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한 자서전
어머니가 60대 쯤 되었을 때, 이런 말을 하신 것이 기억난다.
“내 인생 자서전을 쓴다면 10권 책도 모자를 거다”
50대가 된 나는 문득 어머니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졌다.
어머니를 위해 자서전을 써 드리는 것이다. 지금 몸이 않좋으셔서 요양병원에 계시지만 도전해 보려고 한다.
10개 주제로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보려 한다!
위대하고 중요한 도전이 될 것이다!
1. 막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교훈
이것은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내 생각에 의지해 적어보는 것이다. 어머니가 신앙이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막내인 내가 매우 아팠다고 한다. 내가 숨을 못쉴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던 것이다. 70년대라 의술이 열악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어떤 질병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기절한 상태였고, 숨도 잘 쉬지 못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안고 내 코를 입으로 빨기 까지 하면서 숨을 쉴 수 있도록 하셨다고 한다. 처절한 노력 끝에 나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나는 아버지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 일을 생각하시며 한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주일날 교회를 가지 않고 친척집에 다녀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것이 하나님이 어머니에게 주신 교훈이었다고 여겼나보다. 그래서 다음날 교회에 갔을 때, 목사님께 이 이야기를 했더니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아시면 됐습니다."라고 짤막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답해 주셨다고 한다. 정말 주일에 출석하지 않아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나님이 그만큼 어머니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머니가 뜨겁게 신앙이 성장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흐트러짐 없는 마음가짐을 갖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감리교회였던 충주시 안림동에 위치한 안림교회는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었다. 당연히 바닥은 길쭉한 나무들을 붙여놓은 난방이 안되는 바닥이었다. 그래서 겨울이면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늘 실내화를 신고 다녔다. 새벽기도 때는 늘 추위와 싸워야 했다. 예배당 중앙에 난로를 설치해 놓았는데, 연료는 톱밥이었다. 나중에는 석유가 들어가는 온풍기를 설치했는데, 석유가 떨어질 때면, 사택 마당으로 가서 드럼통 안에 있는 석유를 작은 통에 담아 날라야 했다. 그 일은 항상 나와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 맡아서 했다. 어머니가 그 추운 날씨에도 눈이 오든 비가 오든 1Km 되는 거리를 오가며 그 추운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새벽기도를 하셨다는 점이 놀랍고,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2. 어머니는 내 편
어머니는 항상 막내인 내 편을 들어주셨다. 특별히 내가 태어난 이 후 신앙을 갖게 되셔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를 참 아끼셨다. 3남2녀 중 막내인 나는 항상 어머니 품 속에서 자란 것 같다. 아버지나 형제들이 나를 나무랄 때 항상 나를 보호해 주시고 내편이 되어 주셨다.
하루는 내가 설탕 묻힌 꽈배기를 먹고 싶다고 해달라고 때를 쓴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마지 못해 허락을 하시고, 곤로 위에 콩기름이 가득 담긴 오목한 후라이펜을 올려놓고 꽈배기를 튀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사 기름 온도가 넘 뜨거웠던지 기름이 마구 튀어서 어머니가 화상을 입으셨다. 얼굴과 팔 여기 저기 기름이 튀어 나중에는 그 부위가 점처럼 검붉어졌다.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했던지, 그 이후 더 이상 꽈배기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맛이 씁쓸한 꽈배기였다.
