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모임 회원님들, 힘내세요!
회원 : 아! 난 진짜 프레드릭이 얄미워요
나 : 프레드릭은 예술가가 아닐까요?
회원 :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다 열심히 일할 때 놀고 있잖아요.
나 : 노는 게 예술인데... 사는데 예술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프레드릭>은 이탈리아 작가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이다. 칼데곳 아너상을 수상한 작가의 손은 바빴을 것 같다. 색종이를 찢어서 만든 듯한 귀여운 들쥐들의 모습과 주인공 프레드릭의 반쯤 감은 눈과 완전히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마법의 그림책. 이 책을 가지고 지난 주에 한 달에 두 번 하는 그림책 모임을 했는데, 한 회원이 프레드릭이 일도 안 하고 뺀질거려서 너무 얄밉다고 했다. 나는 프레드릭은 노는 게 아니라 예술을 하는 거라고 주장까지는 못하고 예술가가 아닐까 하며 조심스레 답을 했다. 그 전날 모임을 위한 활동지에 나는 정성을 다해 이렇게 썼다. 예술에 대한 나의 정의 같은 것이다.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세상과 불화하는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맞다고 하는 것에 아니라고 말하며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죠. 돈, 명예, 권력같이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도전하고 사랑, 아름다움, 우정, 감사와 같은 가치에 헌신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평판을 잃거나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용감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권하는 ‘타당성의 구조’를 깨부수려고 합니다. 부자가 되려거나 유명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더 살만한 곳이 되기를 바라면서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프레드릭’ 같은 예술가는 육체의 배고픔이 아닌 영혼의 허기를 채워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선지자가 아닐까요? 우리의 감각을 깨워 삶에 감사하고 감탄할 수 있게 하는 예술을 육체의 밥과 바꾸지 않게 조심해야겠습니다.”
나는 프레드릭을 열렬히 변호하고 싶다. 회원님은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베짱이에 해당하는 프레드릭을 일 안하는 얄미운 놈이라고 하지만, 그가 없다면 들쥐들이 그 기나긴 겨울을 참아낼 수 없기에 얄미운 놈이 아니라 선지자나 선구자라고 말하고 싶었다. 인생의 겨울을 지내고 있는 회원님의 인생에 봄이 오려면 오히려 양식보다 프레드릭이 모으고 있는 것들을 모아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을 힘주어 말하지 못했다. 그것을 그녀도 마음으로는 알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피곤하다고 운동을 못하고 운동을 못해 체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나 힘들어도 운동을 해서 몸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처럼 인생의 어려운 시기에야말로 영혼의 양식이 필요한 때이다.
열심히 일하는 프레드릭의 친구들이 왜 일 안 하냐고 물으면 그는 ‘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햇볕을 쬐며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살을 모으고 있다. 일 안하고 동그라니 풀밭을 바라보면서는 ‘온통 잿빛인 겨울’을 위해 색깔을 모은다고 한다. 옥수수나 곡식 같은 양식을 모아야지 웬 ‘색깔’을 모으는지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친구들이 화가 나서 나무라듯 일 안 하고 꿈이나 꾸고 있냐고 묻자, ‘겨울에 동이 나는’ 이야깃거리를 모으고 있다고 답한다. 도대체 일은 안 하고 빛, 색, 이야기를 모으고 있는 프레드릭은 밥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쓸데없는 것만 모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겨울이 오자 소설적 반전! 추운 겨울이 한참 지나 양식이 떨어지자 친구 쥐들은 프레드릭이 모은 양식이 생각났다. 프레드릭은 햇살 이야기로 친구들을 따뜻하게 해주고, 노란 밀짚모자 속의 양귀비꽃과 초록빛 딸기 덤불 얘기를 해준다. 마지막으로 ‘겨울에 동이 나는’ 이야기를 읊었는데 그것은 한 편의 시로 태어났다. 친구들은 프레드릭의 양식으로 추운 겨울에도 행복한 표정으로 프레드릭을 시인이라고 칭송하는 것으로 그림책은 끝난다.
인생의 추운 겨울은 경제적으로 힘들거나 육체적으로 약해지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는 상실의 시간일 것이다. 온통 잿빛인 들판에 추운 겨울이 왔을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봄날을 기다릴 힘은 프레드릭이 모았던 빛, 색깔, 이야기에서 나온다. 빛과 색깔은 미술을, 문학을 비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술과 문학의 만남 바로 그것은 그림책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프레드릭을 얄밉다고 하는 회원이 있기도 하지만 온몸으로 프레드릭을 하고 있는 회원도 있다. 그 회원은 내가 중학교 2학년부터 고3 수능 시험 즈음까지 영어 과외 수업에서 가르쳤던 나의 제자다. 이 제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좀 다니다가 현재 장편 소설을 쓰려고 고향에 내려와 부모님 집에 거주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매우 불만족하신 상태지만 꿋꿋하게 견디고 있다. 어머니는 입사시험을 준비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기를 바라신다. 프레드릭 친구들이 권하는 것처럼 열심히 양식을 모으고 겨울을 준비하기를 바라시는 어머니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완전히 나의 제자 편이다.
얼마 전 제자와 카페에서 만나 소설의 얼개와 전체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야기의 주제는 너무나 크고도 숭고했다. 사랑과 죽음, 인간의 존엄에 관한 이야기였고 소재도 아주 특별했다. 제자가 소설을 쓴다는데 왜 내가 이렇게 뿌듯한지, 아직도 삶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고민하는 청년이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 뻔했다. 예술가는 원래 부모와 친구와 사회와 불화하는 존재라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림책 모임으로 제자가 소설가로서의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려면 내가 이 모임도 잘 진행해야겠다는 책임감도 느꼈다.
이번 모임의 마무리는 가을 시 하나를 손글씨로 쓰고 낭송하는 것이었다. 시를 찾고 읽는 마음으로 모든 회원들과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인생의 겨울을 잘 견디어 내기를 바랐다. 나도 프레드릭을 미워하는 사람들과 프레드릭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궁리하는 프레드릭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 어쩌면 내 몫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쓴 시는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 짧은 한 구절은 다가올 겨울을 나기에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