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원에서 학생 블로거로 활동할 때 자기소개에 적었을 만큼, 리스트 만들기에 누구보다 진심이다. 채워가는 재미도 있지만, 완수하고 하나씩 지워가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그래서 폰에는 뉴욕 리스트, 헬싱키 리스트와 같이 도시 이름을 가진 리스트가 가득하다. 앞으로 가야 할 곳도 있고, 언제 갈지 모를 도시도 만일을 대비해 만들어 둔다.
그렇다고 계획형 여행을 할 만큼 바지런한 편은 아니다. 신혼여행 가기 전에 공항 근처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는데 숙소를 결혼식 날 신부 화장 받으며 예약했다. 준비형 여행가가 아니라는 설명을 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행히 인천에서 묵은 숙소는 실패하지 않았지만, 낭패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와이 오아후에서 마우이로 이동하며 현지에서 예약한 두 번째 숙소는 신혼여행을 순식간에 비즈니스 여행으로 만들었다. 이게 아닌데. 미드 프렌즈를 틀어놓지 않았다면 우린 아마 ‘와이키키 바다에서 본 거북이가 정말 컸어,’ 회상하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우중충한 마우이의 날씨까지 더해져 숙소는 더없이 꿉꿉했다. 햇살이 내리쬐던 오아후섬이 너무나도 그리운 순간이었다. 마우이 닭들이 왜 무리 지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업무가 바뀌며 출장을 많이 가게 되었다. 첫해 3월부터 연말까지 일곱 번 해외를 나가며 긴 비행과 시차에 정신 못 차리던 시절이 있었다. 빠듯한 출장 준비에 둘러볼 곳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출장지 공항에 도착하면 그만큼 막막할 때가 없다. 혼자 가는 출장이면 그나마 괜찮다. 식당 정도야 사람 많은 곳을 골라 한 자리 차지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장 동료나 상사와 같이 가는 출장은 다르다. 장화 신은 고양이 얼굴을 하고 ‘나는 이번 출장에서 너에게 의지할게’라는 눈빛을 보내면 길거리에서 구글맵을 켜는 수 밖에. 그럴 때 예약은 사치다. 첫 직장 동기들과 와인을 마시러 갈 때면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반평생을 살다 온 동기에게 와인 리스트를 스윽 떠밀어주곤 했는데, 그 동기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 친구는 와인을 잘 모른다 했다. 나중에는 따로 공부를 해왔는지 피노누아르 품종의 와인을 추천해줬다.
그럴 때 냉장고에 꽉 채워둔 김장 김치처럼 꺼낼 것이 필요하다. 리스트. 되려 리스트를 만들려고 하면 품이 클 수 있다. 평소에 우연히 스치는 정보를 차곡차곡 쌓는다고 생각하면 부담이 없다. 이를테면, 치과에서 대기하며 꺼내든 잡지에서라든지, 의미 없이 브라우징을 하다 본 포스팅에 조금만 레이더를 켜고 있으면 괜찮은 식당, 숙소, 동네 이름 몇 개 정도는 얻을 수 있다. 적당한 J들에게 추천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