큰 형님은 나와 9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기억은 없다. 늘 나와 떨어져 지냈던 기억이 난다. 가끔 대학생 때 방학이 되면 집에 와서 나와 놀아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방학기간이라 집에는 어머니, 나, 큰형 이렇게 셋이 있었다. 내가 장난을 치고 싶어 먼저 형을 간지럽히며 놀고 있었는데, 그 때 어머니는 바쁘게 집안 청소를 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형이 나에게 심한 장난을 치니까 화가 나셨는지 갑자기 빗자루를 들고 '왜 동생을 괴롭히냐'고 하시며, 형 등짝을 세게 내리치셨다. 그것도 여러대를. 형은 얼굴이 빨개져서 방에 들어가 버렸고, 나는 너무 미안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장난이었는데, 어머니는 큰 형이 나를 괴롭히는 줄 아시고 그런것이었다. 그 만큼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아껴주셨다. 그리고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는 날이면 항상 나를 데리고 가셨다. 부흥회 전이나 후에 강사님이 사택에 계시면 항상 나를 데리고 가셔서 안수기도를 받게 하셨다.
또한 추운 겨울날이면 어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며, 차가운 고사리 손을 이불 속에 넣어 데워주셨다. 그 때 그 온기가 아직도 전해 지는 듯하다.
군 입대를 위해 기차를 타고 연천으로 가는 길에 부모님도 동행하셨는데, 서울 한 지하철 속에서 어머니는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한 참을 우셨다. 그도 그럴것이 큰 형은 연구원으로 군면제가 되었고, 작은 형은 가까운 곳으로 출퇴근하는 보충역(방위)였으니, 정말 멀리 떠나 전방으로 가는 아들은 막내인 내가 처음이었으니까.
어머니가 나를 좀 편애했기에 어머니는 항상 내 차지였기에, 나는 내가 가장 어머니와 친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깨지는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시고 큰형님네 가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어머니를 내가 모시고 갔다. 함께 강변을 걸으며 힘들어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본 큰형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애타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때 내 감정은 이상 야릇했다. 내가 어머니와 가장 가깝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만큼은 나와 어머니는 멀어져 보이고 큰 형님과 어머니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 내가 오해 하고 있었다. 큰 형님과 어머니가 훨씬 더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 때부터 어머니가 큰형 어머니로 보이기 시작했다. 막내는 막내인 것 같다.
3. 어머니 찾아 삼만리
문경에서 충주로 이사 온 뒤 우리 가정은 재정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시계 외판원으로 어머니는 몸이 치유되면서 과수원 일을 도와주거나 농한기에는 이불이나 가전제품을 시장에서 싼 값에 떼다가 팔았다. 이웃 마을을 돌아다니며 판매를 할 때 어머니는 끼니를 거르는 일도 많았다. 대부분 나를 형,누나들에게 맡기고 어머니는 일찍 집을 나섰다. 나는 엄마가 안 보이면 매우 슬펐다. 그 나이에는 누구나 엄마가 전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머니가 안 보이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엄마를 찾으러 무작정 집을 나선 것 같다. 우리집에서 100m 거리에 신작로가 있었는데, 거기는 산 너머 광산으로 향하는 트럭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엄마를 찾아 헤메다 신작로에서 그만 울다 잠이 들었나보다. 그 위험한 순간에 마을 할머니가 도로 위에 엎드려 있는 나를 발견하고 얼른 우리 집에 데려다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뒤 늦게 돌아온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며, 아이가 죽을뻔 했으니 조심하라고 타이르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어머니도 그 순간 아마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 그 때는 우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난 어머니 사랑을 많이 받은 동시에 늘 어머니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4. 힘들었던 순간들
우리가정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던 중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였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갈색 007 가방에 손목시계를 가득 넣고, 자전거 뒷자석에 싣고 다니셨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께서 카메라를 사가지고 오셨는데, 그 007가방은 들고 오지 않으셨다. 갈색을 띤 007 가방은 늘 아버지 자전거 뒤에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 분신과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가 어리둥절 해서 물어보니, 아버지가 자전거를 세워 놓고 한 상점에 들렀는데, 그만 어떤 놈이 그 잠깐 사이에 가지고 달아난 것이다. 아버지는 당황해서 여기 저기 찾다가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그냥 오셨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보았지만 결국 영영 찾을 수 없었다.
