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
“이 도시를 좀 보려무나. 샘슨철강이 곳곳에 스며있지. 우리는 여기서 뭔가를 이뤘다, 셸. 우리가 뭔가를 해낸 거야. 저기 프렌더개스트 빌딩을 봐. 그를 기억하니? 부치 프렌더개스트. 그는 꿈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왔었지. 그리고 우리가 그의 첫번째 공장을 위한 철강을 공급했다. 상자를 만들고 싶댔어. 모든 것에는 상자가 필요하다며.
"평생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려 해. 더 크게, 더 좋게, 더 빠르게. 유산을 만들어 남기려는 거야. 그러다 어느날 알게 되지. 자신이 만든 상자에 스스로 갇혀버렸다는 것을. 모든 건 상자 안에서 끝난단다, 셸.”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던 날 뉴욕의 마천루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백처럼 하는 이야기. 뉴욕시의 수많은 빌딩에 철강을 공급하고, 수많은 노동자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샘슨철강의 창업주는 대공황 앞에서 그동안 무언가를 해냈다고 생각했던 게 모두 헛된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모든 것은 박스가 필요하다. 모든 것은 박스 안에서 끝난다. 더 빨리, 더 크게, 더 좋게 무언가를 만들려는 모든 일은 사실 자기 자신이 들어갈 상자, 관을 만드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들아, 너는 다르게 살거라, 라고 해석되는 저 대사를 남기고 샘슨철강의 창업주는 마천루 꼭대기에서 몸을 던진다. 그후로 아들 셸은 죽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선대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기 위한—여정을 떠난다. 슈퍼파워를 손에 넣기 위한 여정을. 1930년대의 그 파란만장한 여정과 2020년 현재를 살아가는 슈퍼히어로들의 이야기가 세기를 넘나들며 오버랩되듯 번갈아 펼쳐진다.
슈퍼히어로 스판덱스를 입고 있다고 해서 모두 그렇고 그런, 뻔한 슈퍼히어로는 아니다. <주피터스 레거시>는 확실히 다르다. 전혀,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고 액션씬의 자극적인 재미가 부족하지도 않다. 하지만 소설로 읽어도 좋을 만큼 스토리가 좋다. 생각을 하게끔 한다. 슈퍼히어로에게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옳고 그름이란 무엇인지,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물론 그래서 (시청자를 생각하게 만든 죄로) 전문 비평가들에게 참혹한 점수를 받았고, 넷플릭스에서 시즌2를 만들지 않기로 초스피드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더니 같은 세계관에서 슈퍼빌런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스핀오프 제작을 주문했다. 넷플릭스 답다.) 하지만 라튼토마토 시청자 평가는 최상이었다. 해당 결정이 내려졌을 때 시청자 게시판들을 둘러봤었다. 넷플릭스는 왜 좋은 작품들은 모두 시즌1에서 잘라버리고 <루시퍼>처럼 재미없는 것들만 시즌8까지 제작하냐, 넷플릭스를 끊겠다 등등 격렬하게 항의하는 댓글이 줄을 이었었다. 좋은 스트리밍 성적에 기뻐하던 캐스트와 제작진도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시즌1으로 일단은 멈추게 되어서 굉장히 아쉽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시즌1으로 끝나서 굉장히 아쉬운 작품이 넷플릭스 상에 존재한다는 게 축복일 수 있다. 이런 시대에. 이런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