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추락
차라리 하늘의 빛을 비춰주지 않았던들
그들은 좀 더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그것이 이성이라 부르면서,
어떤 동물보다 더 동물적으로 사는 데 써먹고 있지요.
- 파우스트. 메피스토펠레스-
인간이란 존재는 삶을 이어가다 보면 반드시 한 번씩 ‘여정’을 떠나게 된다. 여정이란 것은 단순히 이국적인 장소와 국가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질과 영혼에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우러나오게 만드는 모든 종류의 감각과 경험, 그리고 기억을 의미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 역시 그러하다. 하나 이야기에 앞서 한 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부터 내가 전하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모호하지만, 때로 너무나도 사실적인 면 또한 품고 있어 그것이 주는 기묘함으로 다른 사람이 믿어줄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나의 이야기는 비극의 통렬함도, 희극의 장쾌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선역도 완전한 악역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거대한 세상과 이야기 전체에 자상하게 누워있는 하나의 사실 말이다. 이것은 이름 없고 초라한 어느 인간의 서사시일 뿐 아닌, 한때 지배와 순수, 그리고 파괴를 갈망했던 과거의 나에 대한 참회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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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가 뜨기까지 한참 남은 어느 야심한 새벽.
등산로 하나 없이 아무렇게나 뻗은 야산을 누군가가 오르고 있다.
남자인 그는 나무뿌리에 걸리지 않도록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그러나 힘 있고 확실하게 걸음을 내디디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굵고 투박하기 그지없는 밧줄이 들려 있다. 남자는 이 새벽 산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해 왔던 모든 이야기는 그것을 이끄는 자의 본질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경우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남자는 적당히 평범하고, 적당히 초라하게 태어났다. 그 이후 어쩌다 남들보다 더 많은 죄와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고, 더 많이 고통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삶이 무가치하다 여기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 외에 특별히 설명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이내 어느 적당히 고즈넉하고 커다란 나무 앞에 멈추게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나무였다. 온 사방이 잡초와 나뭇가지로 이 야산은 뒤덮여 있었으나 이 나무 주변에는 풀 한 포기 없이 맨땅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라면 괜찮겠군.’
그리 생각하며 난 드디어 스스로가 고대하던 순간을 맞이했다.
나무의 중간 높이 정도의 가지에 밧줄을 건 그는 이내 안간힘을 쓰며 가지의 위로 기어 올라간다.
여타 ‘어설픈’ 자살자들과 달리 가지 위에서 뛰어내려 한 번에 죽기 위한, 스스로 매우 똑똑하다며 자랑스레 생각했다.
최후의 순간이다. 목에 걸린 까끌까끌한 밧줄의 감촉을 느끼며 남자는 만족스러운 상념에 문득 잠겼다.
‘드디어 이 빌어먹을 고통에 마침표를 찍는군.’
이제 아주 살짝만 앞으로 발을 내딛으면 되는 것이다.
“.....”
어째서인지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오늘 저녁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간단해 보였는데.
머뭇거리던 그는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야상 주머니 속 담뱃갑에 마지막 한 개비가 남아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 그것만 피고, 그것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세를 다시 낮춘다.
그러나 그때의 그 역시 자신의 이 모습이 지독스레 모순적이고 우스꽝스럽다는 것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모든 생각과 행동들은 결국, 모든 자살자들에게 나타나는 죽고 싶지 않으며 살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그리고 다음순간이 끝이었다. 아침이 다가오며 습기를 머금은 깊은 산속의 그늘진 공기는 어느새 나무 표면에 이슬을 만들어내었고 조금의 긴장조차 하고 있지 않던 남자의 몸은 바로 곤두박질쳤다.
“악!! 끄으윽..”
세상의 모든 계획이 그러하듯, 사내의 그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한 번에 목이 꺾여서 절명했으면 좋았건만. 어설프게 부러진 목뼈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안겨주며 끔찍한 정도로 느긋한 죽음을 제공했다.
그렇게 되고서야 그는 생각했다.
살고 싶다.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 미치광이처럼 되뇌며 든 감정은 결국 이미 익숙해진 스스로에 대한 경멸일 뿐이었다.
사실 담배를 피우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이 산을 올라오면서 2개비는 폈으니까.
그저 변명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자신이 저지른 모든 실수들처럼, 차일피일 선택을 미루다 마음을 바꾸게 할 변명거리 말이다.
그러나 부질없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책임은 온전히 그것을 저지른 해당 인간의 몫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가여운 아이로구나’
목소리다. 너무나도 맑고, 또 진실된 동정과 슬픔이 깃들어있는 여자의 목소리.
