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은 반복이 아니라 방향이다
습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정확히는, 우리가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 무엇인지에 대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 보면 습관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좋은 습관을 들여라. 독서 습관, 공부 습관, 생활 습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들은 대부분 반복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쓰인다. 매일 같은 시간에, 꾸준히, 꼭 하도록.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무언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반복은 습관의 형식이지, 습관의 본질이 아닐 수 있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이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살았지만 습관이라는 주제 앞에서 놀랍도록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반복이 아닌 다른 곳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철학자다. 그가 쓴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들에게 전하는 윤리학 강의로, 오늘날에도 서양 도덕 철학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이 책에서 그가 가장 집요하게 묻는 것은 하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의 조건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불렀다. 흔히 행복으로 번역되지만, 그것은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다. 영혼이 덕(탁월성)에 따라 활동하는 상태다. 그렇다면 덕은 어디서 오는가.
그는 명확하게 답한다. 덕은 타고나지 않는다. 가르친다고 저절로 생기지도 않는다. 덕은 오직 습관으로 형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어에서 성격을 뜻하는 에토스(ethos)와 습관을 뜻하는 에토스(ethos)가 어원이 같다는 것을 주목했다. 성격과 습관은 같은 뿌리에서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다. 우리는 보통 좋은 사람이 좋은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서를 뒤집는다. 좋은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정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정의로운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용기 있는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을 단순히 착한 행동을 많이 하면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핵심은 그다음에 있다.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습관을 들였는지가 결코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모든 차이를 만든다고 그는 말했다.
모든 차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말을 쓸 때 그는 반복의 양이 아니라 방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반복하는가. 무엇을 향해 행동을 쌓아가는가. 그것이 습관의 본질이다.
목적 없는 반복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습관이 아니기에, 반복의 양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돌을 아무리 위로 던져도 위로 떨어지는 습관을 들일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본성과 다른 방향의 행동은 습관이 되지 않는다. 습관은 언제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초등학교 4학년 지호는 분수의 덧셈을 배우는 중이었다. "분모가 다르면 통분해서 분자끼리 더한다." 공식을 외웠다. 수십 문제를 풀었다. 답이 맞았다. 반복이 쌓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물었다. "지호야, 왜 분모를 6으로 해야 할까?" 지호는 멈췄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답은 맞혔지만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반복이다. 그러나 방향이 없는 반복이다. 조금만 복잡한 문제가 나오면 지호의 사고는 멈춘다. 공식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다음 걸음이 없기 때문이다.
방향이 생긴 아이는 다르게 접근한다. 2분의 1과 3분의 1을 더하기 전에 먼저 그려본다. 조각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 단위를 같게 만들어야 합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한다. 문제를 다 풀고 나서는 왜 6이라는 숫자를 선택했는지 자신에게 묻는다(사실 이 과정은 사고력수학의 학습방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
이 습관은 단순한 계산을 넘어 논리적 필연성을 찾아가는 훈련이 된다. 중학교의 문자와 식, 고등학교의 미적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고의 뼈대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습관은 그 방향이 생기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로,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습관 연구 분야의 선구자로, 제2의 천성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철학과 심리학의 언어로 다룬 최초의 인물 중 하나다. 그가 12년에 걸쳐 완성한 『심리학의 원리』(1890)는 당시 심리학 연구의 기준을 새로 세운 책으로, 이후 수십 년간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강의의 필수교재가 되었다.
제임스는 습관을 뇌의 관점에서 바라본 최초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반복된 행동이 뇌의 신경 경로를 물리적으로 변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던 행동이 반복을 통해 자동화되면, 우리는 그 행동에 더 이상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된다. 그 절약된 에너지가 다른 곳으로 향할 수 있다.
의식적인 지능에 의해 촉발된 행동은 비의식적으로 수행된 습관의 힘에 의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일어서고, 걷고, 단추를 끼우고, 피아노를 치는 것조차 마음이 다른 것들에 흡수될 때 할 수 있다. 제임스가 『심리학의 원리』에서 한 말이다.
이것이 제임스가 습관에서 발견한 역설이다. 습관은 우리를 자동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롭게 한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연주자는 손가락 하나하나의 위치를 의식하며 움직인다. 악보를 읽고, 리듬을 세고, 페달을 밟는 것이 동시에 처리되어야 하는 무거운 일이다. 그런데 반복이 쌓이면 손가락은 스스로 움직인다. 더 이상 기초적인 동작에 의식을 쏟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연주자는 비로소 음악의 감정과 해석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습관이 자리를 잡으면 의지는 더 높은 곳을 향할 수 있다. 이것이 제임스가 말한 습관의 역할이다. 사소한 것을 자동화함으로써 중요한 것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구조.
중학교 2학년 민준이는 방정식을 풀 때마다 검산을 했다. 처음에는 귀찮았다. 풀고 나서 다시 대입해서 확인하는 것이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이 매번 시켰기 때문에 억지로 했다.
석 달이 지나자, 민준이는 더 이상 검산을 의식하지 않았다. 풀면 자연스럽게 확인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검산하는 시간이 줄었는데 오히려 실수가 줄었다. 민준이의 뇌가 풀이 과정에서 이미 오류를 감지하는 신경 경로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검산이 자동화되자, 민준이는 문제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제임스가 말한 자유가 그렇게 생겼다.
