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캡을 쓴 날

by 헬렌켈러

아파트 목욕탕은
몸을 풀러 가는 곳인데
가끔은 사람을 더 긴장시키는 곳이 된다.

나는 건식사우나에서 땀을 빼고 있었다.
안쪽은 조용했고
나는 그냥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옆의 아주머니가
“시끄럽네.”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이 먼저 들렸고
그제야 나는 밖의 소음을 인지했다.

할머니 한 분이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전까지 나는
불편하지 않았다.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상했다.
소리는 그대로였는데
“시끄럽다”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 소음은 내 귀를 점령했다.

인지가
감각을 바꿨다.
사우나를 나와 몸을 닦고 있는데
그 소란의 주인공이
헤어캡을 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 건 안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나는 설명했다.
머리카락이 욕탕에 빠질까 봐 쓴 것이라고.
그러자 할머니는 말했다.
“오해받을 짓은 안 하는 게 낫지.”
나는
“네.” 하고 자리를 피했다.

저분 자식들은 피곤하겠다.
그 생각이 먼저 스쳤다.

그리고 바로
나도 누군가에겐 저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따라왔다.

자신의 큰 목소리는 자연스럽고
남의 헤어캡은 문제라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문장이 계속 맴돌았다.
“오해받을 짓은 하지 마.”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방어해야 하지.

다음 날
프런트에서
그 할머니가 내 얘기를 하고 갔다고 전해 들었다.
나는 잠시 멈췄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직원은 말했다.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헤어캡을 벗었다.
패배감은 없었다.

그 사람을 설득하고 싶지도,
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70년 넘게 굳어진 방식을
내가 하루 만에 고칠 이유는 없다.

어쩌면
그 단단함은
그분이 평생을 버텨온 방식일지 모른다.

그건
내 몫이 아니었다.
나는 통제를 싫어한다고 말해왔지만
이미 그를
‘피곤한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이길 필요 없는 싸움이 있다는 걸.

머물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걸.
헤어캡을 벗은 건
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 싸움이
내 싸움이 아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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