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인가 주말과 주중을 나누는 일이 어색해졌다. 매일 눈을 뜨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데 쓰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직업으로 나눠 설명한다면 사회가 약속한 단어들로 나열해 보건대, ‘건축가, 인플루언서, 작가, 브랜드 디렉터’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일들을 훌륭히 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는 사람이다. 모두 사랑하는 일이고 아직도 애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눈을 뜨고 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직업을 바꾸어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공간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의 표현이 어떨 때는 ‘건축물’이 어떨 때는 ‘SNS상의 게시글’이 어떨 때는 공간에 대한 ‘다양한 장르의 글’이 되기도 또 어떨 때는 ‘브랜드의 이야기’로 표현될 뿐이다.
그만큼 바쁘게 살고 있다. 그러니 통상적으로 쉬는 날이라고 인식이 된 주말과 일하는 날이라고 인식된 주중은 나에게 의미가 없다. 덕분에 체력적 한계를 계속 이겨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만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만족의 한계도 없다는 것을 매일 확인하는 보람찬 삶이다.
-
‘어떠한 일을 하기로 약속된 날. 그 약속된 일을 하는 것도 무척 행복하다. 마치 영화 속에서나 보던 일을 직접 하는 것 같기도 해 그 주인공과 나의 일치된 장면이 주는 행복감도 있다.’
-
어쩌다 운이 좋게 ‘토, 일’ 물리적 공간에 제약이 없는 일들이 겹친 날이었다. 더군다나 집 에어컨에서 물이 샌다. 간단하게 읽고 싶었던 책과 노트북을 챙긴 채로 집 밖을 떠난다.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자유롭기에 집을 떠나는 즐거움, ‘이가락’을 즐겨보기로 한다. 그렇게 아침부터 나왔다. 그러나 나의 즐김을 별것 없다. 이 무더운 날 열이 많은 나로서는 어디를 오래 돌아다니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호캉스를 떠나기로 했다. 모름지기 시원하고 집안일이 없는 개인적인 공간일수록 자유를 더 쉽게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매달 통장에 남는 잔고를 생각해 적당히 쉬고 글을 쓸 수 있는 최선을 공간을 선택한다. 도착한 호텔은 꽤 비싼 곳이지만 현대 문명의 도움을 받아 합리적인 가격으로 묵을 수 있었다. 몇 년 전 코로나가 창궐하기 이전 해외에서 오래 생활을 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생긴 예약사이트의 할인 혜택을 받은 덕분이다. 체크인하러 올라간다. 으리으리한 로비는 아니다. 그래도 마음에 든다. 사실은 집 에어컨에서 물이 새는 덕에 도망쳐 나왔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호화스러운 곳이다. 부려보는 사치에 식은땀은 잠깐 그 덕에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서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코로나 4단계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호텔 체크인 시에 해야 하는 일들이 배수로 많아진 것이다. 신분증명과 발열 체크, 투숙객의 수 제한, 엄격한 규정과 퇴실 조치에 대한 긴 안내. 다 듣고 대답하는 대만 10분이 더 넘어간다. 처음 겪는 일에 곤혹스럽기도 하지만 이제 주말 간 머무를 임시거처를 간다는 생각에 금세 곤혹스러움은 없어진다.
방에 도착해 풀어야 할 짐도 얼마 없다. 그러나 일단 씻기로 한다. 더운 날 쉽게 땀을 흘리는 발열 인간이라 해야 할 일들을 젖혀두고 몸부터 씻어야 한다. 씻고 나오니 한결 개운하다. 인제야 꺼내어보는 공책과 노트북. 그것들을 언제든 쓸 수 있는 상태로 준비해두고 주말 간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정한다. 하나둘 나열하고 공책에 기록된 일들을 옮겨보니 이미 9가지의 일들이 정해져 있다. 나름 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기대하고 왔지만, 오늘 쉬기는 글렀다. 써야 할 글이 4편에 보내줘야 할 메일이 4 통이다. 그리고 만들어야 할 기획안도 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종로 어귀의 공간에서 나름 호캉스라는 것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에 위안으로 삼고 토요일 하루는 그렇게 보내야 했다.
일요일 오전 새벽까지 달려버린 몸을 겨우 일으켰다. 주거공간에선 잘 보기 힘든 암막 커튼 덕인지 잠은 푹 잔 것 같다. 동시에 에어컨도 시원하게 틀고 자니 나름 어제의 업무량보단 덜한 피로감이다. 그래도 무리해서 끝낸 어제의 나를 칭찬한다. 덕분에 일요일은 쉬는 날이다. 운이 좋게도 18시에 체크아웃을 할 수 있는 플랜이었다. 그래서 얼른 몸을 씻고 나갈 채비를 한다. 오늘은 정말 책만 들고 가기로 했다. 근방에 가보고 싶었던 공간이 있다. 나는 건축재료 중에 벽돌을 가장 좋아하는데, 서촌 어딘가에 근사한 벽돌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종로구에는 멋진 근대식 벽돌공 간이 많아 내가 사랑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여하튼 더위가 거세지기 전에 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도착한 공간은 언덕에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 위에 덩그러니 놓인 거대한 절벽 건물. 그 앞마당엔 건물 크기에 걸맞은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언덕이라 그런지 바람이 잘 분다. 거대한 나무는 여름의 무더위를 가려준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일요일 아침 커피라니. 영화에서나 보는 그 장면 아닌가? ‘영화에서는 꼭 일요일 아침에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나도 에스프레소를 시켜 본다. 몇 년 전만 해도 어디를 가면 꼭 에스프레소를 즐기던 나인데, 오랜 기간 시간에게 건강을 뺏겨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이 또 언제 찾아올까?’ 하며 커피를 기다린다.
작은 잔에 나온 커피를 들고 거대한 나무 그늘 안에 앉아본다. 불어오는 바람. 편안한 복장을 한 마을 사람들도 일요일 오전이면 많이 찾는 곳인가 보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편안한 복장을 하고 읽을거리를 즐기거나 같이 온 이와 대화를 하고 있다. 그 분위기 덕분에 나도 마치 일요일 오전이면 아름다운 공간에서 커피를 시키고 여가생활을 즐기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일요일은 참 미묘한 날이다. 어떤 이에게는 최고로 바쁘게 일하는 날 이기도, 어떤 이들에게는 온전히 쉬는 날 또 나 같은 사람에게는 운 좋으면 쉬는 날이지만 독특하게도 통상적으로 쉬는 날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쉬는 날이라고 하는 그 약속된 날에 나도 마치 그날 해야 하는 약속된 일을 지금 하는 것이다. 살면서 꿈꾸던 가치와 벗어나긴 하지만 썩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기쁘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바쁜 일상을 벗어나 지루한 천국에 사는 이들을 부러워한 거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분위기에 취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간을 구경해 본다. 재밌다. 강아지를 데려온 이도 있고, 이쁘게 차려입고 와 누군가와 사진을 찍기 놀이를 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흥미로운 일인지 잘 모르겠으나 미간에 한껏 힘을 주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무리도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표정은 여유롭다. 사람이 북적이지도 않는 이른 아침이기도 했지만 불어오는 적당한 온도의 바람과 더위를 뺀 여름의 장면은 여유로운 표정과 어울렸다.
붉은색의 공간에 초록 나무들 그리고 푸른 하늘 조합은 마치 간장 계란밥과 같다.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꾸준한 그 맛. 어쩌면 이 공간의 그 맛과 닮았다. 약속된 날에 약속된 일을 하는 비교적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나에겐 무척이나 행복한 순간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