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바람이 차고 거셌다. 기상캐스터가 역대급 꽃샘추위라고 했다. 마음 같아선 약속을 취소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취소하면, 양방향 소통을 알려주고 싶다는 내 말이 힘을 잃기 때문이다.
선배에게 시달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집요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시간을 보며 한탄했다. 씻어야 하는데 몸을 일으키기 귀찮았다. 특단의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 저항을 이겨내기 위한 2분 법칙. 나는 누운 채,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딱 2분만 스트레칭하자. 2분만 하면 씻을 힘도 생길 거야. 딱 2분만."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이불을 옆으로 제치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양팔을 위로 쭈욱 뻗자 뻐근함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2분 동안 스트레칭을 하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
나는 겨울옷으로 몸을 둘둘 감싸고 약속 장소로 갔다. 선배에게 여자로 보일 마음은 없었기에 화장은 기본만 했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선배는 벌써 와있었다. 그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출력한 듯한 종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음료를 주문하고 그가 앉은 자리로 갔다.
"선배."
내가 부르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후다닥 가방에 넣었다.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뭐냐고 묻지 마. 차차 알게 될 테니까."
그 특유의 집요함이 엿보이는 눈으로 말했다. 나는 약간 무서워져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커피 받아 올게요."
음료를 받아서 돌아오는데 선배의 뒷모습이 자못 비장해 보였다.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겁이 났지만 그만큼 궁금증도 커졌다. 나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스몰 토크를 시도했다.
"자리도 많은데 왜 이렇게 구석에 앉았어요? 누가 보면 비밀 얘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선배의 눈이 둥그레졌다. 말 못 할 비밀이라도 들킨 것 같았다.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보통이 아니군..."
"뭐가요?"
내 물음에 선배의 눈이 또 한 번 커졌다. 이때 난 약간의 절망감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분위기를 띄울 수밖에.
"뭘 그렇게 놀래요? 선배 말 다 들렸어요."
"흠. 그랬나."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여기 좀 칙칙해요. 밝은 자리로 옮겨요."
내 말에 그는 뭔가를 계산하는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 하품이 나올 것 같았다. 침묵은 곧 깨졌다.
"좋아, 옮기지. 자리는 네가 정해."
나는 음료를 들고 카페 정중앙에 놓인 테이블로 갔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이었다. 그는 이 자리가 부담스러운 듯했지만, 군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여기 밝고 좋다."
"밝은 걸 좋아하는군."
"는군! 말투가 왜 그래요? 좀 부드럽게 해봐요."
"부드럽게?"
"밝은 걸 좋아하는구나. 이렇게요."
그는 시도해 보려고 입술을 씰룩씰룩 댔지만 결국 입을 떼지 못했다. 노력하려는 그의 모습을 보자, 조금 전 느낀 절망감이 약간은 옅어졌다. 내가 즐거운 표정을 짓자, 그는 괴생명체를 관찰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거짓이 아니었군."
"뭐가요?"
"밝은 곳에 오니 표정이 밝아진다라. 밝은 곳이 좋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걸 왜 분석하고 있어요?"
"흠... 분석에 반응한다. 원하는 자리로 옮길 만큼 자기 주도적이다. 타인의 말투를 바꾸려는 통제적인 면도 있다. 제법 진취적이군."
제법... 진취적이군? 하... 이번에는 정말로 절망스러웠다. 스몰 토크고 뭐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실망 가득한 톤으로 본론부터 물었다.
"할 말이 뭐예요, 선배?"
그는 내 감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리 차례가 왔다는 듯 자신 있게 종이를 꺼내 건넸다.
"읽어!"
받아 든 종이에는 작은 글씨가 빼곡하게 프린팅 되어 있었다.
[연애 적합도 보고서]
<너와 나의 궁합 데이터>
1. 우리는 'Fancy Asian'으로 불리는 동북아시아 계통의 훌륭한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2. 너는 스물셋, 나는 스물넷이라는 젊은 나이다. 이는 확률적으로 건강한 신체를 보유하고 있음을 알리는 지표로 작용한다.
3. 우리는 대한민국 대학 순위 10위권 내의 인서울 대학생이다. 이는 확률적으로 뛰어난 지능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리는 지표로 작용한다.
4. 내 전공은 전자공학으로 다른 학과에 비해 질적으로 우수한 취업률을 보인다. 이는 미래 자산 형성과 자녀 양육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지표로 작용한다.
