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고 친절하기를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이렇게 슬픈 영화가 있나!
이 영화를 보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이렇게 슬플
수가. 나는 그냥 괴짜 커플의 소소한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집에 오는 것은 끔찍하다.
개가 얼굴을 핥든 말든
아내가 있든 아내 형상의 외로움이 있든
집에 오는 것은 끔찍하게 외롭다'
Eva H.D. 의 시 'Bonedog'의 한 부분이다.
영화의 초반, 남자 친구 제이크의 차를 타고 그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루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자기가 쓴 시라며 'Bonedog'을 낭독한다. 루시는 아무래도 제이크와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루시는 제이크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고 있다. 자신에게도 되묻는다. 이거 잘하는 일인가?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는 건 제이크한테 좋은 신호를 주는 거 아닐까? 나
는 왜 가고 있지?
그녀의 이름은 루시로 시작한다. 영화가 계속될수록 그녀의 이름은 조금씩 바뀌고, 옷차림도 헤어스타일도 말투도 심지어 얼굴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다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돌아오곤 한다.) 제이크는 루시에게 뜬금없이 워즈워스를 좋아하냐고 묻는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루시라는 여성에 대한 시를 여러 편 썼다. 워즈워스의 시에서 루시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여인의 이름이다. 하지만 젊어서 죽는다고 제이크는 말한다.
로맨틱 코미디인가 싶다가 스릴러인가... 호러인가 아니면 뮤지컬? 싶은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외로움을 깊이 들여다보는 신비로운 체험을 선물한다. 외로움은 누구나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을 예정인 감정이다. 하지만 외로움만큼 수치심을 동반하고 개인의 탓으로 여겨지며 사회적인 배제에 이르기까지 하는 감정이 또 있을까?
나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보면서 감탄을 하고 말았다. 복잡한 플롯 혹은 이미지를 퍼즐처럼 끼워 맞추는 희열보다, 그 기묘한 외로움의 풍경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부끄럽고 너무 무섭고 이상한 외로움을 자세히 바라봐주어서 고맙기까지 했다.
루시는 왜 이상적인 여인인가.
영화의 초반, 루시는 얼핏 못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는 남자 친구랑 굳이 부모님을 만나러 가며, 가는 길에 또 굳이 제이크에게 말꼬리를 잡으며 싫은 티를 내는가. 너무 툴툴 거리는 건 아닌가. 제이크는 저렇게 기분을 맞추어주려고 노력하는데.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고 아니고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는 루시가 제이크를 가만히 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상하다. 이미 그들은 6주 정도의 시간을 연인으로 지냈다.
루시는 그의 입 가장자리에 묻은 하얀 얼룩을 가만히 바라보고, 그것을 느낀 제이크는 자연스러운 척(매우 부자연스럽다) 얼룩을 손으로 쓸다가 입을 가린 채 말한다.
루시는 그의 말을 듣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질문하고, 자신의 생각도 말한다. 그와 끊임없이 대화한다.
한참이 지나서 그들은 제이크의 집에 도착한다.
그 집은 '본 도그 Bonedog'에 등장하는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젖고 냄새나는 개가 있고, 늙은 부모님이 있으며 하나뿐인 슬리퍼가 있다. 루시는 그 집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제이크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볼 수록 우리는 중간중간 등장하는 어느 노인이 제이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제이크의 부모님이 사는 집은 바로 제이크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다. 루시는 사실, 그의 과거 여자 친구도 아니었고, 바에서 제이크가 뚫어져라 쳐다봤던 스쳐가던 여자였을 뿐이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청소일을 하고 있으며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놀리거나 (쳐다보면) 피하는 존재다. 혼자 밥을 먹고, 이명에 시달리고 단 것을 좋아한다. 뮤지컬을 좋아하고, 워즈워스의 시를 좋아하고, 아마 누군가와 연인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늙은 어머니 아버지를 돌보며 그들이 어떻게 늙어가는지를 지켜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다퉜고, 그리고 그의 이름이 뭐더라.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때로는 생각이 행동보다 진실과 현실에 가까워. 말과 행동은 속여도 생각은 그를 수 없거든."
