 못 견디면 떠나면 된다. 그뿐이다.
나는 아쉬울 게 없다. 남자는 많으니까.
좋은 남자 만드는 건, 나 하기 나름이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