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아 브란코비치의 <감정호텔>
나 : 당신은 50살이 될 때 기분이 어땠어?
남편 : 회사 다니느라 정신없이 지내서 기분이 어땠는지 모르겠어.
나 : 그럼 60이 될 때 기분은 어땠어?
남편 : 곧 은퇴가 다가온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지!
대한민국 상위 1% 초긍정 마인드를 가진 남편은 내가 곧 6자를 달아야 하는 나이로 향해가는 그 기분을 공감해주지 못했다. 충남 예산으로 이사 와서 핸드폰 부품제조업 공장을 현재 사장님과 함께 창업하고, 제조업의 최전선에서 대기업의 무자비한 횡포와 관행을 참으면서 회사에 다닌 남편은 자신이 50대가 되고 60대가 되는 즈음에 느꼈던 감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회사 생활을 20대 중반부터 무려 37년이나 한 남편이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 극기에 가까운 평정심을 가지고 IT 제조업의 험난한 삶을 헤쳐나왔기에 가장인 남편에게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이제는 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 봐도 되는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남편은 내면의 아니마를 발현시켜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회사가 어려워서 월급이 나오지 못할 것 같거나, 심지어 회사가 망할 조짐이 있거나, 회사가 소송을 당해 눈앞이 깜깜해진 상황이 되면 남편은 나와 ‘카페’에 가자고 했다. 뭔가 잘못하면 화장실로 아들을 데려가던 카리스마 넘치는 시누이님이 조카에게 엄마랑 같이 화장실 갈거냐고 물으면 조카가 하던 일은 당장 멈췄던 것처럼 남편이 카페에 가지고 하면 나도 하던 일을 멈추었다.
사실 남편이 카페에 가자고 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회사가 어려우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 하면 나는 불안을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게 알겠다는 말로 대화를 끝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설명’은 했지만, 남편은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분노, 슬픔, 원망, 불안 이런 감정들은 뒤로 한 채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 나눴고 또 그 계획대로 살아왔다.
은퇴를 결심한 그 날, 눈이 펄펄 내려 길이 미끄러운데 굳이 커피 한잔하러 간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나 이제 회사 그만둔다’라는 선언을 했다. 나는 좀 더 회사를 다니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은퇴라는 강을 이미 남편은 건너가 있었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은퇴로 인한 스트레스보다 수십 배 크다는 것을 알고 남편의 퇴사와 해방을 조용히 지켜보았고 한두 달 지나서야 진심으로 은퇴를 축하해 줄 수 있었다.
우리나라 학교 교육을 보면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라는 언어의 4가지 기능 중에서 수용적 언어 기능인 선생님 말씀 듣기와 교과서와 참고서 읽기에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최근에는 주입식 교육이 많이 지양되고 토론과 모둠 수업이 있기는 하지만 평가는 모두 ‘읽기’로 이루어진다. 서양 사람들처럼 자신을 좀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고 오히려 겸손한 태도가 중요하다 보니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듣는 자세의 사람을 더 믿음직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감정을 많이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약점을 잡힐 수 있어서 우리는 더욱 감정을 말로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세상을 살아가는데 적절한 기술로 여긴다. 그러다 보니 감정은 꾹꾹 억압되고 어느 순간 터져 버린다. 감정이 일상을 출렁이게 하는 주체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러도 몸의 병보다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저 사춘기와 갱년기라는 이름으로 때가 되면 지나갈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리디아 브란코비치의 <감정호텔>은 그런 억압된 감정들이 머무는 호텔이다. 지배인은 많은 방에 여러 감정 손님들을 투숙시키고 돌봐준다. 우리가 어떻게 감정이 나를 압도하지 않도록 돌봐야 하는지 호텔 지배인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전달해 준다.
슬픔이라는 손님은 조용히 기다려 줘야 하는데 슬픔이 말하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슬픔은 쉽게 호텔을 떠나지 못하고 오래 머물러 있는 반면, 분노라는 손님은 어마어마하게 시끄러워서 큰 방이 필요하다고 한다. 분노를 작은 방에 가두면 죄책감 우울 수치심으로 변신을 해버리기에 지배인은 마음껏 소리치고 훌훌 떠나도록 도와준다.
감정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분노가 떠나고 나면 평화라는 손님도 와서 숨을 돌린다. 그리고 지배인도 모든 것이 버거워지면 ‘감사’라는 감정이 잘 있는지 보러 밖으로 나간다. 자연 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자신이 호텔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다. 좋은 손님 중에 사랑이 찾아오면 지배인은 뿌듯하고 호텔은 마법처럼 웃음과 빛으로 가득해진다. 그때 기쁨도 찾아온다. 기쁨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도 데려와 함께 즐긴다.
<감정호텔>의 지배인이 여러 감정을 돌본 후에, 이 세상에 많은 호텔에 감정들이 묵고 있으며, 감정들을 맞아주고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는 지배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때 우리는 그림책을 마지막 장에 이른다.
슬픔, 분노, 수치심, 죄책감, 불안, 우울, 무기력, 버림받은 느낌, 상처받기 쉬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잠시 머물게 하는 호텔을 지어 놓고 호텔 지배인으로서 감정이 떠날 때까지 잘 돌봐야 한다는 심리학적 교훈을 <감정호텔>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저자는 감정을 형형색색의 시각적인 인물로 등장시키고 지배인의 종횡무진을 통해 우리에게 감정을 설명하지 말고 표현하라고 촉구한다. 지배인이 여러 감정을 돌보다가 때때로 자연으로 나가면 감사함이라는 감정과 만나기도 하고 기쁨이 데리고 오는 친구들로 인해 혼자 있을 때보다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독서 모임 회원들도 험한 세상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했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특히 60대 남성 회원님이 자신이 수십 년을 몸 바쳐 경영한 영업장을 폐쇄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우리에게 나눠 주셨다. 그 이야기에는 분노 슬픔 수치심 죄책감 같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겠지만 친밀하고 안전한 공간이 된 그림책 모임에 오신 지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 호텔방 하나를 마음에 짓는 일을 하신 것 같다.
삶은 누구에게나 불안정하다. 안정된 직장, 튼튼한 재정, 건강을 가진 사람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세상으로 나온 모임의 회원들에게 더욱 이런 감정호텔은 절실히 필요하다.
감정은 나를 휘두르는 것이라 몰아내야 하는 나쁜 놈이 아니라 거기 와 있음을 알아봐주고, 이름을 붙여주고 머물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하는 무엇이다. 그래서 정서적 성숙은 그 어떤 감정이 와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노력이 아니라 내 마음의 호텔에 머무를 자리를 마련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평정심은 은퇴를 결심할 즈음에 무너졌다. 오랜 세월의 감정 억압이 거의 공황장애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던 것 같다. 남편이 드디어 환갑을 넘은 나이에 자신의 마음에 호텔 방을 만들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쉬도록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감정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운 것도 죄도 아니고 다만 존재의 언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감정호텔>, 이 책은 K장녀, K가장, K며느리와 같이 책임을 다하고 성실하며 언제나 ‘난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이들이 마음에 자신의 감정이 쉬어갈 호텔을 하나 만들도록 도와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