제이크가 루시에게 하는 말이다.
이렇게 슬플 수가. 루시는 그 노인이 생각 속으로 불러온 낯선 여자다. 제이크를 찾으러 학교(노인이 일하는 학교)까지 들어온 루시는 결국 노인을 만나고 그와 대화를 하기에 이른다.
제 남자 친구 보셨냐는 말에 노인은 남자 친구가 어떻게 생겼냐고 묻는다.
루시는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사실 그는 40년 전 날 물었던 모기가 어떻게 생겼냐고 묻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나는 그 사람이 좀 걱정돼요."
라고 말한다.
루시는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는 노인에게 다가가서 두 팔로 꼭 안아준다.
그 장면에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울기 시작했다. 노인도 울고 루시도 울고 나도 울었다.
루시는 친절하다. 루시가 여기서 이상적인 여인인 것은, 그 다정함이다. 그가 있어달라고 부탁하면 있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무엇보다... 함께 집으로 가준다. 그 외로운 집으로.
물론 위태위태한 부분도 있다. 나는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 및 감독에 참여한 작품들에서 여성에 대한 시각에 종종 아슬아슬함을 느끼곤 했는데 이번에는 어느 정도 불편함의 수위가 조절된 것 같다. 'Baby it's cold outside.'를 강간을 미화한 노래라고 말하는 루시. 노인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인물일지언정 주체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강력히 피력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렇다.
시를 찾을 때가 있다. 한글도 외국어도 아닌, 글자도 음성도 아닌 제3의 언어가 필요할 때, 내 안에 감정과 말들은 엉켜있는데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를 때. 그 말이 지쳐서 나오지 않을 때, 시를 읽으며 간절히 바란다. 누군가 내 마음을 좀 알아주었으면 하고. 그러니까, 이 언어에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건져 올릴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수많은 나의 마음들을 건져 올렸다. 그동안 그저 서걱서걱 바닥에 누워있는 마음의 파편들을. 그 파편이 나도 모르는 새에 발바닥에 박혀 피가 흘렀다. 아주 작은 파편이어서 가시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 피도 잠깐이어서 그냥 쓱 닦고 말았다.
이렇게 외로움을 오래 다정히 들여다본 영화가 있었던가.
영화의 마지막, 그는 늘 청소하며 힐끗거리던 무대 위에 오른다. 마치 배우처럼 억지스러운 분장을 하고서.
그는 어떤 상을 수상했고 수상소감을 말하는 중이다.
"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렇게 영화는 끝을 향해 나아가고, 한 남자는 그가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기립박수를 받는다.
그것이 그의 머릿속의 마지막 풍경이기를. 얼마나 뒤죽박죽 기억과 사실이 엉켜있는 줄 몰라도 친절한 돼지와 잠깐 반했던 여성과 좋아하는 뮤지컬과 긴긴 시가 그를 기만했던 희망의 폭력을 치유해주기를.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 마지막 페이지에 이런 말이 있다.
고독이 반드시 누구를 만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가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개인으로서의 우리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스티그마와 배제라는 더 큰 힘이 낳은 결과임을, 그래서 저항할 수 있고 저항해야 하는 대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기묘한 영화를 보고 한동안 멍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 글도 몇 번을 썼다 지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두서가 없더라도 꼭 글을 마무리짓고 싶었고. 이 먹먹하고 놀라웠던 감상을 적고 싶었다. 내게도 그랬듯이 이 영화가 누군가에게 큰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나라도 그 노인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보았다. 영화를 한 번 더 다시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볼수록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표정 아래 숨겨진 그에 대해서.
다정하고 친절하기를. 내년의 나에게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