5. 네 전공은 영어교육으로 임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난관이 있다. 학생 수가 줄고 있기에 합격 전망은 어둡다. 하지만 너는 사교적 성격으로 사교육시장 진출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이는 큰 이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6. 나는 입대 전 신체검사에서 1등급을 부여받았고, 현역병으로 무사히 군 생활을 마쳤다. 이는 사회적 평판에 안정감을 주는 지표로 작용한다.
7. 너는 균형 잡힌 몸매와 대칭적인 얼굴, 깨끗한 피부와 맑은 혈색을 지녔다. 이는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는 지표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모든 지표를 종합해 보았을 때, 너와 나의 유전자 결합은 우수한 형질의 아이를 배출할 확률이 높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더해 안정된 가정을 일굴 가능성도 높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시작함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부디 귀하의 합리적 선택을 바란다.
이 얼빠진 글을 다 읽은 나는 그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열을 식히기 위해 가라앉은 톤으로 질문했다.
"선배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요?"
"사랑. 호르몬과 환상이 결탁해 만들어낸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 근데 왜 사랑을 하려 하죠?"
"사랑이 아니라 계약을 동반한 사회적 결합이다."
"연애도 결혼도 계약 이전에 사랑이에요. 최소한 정서적 공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요."
"공감은 환상이고 사랑은 은유다. 생물학적 본능을 외면한 말장난이자, 사회적 불확실성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불과하지. 객관적 지표만이 감정이라는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
"불쾌하네요.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불쾌함 또한 사회적으로 학습된 주관성에서 기인한다. 나는 감정이라는 거짓을 소거하기 위해, 상관관계라는 팩트를 알려준 것일 뿐. 효율성을 방해하는 의사소통은 지양하겠다."
"감각적 진실도 진실이에요. 선배 맘대로 재단하지 마요."
그와 대화 나누는 내 모습이 서러웠는지 마냥 눈물이 났다. 더는 아무 말도 하기가 싫었다. 티슈도 다 써버렸다. 남은 눈물은 흐르는 대로 두었다.
"눈물샘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거 보니 안구건조증을 염려할 필요는 없겠군."
"그만 좀 하라구요!"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가 맨손으로 눈물을 닦자, 그가 티슈를 건네며 속삭였다.
"너의 눈물이 나의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분비시키는구나."
나는 이 말에 놀라 그를 봤다. 그의 눈동자에 미약한 감정이 어려있었다.
"그게 감정이에요. 우리는 로봇이 아니잖아요. 선배도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구요."
"영혼? 글쎄. 많은 학자가 fMRI로 뇌를 들여다봤지만, 영혼의 존재는 발견하지 못했다."
지쳐버린 나는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꺼져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꼴도 보기 싫다고...?"
"네. 진절머리 나요. 꼴도 보기 싫다구요."
그는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그가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에게 상처 준 여자가 했던 말일지도 모른다. 잘하면 그가 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죠?"
내 물음에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원래대로 돌아와요. 지금이 보기 좋아요."
나는 당한 것에 분풀이라도 하듯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연애하고 싶으면 예전처럼 해요. 다른 남자한테 여자 한 번 빼앗겼다고 이게 대체 뭐예요? 감정을 담아 진실되게 다가가라구요. 딱 한 번 실패했을 뿐이에요. 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보장도 없어요. 제 말 이해하겠어요?"
그는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 나를 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 돌아가면... 나 만나 줄래?"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게서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다려줘. 변해서 돌아올게."
선배는 이 말만을 남기고 돌아섰다.
*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날 이후 오랫동안 선배를 볼 수 없었다. 우연히 그와 마주쳤다는 후배들 얘기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후배들이 인사하면 받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동아리 활동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여름방학이 됐다. 나는 집에 틀어박혀 임용시험을 준비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무도 안 만나고 공부만 했다.
방학이 절반도 채 안 남은 어느 날 낯선 문자가 왔다.
선배, 선배였다.
"잘 지냈니? 보고 싶네."
말투가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과는 괴리가 커서 재차 이름을 확인했다. 선배가 맞았다.
선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만나자고 했고, 나는 공부할 게 많으니 개강 후 학교에서 보자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 학기에 휴학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 말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만은 확실했다.
거절할 핑계가 없었던 나는 한 번만 더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딱. 한 번만 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