신기한 것은 어머니가 그 전날 꿈을 꾸셨는데, 그 꿈 내용이 제비가 우리 집에 날아왔는데,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타나 그 제비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잡으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제비를 잡지 못했고, 제비는 금새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나중에 이 꿈을 알아보니 제비는 재산을 의미하는데, 제비가 날아갔다는 것은 재산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아마 007 가방에 있는 손목시계를 금액으로 환산한다면 그 당시에도 천 만원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빚을 갚느라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했다. 어머니는 고등학생들 하숙을 하셨고, 아버지는 강원도와 충청도를 오가며 더 열심히 시계를 팔아야 했다.
그당시 나는 부모님 만큼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어린 나로서도 부모님이 많이 힘들어 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는지 다 알 수 없지만, 연단을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왜 쓸모없는 카메라를 샀냐고 하며 아버지에게 핀잔을 주셨다. 아버지는 이 후 카메라를 다시 상점에 돌려주셨다.
5. 마음을 헤아려 주신 어머니
어머니는 5남매 자녀들 마음을 잘 헤아려 주셨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독자로 태어났고,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 살림을 10대에 이끌어 가셨기에 자녀들에게 자상하시진 못하셨다. 가끔 쉬실 때 장난도 쳐주시기도 했지만, 술을 드시고 오시거나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아주 엄하게 훈육하셨다. 하루는 큰 누나가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아주 늦게 들어온 적이 있었다. 누나가 들어오자 마자 아버지는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닌다고 회초리를 드셨다. 큰 누나는 눈물을 뚝뚝흘리며 용서를 구했고, 아버지가 주무실 때까지 머리 맡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렇게 혼나는 형들과 누나들을 본 나는 어려서 아버지께 말을 잘 하지 못했다. 그냥 기에 눌려서 말하기도 두려워했다.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간과하는 자녀들 일에 관심을 가져주셨다. 그래서 대부분 우리 5남매는 어머니께 필요한 것을 구할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왜 나에게 이야기 하지 않고 엄마한테만 이야기 하느냐'고 불평을 하셨지만,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큰 형이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용기를 내서 아버지께 여자친구 사진을 보여드렸었다. 백화점에 근무하던 누님이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예쁘게 생겼고 그리 흠이 없어 보였지만, 아버지께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 같다. 몇 번 형님은 그 여자친구에게 받은 선물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어린 나로서는 참 신기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얼굴이 복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만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말에 상처받은 형님은 하루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이불을 덮어쓰고 반나절을 끙끙앓고 있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아버지가 출근한 사이에 살살 달래서 한 번 만나고 오라 하셨다. 그 말에 마음이 풀린 형은 바로 서울에 가서 그녀를 만나고 왔다. 아마도 마지막 작별을 고한 것 같다. 참 안타까운 인연이었지만, 그 뒤 지금 형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천사같은 분을 만나게 하셨으니 말이다. 형수님은 늘 우리에게 푸근하게 대하셨다. 그래서 대학강의가 끝나고 방학 때면 의례 서울로 올라가 며칠 씩 신세를 지고 왔다. 촌놈들이 아파트에서도 자보고 고급스런 음식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시험끝나고 고향집에 내려가기 보다는 큰형네를 먼저 들렀다.
어머니는 엄하신 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사정을 잘 헤아려 주셨고 사랑으로 대해 주셨다. 이것이 우리를 견디게 해 준 힘이 되었다.
