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녹색광선
그해 여름, 소격동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에릭 로메르 감독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녹색 광선’이라는 영화를 보러 그곳에 갔다.
매표소 앞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들은 여기에 모여 담배도 태우고, 자판기에서 캔 음료나 커피도 뽑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관에 가면 자주 보는 얼굴들이 있었다. 우리는 작은 영화관들의 앞마당이나 화장실, 매표소에서 마주치곤 했다. 전국의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마주치면 간혹 운명인가 싶기도 했다. 서로의 이름이나 나이는 몰라도 저 사람이 어느 감독을 좋아하는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종종 위로를 받았다.
“너 혹시 마지막 장면에서 녹색 광선 봤어? 이 영화 본 사람 중에 정말로 녹색 광선을 본 사람이 있대. 그런데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건 원래 없다는 이야기도 있어.”
영화관 앞마당에서 녹색 광선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하마터면 대화에 낄 뻔했다. 정말로 녹색 광선을 본 관객들이 있다니! 나는 녹색광선이 몹시 보고 싶었다.
영화 속 노신사의 설명에 의하면, 녹색 광선이란, 태양이 수평선 위로 질 때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는 빛을 말하는데,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초록빛을 띤다. 하지만 그것이 나타나려면 조건이 매우 까다로울뿐더러 아주 잠깐이라 관측하기도 어렵다. 쥘 베른의 동명 소설에 따르면, 이것을 본 사람은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주인공 델핀, 망친 여름휴가로 시무룩한 그녀는, 해변에서 녹색 광선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는다.
그 후로 몇 년 뒤의 봄,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대학로에 위치한 영화관, 하이퍼텍나다에서였다. 하이퍼텍나다는 영화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을 다정하게 맞아주는 영화관이었다. 상영관 오른쪽 전면이 유리로 되었는데, 두꺼운 커튼이 쳐져있었다. 영화가 끝나면 그 커튼이 서서히 걷히며 작은 정원이 드러난다. 그렇게 현실이 넌지시 드러난다.
영화를 다시 보며 놓쳤던 사실을 알았다. 녹색 광선을 보면 타인의 진심뿐만이 아니라 나의 진심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라는 부분을 빼고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 정신이 팔렸는지 이번에도 마지막 장면의 녹색 광선을 보지 못했다.
영화 내내 델핀은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지만 잘 찾아지지 않는다. 그것은 멋진 여름휴가이기도 하고, 괜찮은 남자이기도 하고, 낭만 혹은 소통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델핀은 마침내, 마음에 드는 남자와 함께 바닷가에 앉아서 녹색광선을 본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그것을 본 델핀이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영화는 해가 지는 바다를 보여주고, 녹색광선을 목격하고서 "Oui!"라고 외치는 델핀을 보여주며 뚝, 끝이 난다.
며칠 뒤, 한 번의 상영이 더 남아있었다. 무리해서 시간을 맞춰 다시 영화관으로 갔다.
나는 상영관 안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의 찰나가 무척이나 좋다. 이제 곧, 영화가 시작된다. 현실에서는 희미한 것을, 여기서는 또렷이 볼 수 있지 않을까 믿어보는 시간이다. 꿈을 목격하는 시간이, 이 장소에서 보장된다. 영화관으로 가는 것은 내게, 찾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현실과 연결되고 싶다는 하나의 노력이기도 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눈을 부릅뜨고 스크린을 바라보았지만, 녹색 광선은 보지 못했다. 원래 없는 건가 보다 했다.
또다시 여름이었다. 이번에는 낙원상가로 이사한 아트시네마에서 ‘녹색 광선’을 상영했다. 나는 그것이 정말 영화 속에 있는 장면이든 아니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못 보면, 그런대로 그럴 일이었다. 영화를 보러 영화관으로 갔다.
그러니까,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일초였을까, 일점오초였을까. 그 빛나는 초록색은, 에메랄드 색에 더 가까웠는데 반짝 나타났다가 조금 부풀더니 얇은 선이 된 후 사라졌다.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초록색과 달랐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도 영화 속 델핀처럼 반가워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옆에 사람 팔이라도 잡고 싶었다. 그 순간 나는 현실에 있으면서 영화 속에 있었다.
“Oui!"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녹색 광선’을 본 영화관들은 사라졌다. 영화 티켓은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발급되었고, 극장을 그저 스쳐간 영화들은 각자의 모니터 속에 혹은 OTT 계정에 목록으로 저장되었다. 영화관 마당에서, 운명처럼 영화제에서 마주치던 얼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영화가 끝난 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던 웅성거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도 이제는 영화 ‘녹색 광선’을 컴퓨터에 하나 저장하고 있다. 나는 영화파일을 만지작거린다. 이 파일을 플레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나의 모니터로 녹색 광선을 보았다.
그것은 영화관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