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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워내 Dec 13. 2023

거북이의 소원.0

다음 편이 더 있어요.


어떤 이야기를 하려면 오랜 과거로 넘어가야 한다. 주로 가지고 태어난 성질 같은 걸 이야기할 때 그렇다. 학교에 다니고, 회사에 다니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시선을 듣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태초의 성질.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주 먼 옛날의 선조로부터 내려온 물구나무의 느림보 DNA.


물구(물구나무를 줄여서)는 걸음 속도가 느린 나머지 횡단보도 시간을 꽉 채워 길을 건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에는 다리에 힘을 주고 보폭을 넓혔다. 달리기도 마찬가지였다. 민첩한 몸을 갖지 못해 체육 대회 때는 주로 자리에 앉아 박수를 쳤으며 생애 최초로 나간 대회에서는 그저 투포환을 힘껏 던지는 역할을 맡았다.


이 외에도 물구는 무언가를 배우는 데에도 약간 더뎠는데, 알파벳을 한 학기가 끝나도록 외우지 못했고, 공부를 잘해 반에서 상위권에 들어 본 영웅적 이야기를 가져본 적 없었다.


그런데도 물구는 스스로가 느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누구도 물구를 재촉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물구의 가족들도, 물구 스스로도 마찬가지였다. 느리면 느린 대로 물구는 물구일 뿐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며 커지는 몸집과 함께 뚜렷해지는 게 한 가지 있다. 그건 바로 공부로 만들어지는 순위이다. 반 전체에서 나는 몇 위인지, 수학 과목은 몇 번째로 못 했는지, 전교에서 나는 공부로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5학년이 된 물구의 중간시험이 한차례 끝난 뒤, 선생님과의 상담 시간. 선생님은 물구를 세워둔 뒤, 의자에 앉아 잔뜩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진하고 부진한 물구의 성적표를 본 담임 선생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애가 왜 그렇게 공부에 대한 욕심이 없니? 욕심 좀 가져봐”


어... 그런데 선생님은 틀렸다. 물구는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구는 수학시험에서 38점보다는 70점을 받고 싶었고, 입장료 500원인 독서실을 끊고 시험공부를 하기도 했다. 시험 전날 밤에는 창밖을 바라보며 "내일은 제발 시험을 잘 보게 해 주세요." 하며 기도도 했다.


질문을 받고 당황스러웠던 물구는, 잠깐이지만 선생님이 한 질문의 의도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등수가 낮으니까.. 공부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말한 거겠지?' 생각했다. 물구는 슬슬 머리를 굴리다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저는... 조금 천천히 하고 싶은데요...”


이건 수업을 소화해 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자, 구태여 욕심을 내어 친구들과 순위를 다투며 경쟁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거북이로 태어났으면, 거북이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인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비교할 수 있게 되자, 물구는 어쩐지 이런 느낌이 들었다.


세상은 빠르고 나는 느리고, 사람들은 앞서 나가고, 나는 멈춰있고, 나름대로 뛴다고 뛰는데, 내가 하는 노력이라는 건 턱없이 모자라기만 하고. 조급한 마음에 스텝만 꼬이네.


지구는 물구를 기다려주지 않고 효율, 생산, 성과, 성공을 추구하며 숨 가쁘게 돌아갔고 물구는 어쩐지 여기서 내팽개쳐진 것만 같았다. 팽글팽글 돌아가는 지구에 남아보려고 지구끄댕이를 꽉 쥐고 매달려 보지만 결국에는 놓쳐버리고 떨어지는 상상. 까만 우주의 끝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지구의 뒤통수를 보면서 갓 태어난 기린처럼 앉아 안돼..! 가지 마 나 데리고 가..! 소리치며 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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