6. 산불과 뜻밖에 사고
어느날 저녁 마을 신작로 앞 남산에 큰 불이 났다. 집에 있던 작은형은 마을 형들과 함께 불을 끄러 갔다. 밤 늦게야 돌아온 형은 손에 붕대를 감고 왔다. 놀란 어머니가 물어보니 그냥 불을 끄다가 다쳤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가족은 그런 줄로만 알았다. 다음날 길 건너 앞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우유를 어머니에게 건네며 하는 말이
"ㅇㅇ엄마 미안해요~. 우리 아들 때문에 ..."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해 하며 묻는 어머니에게 아주머닌,
"정말 모르세요? 아들이 이야기 안했어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랬다. 그 형이 불을 끄려고 나무가지를 낫으로 자르려다가 그만 나무를 잡고 있던 우리 형 손을 찍고 말았다는 것이다. 날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낫에 찍혀 아파했을 형을 생각하면 그 고통이 느껴지는 듯하다.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작은형은 마음이 약해서 앞집 동생이 그랬다는 것을 차마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형은 손가락 신경을 잇는 수술을 몇 번 더 받아야 했고, 나중에 수술 부위 살이 부풀어오르는 바람에 더 시술을 받아야 했다. 지금도 가운데 세 손가락 부위에 그 상처 자국이 남아있다. 그 이후 앞집에서 수술비를 좀 부담해 주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사건 이후 앞집과 관계는 나빠졌고, 나중에 사소한 일로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 집 사람들은 동네에서 사납기로 유명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줌마가 말다툼을 하였는데, 화가 난 그 집 형- 작은형 손을 다치게 한 -이 칼을 들고 우리집에 찾아와 부모님을 위협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 잘 진정되고 마무리 되긴 했지만, 우리 가정에 큰 아픔을 남긴 사건이 되었다.
7. 산나물캐기와 식중독
내가 고등학생 때 인 것 같다. 뜨거운 여름 어느날 이었다. 방학 때였는데, 부모님이 산나물을 캐러 같이 가자고 나에게 제안을 했다. 사춘기인 나는 '웬 산나물?' 속으로 생각하며 가기 싫다고 했다. 부모님은 등산 겸, 산책 겸 가시는 것이었지만, 난 그냥 집에 있기 원했고, 정말 웬지 엄청 가기 싫어서 고집을 부리며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포기하시고 아버지와 같이 길을 떠났다. 어느 산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저녁 때 쯤 지나 돌아오신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들어오신 부모님 모두 어지러움과 복통을 호소하셨다. 급기야 구토까지 하셨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부모님은 택시를 타고 병원을 가시기로 하고 같이 길을 나섰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신작로까지 나가봤지만 택시는 오지 않았다. 몇 분 동안 시내쪽으로 내려가다 뒤를 보니 경찰차가 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혜를 발휘해서 경찰에게 병원까지 태워 줄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경찰관들이 자초지종을 듣더니 흔쾌히 병원까지 태워 주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여러가지 검사를 받고 입원하셨다. 검사를 해 보니 식중독이었다. 부모님이 점심을 먹으려고 돼지고기 볶음을 싸가셨는데, 아마 그게 상했던 것 같다. 여러가지 검사를 한 어머니는 별 이상이 없는 것이 확인되었으나, 아버지가 심장 쪽이 안 좋은 것 같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마 식중독으로 인해 놀라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서울에 있는 형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내일 아침 일찍 내려온다고 했다. 나는 두 분을 간호하며, 밤을 지샜다. 그동안 부모님은 항상 나를 돌봐주시는 존재였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부모님이 병드셨을 때는 내가 돌봐드려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다음날 일찍 형님이 내려왔고, 수고했다고 격려해주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좀 더 병원에 계시다가 퇴원을 하셨다. 그 때 나도 함께 나물캐러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책임져 줄 사람이 없었겠지? 내가 그렇게 가기 싫은 마음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을 진행할 때 정말 하기 싫어 하는 사람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니 말이다.
