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쓰는 즐거움

by 홍석기


“여보, 얘들아. 잠깐만 와 볼래?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또, 애들까지 불러요? 술 취했을 때는 말하지 마세요.”

“아빠, 무슨 일 있어요? 나 숙제 해야 하는데. 빨리 말해요. 간단히.”


“간단하지 않은 말을 빨리, 간단히 하라고 재촉을 하는군. 한 시간 아니, 하루 종일 이야기해도 부족할 텐데, 간단히, 빨리 말하라고 하니, 어디부터 말을 꺼내야 좋을지 나도 모르는데. 이 말을 꼭 해야 하는 건지. 허락을 받거나 결재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말하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해도 될 건데, 괜히 말을 꺼내는 게 아닌지 나도 모르는데,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누군가 말을 해 줄 거고, 내일이면 알 수 있을 거니까. 아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말하지 않고 알게 하는 방법도 많지만,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지만, 그래도 내 목소리로, 내 말을 해야 하잖아. 나중에라도 혹시, 내가 회사에서 잘렸다는 말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어 봐. 집안이 어떻게 되겠어? 잘린 게 아니라 내발로 나온 거라고 변명을 한들 알아 듣겠어? 무슨 말인들 이해를 하려고 하겠어? 메치나 둘러치나 마찬가지지만. “



한세상이 가장 힘들게 여기는 건, 긴 말을 짧게 하는 거다.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건 더욱 어렵다. 그래서 상세히, 앞뒤 정황을 설명하면서 자세하게 말하려고 했다. 제일 힘든 건 솔직하게 말하는 거다. 거짓말은 쉽다. 아주 쉽다. 얼마든지 꾸밀 수 있고, 얼마든지 돌려서 말할 수 있다. 거짓말을 진실처럼 말하는 건 얼마나 쉬운가?


진실을 더욱 진실하게 말하는 거, 진실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도록 진심으로 말하는 건, 한세상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직장생활 25년동안 배운 게 그런 거다. 직원들에게 잔소리 하는 거, 되지도 않는 임원들의 말을 그럴 듯하게 꾸며서 직원들에게 전달하는 거, 거짓을 진실처럼 꾸미고 다듬어서 고객들에게 전달하는 것 등을 직장에서 배웠다. 그걸 스마트한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나 뭐라나.


그런데 지금, 가족들 모아놓고 그래야 하는 거다. 거짓말을 더하고 싶어 안달이 나지만, 참아야 하는 애비의 마음, 그들이 알까? 조금이라도 진실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어려서부터 거짓말 하는 법을 배웠지만, 거짓말을 진실처럼 말하는 법은 배웠지만, 진실을 사실처럼, 사실을 진심으로 말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


그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거짓이 진실처럼 왜곡되지 않도록, 진실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도록 말하는 법은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사랑하는 가족들 앞에서 진실을 진심으로 말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한세상은 망설임도 없이 포기했다. 그렇게 하기 싫은데. 그런 일이 정말 힘든데, 지금 그래야 하는 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 그럼,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가족들은 한세상이 회사를 그만 둔 것에 대해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아내도 애들도. 말을 꺼내지도 않았으니 궁금하지도 않았을 거다.



한세상은 아침. 이렇게 찬란한 아침이 싫었다. 아침이 싫다니? 날마다 새로운 날인데, 그게 싫다니? 활기찬 하루가 누군가는 비극으로, 누군가는 희극으로 시작된다는 걸 이제 알았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은 유난히 컸다. 밝았다.


아침에 뜨는 태양은 자신을 위해 뜨는 거라고 믿었는데, 지금의 저 태양은 한세상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이제부터는 태양이 있는 거나 없는 거나 다를 게 없고, 달이 뜨거나 별이 빛나거나 달라지는 게 없으리라. 그냥 낮에는 해가 뜨는 것이고, 밤에는 달과 별이 함께 뜨는 것이려니, 실업자에게 낮이면 어떻고 밤이면 무엇이 달라질까?


한세상은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매고, 아주 바쁜 사람처럼, 더 일찍 출근해야 하는 것처럼, 문을 쾅 닫고 3층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일단 삼거리까지는 부지런히 걸었다. 아무거나 타기로 했다. 가급적 멀리 가는 버스로 타야겠지. 마음은 빈 손이지만, 카드도 되고, 지폐도 몇 장 있으니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르겠다.


“오늘 하루는 푹 쉬어야지. 아니, 얼마 동안 쉴지 모르지만, 오늘은 진짜로 쉬어야지. 마음 놓고 푹 쉬어야지. 그래야지. 그럴 자격은 충분히 되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이 정도는 쉬어도 될 걸.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아니, 부모님도 가족들도, 아내도 아들도 딸도, 다들 알 거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 왔는지. 그런데 겨우 이 정도냐고 묻겠지? 이 정도가 어때서? 이건 쉬운 줄 아니? 여기까지 오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바보들.”


“종점 다 왔습니다. 저기 뒤에 손님 내리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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