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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MDA Nov 21. 2023

스팀펑크 3부작(3):그 좋았던 시대여

개인적 사정으로 작성 기간에 거대한 공백이 있었던 것에 대해 사과하며 글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스팀펑크 소개글 중 마지막 장. 즉, '사회적 요소'에 대해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선을 이룬 역사. 그리고 그것을 달리는 '진보'라는 믿음

물론 장르의 변주에 있어 예외 역시 존재하지만, 스팀펑크적 요소를 지닌 거의 대다수의 매체가 지니는 분위기. 즉 해당 매체의 전체적 서사와 캐릭터들이 일률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와 미지에 대한 두려움없는 호승심과 기대이다.


비록 상업적으론 처참히 실패했지만 1999년 영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는 이러한 스팀펑크의 유쾨한 장르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다른 펑크 장르인 디젤펑크, 특히나 사이버펑크와 비교해봤을 때 스팀펑크라는 장르의 전체적 서사는 매우 발고 경쾌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설사 위기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보통 좋게좋게 끝나며, 때로는 위기가 주동인물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원인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근대의 발전은 정신과 물질. 이 상반된 두 개념이 맞물리며 상호보완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장르적 파토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팀펑크가 펼쳐지는 '근대'라는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근대를 최대한 본질적으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격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의 미국을 예로 들어보면, 1830년대 이후에 신대륙에서 살아간 이들은 철도망이 발달되기 이전 우편이 전달되는 데 1년을 기다려야 했던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 50년대의 이들은 대서양을 횡단하여 설치된 전보가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했고. 그 뒷세대 역시 동일한 양상이었다. 

변화란 것이 년 단위조차 아닌 달 단위로 이루어졌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 인류 전체에 내재되어있던 에너지가 처음으로 막힘없이 분출되는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모두가 변화라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으며 대다수는 오히려 그것을 환영하였다.


노동이란 행위에 대해 우리가 지닌 경멸과 반감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찬란하고 밝디밝은 빛 밑엔 어둡기 그지없는 그림자가 존재했다. 아니, 어쩌면 그 그림자야말로 근대라는 광휘의 본체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진보함에도 정작 그 진보를 일으키는 인간은 철저히 짓밟히고 착취당하는 것 또한 근대였으니 말이다.

산업화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농촌의 몰락과 도시의 포화성장은 해당 지역의 노동자와 빈민가 거주민들을 중세때보다 더 참혹한 삶으로 몰아넣었다. 사진과 같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통한 최소한의 자아 실현은커녕 하루하루의 생존을 걱정하며 끊임없는 소외로 내몰릴 뿐이였다.


인간이 지녀왔던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우새학'이라는 끔찍한 나무를 만들고야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러한 빈곤과 결핍의 물질세계를 정신의 세계는 제동을 걸기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가열차게 물질의 등을 떠밀었다. 자본주의 탄생과 그것에 맞물리며 본격적으로 투자의 대상이 된 과학과 기술은 필연적으로 정치의 영역에 귀속되기 시작하였으며,  정치적 영역에 돌입된 과학은 머잖아 절대적 사실과 경험론적 사고마저 때론 곡해시켰다.


근대는 확실한 진보의 시기였다. 허나 그 '진보'는 누가 규정하는가?

이러한 근대의 어둠에 종점을 찍은 것은 뭐니뭐니 해도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개념 그 자체일 것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제국'이란 단어에 대해 막연한 부정적 개념을 지니곤 하며 제국주의라는 현상은 그러한 사람들의 관념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나 그것이 근대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제국. 그러니까 문화적, 경제적 침공을 통한 최소한의 호혜성을 띄는 현대의 제국주의와 달리 근대의 제국주의는 오로지 무자비한 착취와 수탈의 관계만을 띄었기 때문이다.



'근대'를 재조명하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근대라는 시대 이면의 광기와 모순을 가장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런한 측면에서 2000년대 세기말의 암울함에서 벗어난 일부 서브컬쳐는 당시까지 오로지 낙관적으로, 혹은 오로지 부정적으로 그려지던 근대를 재조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작품 중 하나는 지브리 스튜디오와 미야자키 하야오,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 역사상의 희대의 걸작 중 하나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주의력이 세심한 독자라면 이미 알았을 테지만, 작품 속 세계의 국가들은 모두 군국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오색찬란함을 과시하는 군복에 오와 열을 맞추며 행진하는 군인들. 귀를 찢을 듯이 울리는 전함의 뱃고동 소리. 철의 날개를 하늘에 뻗치며 파괴의 씨앗을 흩뿌리는 폭격기들 속을 누비는 하울이라는 마법사와 마법이라는 설정은 근대라는 시대의 본질. 즉 '합리'와 '이성'이라는 것으로 무장된 껍데기 속 그들을 아직 지배하던 미신과 비합리를 보여주며 그것의 모순과 나약함을 뼈저리게 보여준다.


아메리칸 드림은 실존하는가? 역사라는 굴레에서 무고한 자는 존재하는가?

그리고 필자의 개인적 경험 속에서 이러한 근대의 재조명을 가장 성공적이고, 또 가장 통렬하게 다룬 서브컬쳐 매체는 2013년 발매된 게임 '바이오쇼크:인피니트'라 생각한다. 단순한 판타지 FPS인 것 같던 게임은 중반부터 밝혀지는 세계의 끔찍한 본모습과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플레이어들에게 매우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미국과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착각은 바로 자신들은 구대륙이 지니고 있는 모든 죄악들, 즉 제국주의를 등에 압은 식민지 병탄과 자본주의적 착취, 위선적 행위에서 자유롭다는 생각이다. 물론 노예제라는 악습이 불과 19세기까지 존재하였으나 링컨 대통령의 고귀한 결단으로 그것은 종식되었다. 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정치학적 의미로 국가와 사회 내부에 대한 폭력을 전담하는 미국의 경찰조직은 정작 가면 갈수록 국가 외부에 대한 폭력을 전담하는 군대처럼 변하고 있다

이것은 오산이었다. 미국인들이 다만 몰랐던 것은 법률은 만들고 고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것과 별개의 사회적 관습과 그것을 형성하는 인간의 정신은 법률이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한 인간에게 뿌리박힌 차별적 관념은 여러 변수적 요인에 의해 미국 사회에 끈덕지게 살아남는데 성공했고 그에 대응하지 못한 정치체는 오히려 혼란만을 야기하고 있다.


'좋았던 시대'의 종막이 오다.

다만 부디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러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도래와 산업혁명은 전체 인류에게 절대적인 이득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위생 환경의 개선과 의료 기술의 발전은 영아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춰주었다. 프리츠 하버의 질소합성법은 인공비료를 통해 기근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거기에 더해 통신과 운송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정보들을 빠르게 전달하며 발전 속도 자체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고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술의 발전과 달리 인간. 정확히는 인간의 정신은 그에맞춰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무대는 준비가 끝나 있었다.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그것을 얽은 자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구대륙의 이해관계, 통찰 없는 낙관주의에서 비롯한 안일함은 마침내 거대한 파괴적이기 그지없는 좋았던 시대. 즉 벨에포크(belle epoque)의 종막을 선고했다.

바로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 1차 세계대전이라는 것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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