8. 눈물이 담긴 기도
어머니께서 예배시간에 눈물을 흘리신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어머니가 대표기도를 맡은 날이었다. 담임목사님이 어머니께 대표기도를 요청하고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하셨다.(그 때는 앞에 나가서 하지 않고 자리에서 그냥 일어나 대표기도를 했다.) 앞부분은 여느 때처럼 잘 하시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면서 기도를 하셨다.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었던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기도를 멈추기도하시면서 눈물의 기도는 계속 되었다. 옆에 앉은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때는 어머니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가 간다. 그렇게 눈물어린 기도는 아멘 소리와 함께 마무리 되었다. 온 교회가 다 숙연해 지는 듯 했다. 하나님은 그 눈물의 기도를 받으셨을 것이다. 그런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우리 5남매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을 다시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 날은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고 계셨을 때였다. 큰형님이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을 위해 시험을 준비하던 때였다. 지금은 대전에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최고 석학들이 다니는 K대학원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서울에만 있었다. 형님은 지방대를 나왔지만 성적이 좋아 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첫 해 떨어지고 말았다. 집에 내려와 공부하기도 하고 부모님도 여러모로 애써 보았지만 둘째 해에도 떨어졌다. 어머니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어렸을 때였지만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큰형은 우리 앞날의 기둥 같은 존재였으니까...
다음해 어머니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의 합격 소식을 전화기를 통해 들으실 수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전화기를 붙잡고 흐느껴 우셨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한 번도 시험에 떨어진 일이 없던 형에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되는 실패 경험은 나중에 큰 약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형은 나중에 연구원이 되어 우리 가정에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 덕분이리라.
지금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시지만 거기서도 계속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 것이다.
9.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머니가 입원하셨을 때는 몇 년 전이었다. 그 몇 개월 전부터 아버지는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하셨다. 처음에 우리 5남매는 잘 이해할 수 없었고, 그저 아버지의 한탄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작은형 집에 가셨을 때, 여러 이해할 수 없는 증세들이 나타나 결국 요양병원으로 오시게 되었다.
아내가 요양병원 간호사로 있었기에 그 요양병원으로 입원하시게 되셨다. 작은형님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너무나 슬프게 보였다. 어머니는 다행히 요양병원에 잘 적응하셨다. 몇 개월 만에 잘 회복되셔서 퇴원해도 되겠다고 원장님이 말씀하시고, 우리가 생각할 때도 그런 것 같아 퇴원을 하시기로 하셨다.
어머니가 아버지께로 가고 싶다고 하셔서 아버지 댁에 모셔다 드렸다. 그러나 몇 주 지나지 않아 다시 입원하셔야 했다. 상태는 지난 번 보다 훨씬 안 좋은 상태로 오시게 되셨다. 아버지가 잘 돌봐주시리라 믿었으나 우리의 오산이었다. 아버지도 연세가 많으시기에 아프신 어머니를 돌봐줄 여력이 없으셨던 것 같다.
형들은 퇴원하지 말고 더 병원에 계셔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후회한들 어찌하랴 이미 지나간 일인 것을. 어머니는 입원하셨어도, 면회를 가면 항상 우리들 걱정을 하며 얼른 가라고 재촉하신다. 늘 우리 5남매와 이웃을 위해 사신 어머니이시다. 주님께서 생명싸개로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아버지는 가끔 면회를 오시면 안타까워하신다. 떠날 때면 항상 눈물을 흘리신다.
무엇보다 어머니께서 어디 계시든지 천국가는 그 날까지 평안하셨으면 한다. 막내인 나를 위해 이 곳 대전에 계신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막내가 더 가까이 오래 어머니를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어머니를 위한 자서전 마지막 회
어머니께 바치는 노래
이제 '어머니를 위한 자서전'을 마치려한다. 10가지 주제를 가지고 지나 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써 왔는데 이제 마무리를 하려한다. 처음 시작 할 때는 많은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쓰다보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더 좋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쓰지 못한 게 아쉽다.
그래도 아직 어머니가 살아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른다.
50이 넘어 이제야 깨닫습니다.
어머니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50이 넘어 이제야 깨닫습니다.
어머니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50이 넘어 이제야 깨닫습니다.
어머니 인생이 너무나 아름다웠음을
50이 넘어 이제야 깨닫습니다.
어머니 유산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50이 넘어서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왜 이 귀한 어머니를 저에게 허락하셨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