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옆에 놓인 2L 생수병을 들었을 때, 출렁이는 소리도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물을 가지러 거실로 나갔다. 아침이 오면 '춥다'라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지겨워졌는지 코끝이 살짝 시린 느낌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하루 종일 말하는 것이 익숙했던 시절에도 늘 퇴근할 때쯤이면 연구개 어딘가가 부어있는 느낌으로 그날의 바쁨을 다시 되짚어보곤 했다. 어제는 약 10시간을 말하며 떠들어댄 기억 덕분에 쉽게 수긍하며 계속해서 목을 축였다. 이젠 말로 하는 직업도 아니고, 내가 그 적막을 채워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신이 났다. 사람이 좋아서 한 번 나갈 때면 서커스 유랑단 마냥 한 바퀴 돌고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고, 한 달에 하루 이틀쯤은 시간과 즐거움을 맞바꾸는 것이 그리 아깝지 않았다.
목을 축이고 나서야 시계가 보였다. 새벽 3시 42분. 핸드폰을 손에 쥐고서 잠들었지만, 매트리스와 벽 사이로 빠져있어 낑낑거렸던 시간을 포함하면 41분쯤이 아니었을까. 낯선 시간이지만 오랜만인 시간이기도 해서짧은 조우를 나누고 다시 누우려 하자 귀신같이 할 일이 생각났다. '일어난 김에 일찍 해놔야지' 싶은 마음에 노트북 전원을 누르고 익숙한 바탕화면과 인사를 나눈 뒤 커피를 가져왔다.
기사를 통해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어제저녁에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글'에 대한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을 전하려 애쓰던 내 모습도. 내가 느낀 것과 꼭 알았으면 하는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잠시 생각에 깊이 빠졌다. 낮에 보았던 전시를 포함해 저녁에 나누었던 대화를 찬찬히 곱씹었다.
작품이라 말하기엔 엉성하고, 상품이라 말하기엔 왠지 그조차 허락되지 않은 것만 같은 마음.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이따금 두렵다가도, 잘 못 하고 있음을 직면하는 것이 더 두려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이 무거운 걸 보니 목만 마른 것이 아니었나 보다. 퉁퉁 부은 눈을 거울에 비춰보고 한숨 푹 내쉰다.
눈이 시리고 목이 말라서
그래서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간절해요"라는 말로 간절함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보다 더 솔직한 표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이야기하거나 멋진 표현을 빌려 전해야만 닿을 수 있는 것이 간절함이었던가. 욕심임을 알면서도 바닥에 쉽게 둘 수가 없다. 간절한 만큼 내게 너무 소중해서, 그래서 놓을 수가 없다. 나는 내가 더 잘되었으면 좋겠고, 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고, 더 목말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가끔은 눈이 시려서 축축한 물기가 차오른대도 좋다. 괴로우면서 행복하다. 애틋한 이 짝사랑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읽는 이와 눈 맞춤을 기대한다.
이제는 쓰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마치 사랑하는 이와 행복한 추억을 두고두고 꺼내보는 것처럼, 커지는 마음처럼, 마지막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면서도 마지막까지 함께이고 싶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