‘내 비록 부족하지만, 너를 도와주도록 하마’
그것이 마지막으로 목소리는 끊긴다, 그의 의식도 끊겼다.
어두컴컴한 시야로 속 나무의 가지들이 파르르 떨어대고 있었다.
희미해져 가는 감각으로도 바람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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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27년 텍사스 공화국 수도 포트워스
포트워스의 시의 전체적인 경관은 단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을 것이다. ‘불결함’.
지독히 오염된 대기 속 오염물질은 내리쬐는 태양빛을 반사시킬 정도이며, 그러한 광경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얼마 전 도시 외곽에 새로 증설된 공장은 그 위에 또 다른 매연을 넉넉히 새로 얹어준다.
모든 하천과 강은 말라버린 지 오래이다. 그나마 형태라도 남아있는 것은 강조차 아니다. 그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는 타르 진액일 뿐.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지금 파일을 전송했으니까, 확인-”
탕!!!!
“야 됐어 됐어!! 전부 가지고 튀어!!!”
퍽치기 강도? 그 정돈 이곳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다
“감히 우리 갱단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
“지원, 지원이 필요하다!! 특공대 놈들은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일주일에 한 번꼴로 좀 뻐긴다 하는 갱단들은 경찰들과 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인다.
“씨발 이게 뭐 하자는 짓거리야!!! 해고를 할 거면 다섯 달 동안 밀린 월급부터 주던가!!”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모든 시위행위는 텍사스 공화국 행정명령 23호에 의해 금지된 상태이다. 즉시 해산하라. 반복해서 명령한다. 즉시 해산하라.”
“좆 까 이 기업의 개새끼들!! 어차피 돈을 못 받으면 굶어 죽는데 무슨 상관이야!!!”
“폭도들이 해산을 거부했다. 발포 개시”
두두두두!!
간혹이지만 상식을 한참 벗어나 벌어진 행패에 들고일어난 노동자들을 기관총으로 쓸어버리기도 한다.
통계조차 잡히지 않는 마약문제,
천국과 지옥 사이가 가까워 보일 지경의 빈부격차,
남쪽의 멕시코 사회주의 공화국 국경을 오가는 온갖 종류의 밀수품들까지.
그 모든 것들의 집합이야말로 이 텍사스 공화국의 수도(과거에도 주도였던) ‘포트워스’의 현주소이다.
포트워스의 외곽 지역은 도시에서 배출된 온갖 폐기물과 고철, 잡동사니들로 사실상 둘러싸여 있다.
어찌나 거대한지 누르스름한 사막조차 가려질 정도다. 텍사스 정부조차 애초에 그것들의 처리를 포기한 입장이다.
“좋아 어디 보자... 비싼 게 있어야 할 텐데”
그렇기에 그 쓰레기의 산 아래 깊숙한 지하를 누비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은 다른 누가 보더라도 매우 이질적인 광경이었으리라.
허리띠에 달린 고리에 줄을 걸어 고정한 채 순수한 고철들로 이루어진 바닥을 헤집던 그녀는 찾아낸 물건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연적인 빛 한 줌 들어오지 못해 어둠이 사방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Scheiße, 이쪽은 전부 짝퉁이네. 쓰고 버리려면 진품을 쓸 것이지 말이야 쯧...”
짧게 욕설을 내뱉은 뒤 그녀는 차고 있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곳에 내려온 지 12 시간 하고도 7분이 지난 뒤였고 빠져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이내 그녀는 머리에 쓰고 있는 바이저의 다이얼을 돌려 식별 모드를 껐다. 큰 맘먹고 지른 누보테크의 광학장비는 다행히도 제값을 하고 있었다.
수확을 거둘 만큼 거뒀다고 생각한 노획물을 몽땅 가방에 집어넣은 그녀는 다리를 쪼그려 몸을 굽힌 뒤 등 쪽으로 가방을 갖다 대었다.
지잉... 짤깍!
조잡한 형태의 강화 외골격의 등에 설치된 전자석이 작동하자 가방은 이내 쏜살같이 그녀의 등에 달라붙었다. 한 손으로 잡고 있던 줄을 타고 오르며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그녀가 있던 구덩이는 그 거대한 공간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 쓰레기 산맥의 가장 깊숙한 지하에 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동굴과 넓은 통로가 사방에 서로 이어져 있다.