존 듀이(1859~1952)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제임스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교육의 언어로 습관을 이야기한 철학자다. 93세까지 살며 40여 권의 저서와 700여 편의 논문을 남긴 그는 미국 진보주의 교육철학의 가장 중요한 이름이다. 그의 1922년 저작 『인간의 본성과 행위』에서 습관은 그의 교육 사상 전체를 떠받치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듀이가 앞선 두 사람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다. 그는 습관을 굳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사람은 습관의 창조물이라고 할 만큼 습관이 인간을 규정하지만, 그 습관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변한다고 그는 말했다.
듀이에게 인간은 환경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고, 그 반응이 환경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환경이 다시 인간에게 영향을 준다. 습관은 유기체가 조직을 구성하고 계속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 주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의지와 행위를 설명해 준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습관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한번 형성된 습관이 환경이 바뀌면 함께 바뀐다. 습관은 맹목적인 반복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계속 조정되고 진화하는 것이다. 듀이가 습관을 지능적 도구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듀이는 이것을 교육의 핵심에 놓았다. 교육이란 경험의 끊임없는 개조이며, 미숙한 경험을 지적인 기술과 습관을 갖춘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을 통해 습관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듀이가 경계한 것이 있다. 한쪽으로는 교사가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 다른 한쪽으로는 아이의 자발성에만 맡기는 것. 둘 다 진정한 경험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진짜 교육은 아이가 환경과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스스로 경험을 재구성해가는 과정이다.
고등학교 1학년 서연이는 수능 기출문제를 처음 풀었을 때 절반도 풀지 못했다. 모르는 개념이 너무 많았다. 선생님은 틀린 문제를 다시 풀라고 했다. 서연이는 답지를 보고 이해하려 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생님이 방향을 바꿨다. "이 문제를 왜 못 풀었는지 그 이유를 한 번 써볼까." 서연이는 처음에 "모르는 공식이 나왔다"라고 썼다.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그 공식이 왜 여기 쓰였을까?" 서연이는 문제를 다시 읽었다. 조건을 하나씩 짚었다. 출제자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 학기가 지나자 서연이는 처음 보는 문제 앞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모르는 것이 나와도 멈추지 않았다. 문제와 대화하는 습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환경이 바뀌어도 습관은 서연이와 함께 진화하고 있었다.
듀이가 말한 살아있는 습관이 그것이다.
수학 공부를 떠올릴 때 많은 아이들이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문제 풀이다. 오늘 몇 문제를 풀었는가, 몇 점을 받았는가. 반복은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방향은 없는 경우가 많다.
수학 학습에서 진짜 습관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자신의 사고를 들여다보는 습관이다. 문제를 풀고 나서, 혹은 막혔을 때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왜 이 방법을 선택했는가. 어디서 막혔는가. 틀렸다면 어느 지점에서 생각이 어긋났는가. 이것은 메타인지와 연결된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 그 앎이 다음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윌리엄 제임스의 언어로 말하면, 이 습관이 자리를 잡으면 아이는 더 이상 틀림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틀림을 살피는 것이 자동화되기 때문이다. 그 절약된 에너지는 더 깊은 사고로 향한다.
둘째는 문제를 향해 질문하는 습관이다. 답을 찾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다. 출제자는 왜 이 개념을 여기서 물었는가. 이 문제가 요구하는 사고의 방향은 무엇인가. 이렇게 문제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아이는 문제와 대화를 나눈다. 풀이는 그 대화의 결과로 나온다.
존 듀이의 언어로 말하면, 이것이 환경과의 능동적 상호작용이다. 문제는 아이 앞에 놓인 환경이다. 그 환경에 일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환경을 탐색하고 자신의 사고를 조정해 가는 것. 그 과정이 반복될 때 습관이 된다.
두 가지 습관은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생각하는 과정 자체를 멈추지 않는 것. 답이 나오지 않아도, 틀려도, 막혀도 계속 생각하는 것.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덕처럼, 이 습관도 처음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반복되면 그것이 아이의 본성이 된다.
수학 문제를 많이 푸는 아이와 수학 문제 앞에서 많이 생각하는 아이는 다른 사람으로 자란다. 전자는 풀이를 쌓고, 후자는 사고를 쌓는다. 사고가 쌓인 아이는 처음 보는 문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수학을 통해 기르려는 습관의 본질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세 사람의 말을 겹쳐 읽으면 습관에 관한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습관은 방향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지 않은 반복은 습관이 아니다. 습관은 자유를 만든다. 기초적인 것이 자동화될수록 더 깊은 것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습관은 살아있다.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계속 변하고 자란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길러주어야 할 습관은 무엇인가.
정해진 시간에 앉는 것, 문제를 푸는 것, 책을 읽는 것. 이것들은 습관의 형식이다. 그 안에 방향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방향,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향, 틀림을 통해 더 깊이 생각하는 방향.
형식 없이는 습관이 쌓이지 않는다. 그러나 방향 없이는 습관이 사람을 만들지 못한다.
나는 아이들이 문제를 맞히는 습관보다 질문하는 습관을 가지기를 바란다. 답을 빠르게 찾는 습관보다 느리게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습관을. 잘하는 것을 반복하는 습관보다 모르는 것 앞에서 멈추지 않는 습관을.
수학 안에 철학을 넣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학은 생각의 형식을 훈련하는 도구다. 그리고 철학은 그 형식이 향해야 할 방향을 묻는다. 이 둘이 만날 때, 습관은 단순한 반복을 넘어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는가의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마무리하고 싶다.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습관을 들였는지가 모든 차이를 만든다고 그는 말했다. 모든 차이. 이 말이 무겁게 느껴진다. 동시에 이 말은 희망이기도 하다. 지금 어떤 방향으로 반복하는가가,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열어두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