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한여름 포도 냄새를 맡으면 햇살이 내리쬐는 뒷마당에서 잘 익은 포도를 고르던 아빠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두 뺨에 닿을 때면 창문을 활짝 열고 전축에 나오는 단조 노래를 흥얼거리며 대청소하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기억을 잘하는 편이 아닌데도 생각지 못한 감각에 기억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처음 영국 여행을 갔을 때였다. 해머스미스역 근처에 위치한 유스호스텔은 1층 펍을 지나 계단을 올라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는 계단에 오를 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특유의 냄새가, 향기가 났는데 나는 영국 여행을 마치고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한동안 그 향기가 계속 생각났다. 코끝에서 향기가 날 듯 말 듯. 하더니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립다고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감정이고, 왠지 그 향기를 맡으면 런던을 더 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어느 날 장을 보던 마트에서 그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토마토 성분이 들어있는 화장품에서 런던의 그 계단 향기가 났다. 그리고 그 화장품을 사서 쓰지 않고 둔 적이 있다. 런던이 생각날 때마다 꺼내 향기를 맡고 넣어놓는 용도였다.
그래서였을까. 1년 동안 공부를 하러 런던을 다시 찾았을 때 처음 한 일은 향수를 사는 일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고르는 향수가 나중에 시간이 지나 런던을 떠올리게 할 강력한 기억의 무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고심 끝에 한 미국 여배우의 이름이 적힌 롤러 형태의 향수를 집어 들었다.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였는데 런던과 어울렸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향수를 거의 매일 손목에, 귀 뒤에 바르고 다녔다.
벌써 런던을 떠난 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런던이 그리울 때면 화장대 한편에 놓아둔 향수를 꺼내어 든다. 런던에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참 신기하게도 향기를 맡으면 잠깐이나마 런던의 메트로로, 작은 골목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지금도 긴 여행을 하거나 잠시 어느 도시에 살게 되면 그 장소와 어울리는 향기를 고른다. 시간이 지나 화장대에 특정 도시의 기억을 담은 향수를 주욱 늘어놓고, 하나씩 꺼내 보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