포트워스의 외곽을 반쯤 둘러싼 이 쓰레기 산은 어찌나 크고 넓은지 '고철궁전'이라는 고유한 별명을 얻을 정도이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트리스 제시카. 그녀는 이 세계에서 지칭, 혹은 멸칭으로 사용되는 ‘스캐빈저’라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미소(미국-소련) 전쟁 이후의 대폭동. 그리고 뒤이어 전 세계를 휩쓴 나노머신 대붕괴 사태 이후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인간들은 너무나도 흔해진 부류였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다른 이들은 쳐다도 안 볼 오물과 쓰레기를 뒤지며 쓸만한 물건을 팔아치웠고 근방의 쓰레기가 동나면 다시 이동하는 방식으로 질긴 삶을 이어나갔다.
그런 점에서 포트워스는 스캐빈저들에 있어 지상낙원과 같은 곳이다. 쓰레기가 동나면 떠나거나 값진 물건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것들이 산처럼 쌓여있으니까.
농담 삼아 몇몇 스캐빈저들은 이곳을 '진정한 엘도라도'라 부르며 우스갯소리를 내뱉기도 한다.
육안으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쓰레기들로 이루어진 동굴을 그녀는 신중하게, 그러나 일정한 속도의 빠르기로 이동하였다.
한시도 쉬지 않았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을 감싼 바이저와 개방형 방독면에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꿋꿋이 그것을 벗어재 끼고 싶단 충동을 참아냈다.
가정용 토스터부터 방사성 산업폐기물이 한 데 어우러진 이곳에서 장비를 벗는다는 것은 당연히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띠디디디!
바이저의 헤드셋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전방에 미확인 물체가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아는 그녀는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흔히들 '인계철선'이라 불리는, 끊어질 시 그것에 연결된 장치가 작동하는 줄이 아주 희미한 형태를 띤 채 있었다.
간혹 스캐빈저들 중 소위 '상도덕'이 없는 것들은 자신이 물품을 숨겨 둔 중간 거점에 이리 부비트랩을 설치해 둔다.
너무도 능숙하게 함정을 해체한 뒤 해당 방향으로 향하자 역시 예상대로 꽤나 값나가는 전자부품들이 더플백 안에 있었다.
'하여튼 요즘 욕심쟁이 새끼들이 너무 많아요. 이렇게 나누고 살 줄 몰라서야'
속으로 그녀가 이 함정의 설치자를 비웃으며 전리품을 살피던 찰나,
!....'
순간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낮춘 뒤 통로 옆쪽 구석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저편에서 타닥거리며 시뻘건 전조등의 빛을 뿜어내는 누군가가 그녀의 옆을 지나쳤다.
그녀는 숨을 최대한 죽인 채 한 손은 권총집의 권총에 갖다 댄 채로 기다렸다.
요즘 세상에 안 그런 곳이 사실상 없지만 고철궁전은 법과 도덕이란 곳이 전무한 공간이다. 사람 하나를 죽인 뒤 암매장해 버리면 최소 4 반세기는 감출 수 있는 장소가 이곳이다.
한 번인가 정부 놈들이 반쯤 보여주기식으로 경찰들을 이끌고 진입한 적이 있었다. 그들 전원이 생환하지 못했다.
횃불을 든 자가 충분히 멀어지자 트리스는 바이저의 배율을 좁혀 정체를 확인했다. 몸에서 솟아난 듯한 삐죽삐죽하고 거무튀튀한 방어구를 보아 로보슬레이어 쪽 놈이 확실했다.
'하여간 뒈져버릴 놈들. 뭘 이리도 척후병을 많이 돌리는지'
이미 사라진 갱단원을 향해 나지막이 욕설을 퍼붓고 그녀는 가던 길을 다시 나섰다.
여기서 누군가는 마치 그녀가 등산을 하듯 위쪽으로 힘겹게 고철들을 타고 오르는 상상을 그릴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지상, 그러니까 위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약간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 전후사정을 안다면 아무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지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그녀가 수색한 구덩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쪽으로만 100미터가 넘어가는 공간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이 광경을 보는 것을 그녀는 좋아했기에 항상 이 지름길을 그녀는 애용해 왔다.
그 아래로 철판과 반쯤 썩어 문드러진 나무로 덧대어 크거나 작은, 그러나 하나같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고철들을 녹이기 시작했는지 마을 중앙의 대장간 굴뚝에서 벌써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광장의 상인들도 장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사이사이로 그녀가 아는 사람들 역시 보였다.
거기에 마을의 집들 중 가장 번듯하고 큰 집의 테라스에서 로날드 시장이 나와 뭐라 뭐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에메랄드 시티'라는 이름을 지닌. 고철과 쓰레기들로 깔아뭉개진 이 도시에서 그녀는 평생을 자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