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난 그 곳으로

<진주의 여행>에서 발견한 진주

by 민혜숙

나 : 이 그림책은 글이 없어요.

회원 : 그럼 어떻게 같이 읽죠?

나 : (난감해하며) 글쎄요. 침묵의 언어로... 음...

회원 : 우리가 글을 만들어 가며 읽어봐요!


<진주의 여행>이라는 그림책은 그림만 있고 글이 없는 책이다. 프랑스 작가, 안느-마르고 램스타인과 마티아스 아르귀, 두 사람이 같이 그렸다. 이 책은 동네 독립서점에서 회원 한 분이 발견한 진주 같은 책이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하게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책이어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언어를 삭제해 버린 것은 그 여백을 독자가 상상력을 동원해 채워나가는 기회를 주었다. 독서모임을 할 때 우리는 서로 소리 내어 낭독하며 읽었는데 읽을 글이 없으니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창작하여 낭독하듯 말하면서 읽어 나갔다. 두어 문장으로 짧게 페이지에 펼쳐진 그림을 보면서 서술하는 방식은 작가가 되어 우리 서로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진주의 여행>에서 진주를 발견한 것은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은 그 진주를 꽃잎에 얹어 소녀의 손에 끼워준다. 여기서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진주가 꽃잎에 ‘놓였는데’ 굴러떨어지지 않는지, 물리적으로 가능한 설정인지 의심했다. 검은 피부의 소녀는 손을 들어 그 반지를 감상하는데 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소녀의 손 뒤로 보이는 원경은 잔잔한 바다였다. 진주 반지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의심은 현실의 세계에 고착되어 그림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독자의 한계였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 허술하게 진주가 ‘놓여진’ 반지를 머리맡에 두고 소녀는 잠이 들었고 까마귀 같은 새가 어둠 속에 방으로 날아들어 진주를 물고 날아가 버린다.


이렇게 진주의 여행은 시작된다. 큰 배 위에 그 새가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진주는 바다를 건너고 그 배의 항해사는 우연히 진주를 발견하고 보석상에 넘기고 보석상은 진주를 여왕의 왕관 속에 넣는다. 왕관은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도둑의 손에 넘어가는 도중 분실되어 시궁창으로 빠진다. 우여곡절 끝에 연어를 먹다가 연어 살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아버지의 딸이 등장한다.이윽고 그 딸 새총의 총알이 된다. 오염원이 된 공장에 분노한 딸은 공장을 향해 새총을 쏘고 진주는 그 공장이 생산하는 음료수병으로 들어간다. 음료수를 마시다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바로 이야기 처음에 나왔던 그 소년이었다.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다락에 올라가 수십 년 전에 만들어 두었던 반지를 다시 꺼내 진주를 ‘올려놓는다’


물리적 법칙이 삶의 법칙이 아니라고 하는 듯 할머니가 된 소녀의 손에 올려진 진주 반지는 족히 50년은 지나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 소녀의 손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반지의 꽃잎은 다 말라 버렸지만, 노란색 블라우스와 원경으로 보았던 그 바다는 여전히 잔잔하다. 첫 장면에서 보았던 바다에 있었던 꽃나무와 푸른 나무는 더욱 자라나서 풍성해졌다. 나는 이 진주의 돌아옴에 알 수 없는 뭉클한 안도감을 느꼈다.


완벽한 수미상관법을 구사한 <진주의 여행>은 우리에게 돌아옴이라는 주제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세부묘사가 많은 화려한 색채의 그림에 비교하여 언어는 침묵하고 있고, 이 책에는 마지막 장면이 첫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장치가 있다. 진주의 여행 과정은 독자의 마음을 아슬아슬한 롤러코스터를 타게 한다. 여왕의 왕관에서 시궁창으로, 연어의 배 속에서 분노에 찬 소녀의 새총알로 유리창을 박살 낸다. 이 여행은 도대체 어떻게 끝이 날까 하는 마음 졸임의 끝에 여행이 시작되기 전, 즉 소년과 소녀의 순진한 사랑이 전해주는 따뜻하고 애틋한 서사 속으로 다시 우리를 돌아오게 한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는 일터와 학교에서 집을 그리워한다. 청소년들도 내 수업 중에 노상 하는 말이 ‘아! 집에 가고 싶다’이다. 향수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주제는 시와 노래에 풍요롭게 등장한다. 노동과 인생의 무게를 참을 수 있는 것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여행이 의미를 종결시키는 것은 집으로 돌아옴, 즉 귀환이다.


이는 많은 영웅 서사를 봐도 그러하다. 영웅인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고, 영웅의 반대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어리석은 아들도있다.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방탕한 삶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결국 아버지의 품으로 귀향한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형이 원이라고 한다. 상승의 이미지가 있는 삼각형이나 고정된 모서리가 있어서 딱딱해 보이는 사각형이 아닌 원은 떠났다가 돌아오는 느낌이 강한 도형이라 그렇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어렸을 때 원의 변형인 숫자 8을 하염없이 그렸던 기억이 있다. 시작점에서 어렵게 돌아 돌아 처음으로 왔을 때의 희열이 지금도 기억에 살아있다. 돌아옴의 주제로 비추어 보면 수미상관법의 이 그림책은 큰 원을 그리는 작업을 끝낸 것 같아 안도하게 하는 구조이다. 아무리 험악한 여행 속에서 헤맨다 해도 갈 곳이 있다는 신념은 우리를 불안에서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돌아왔다는 안도가 위안이 된다.


여왕의 왕관에 놓이는 것이 진주의 목적지가 아니다. 진주가 오염된 하수로에 둥둥 떠다니더라고 도둑의 검은 장갑 낀 손에서 빠져 나와 비 오는 도시의 빗물 속에 아스팔트 길을 질주하는 것이 인생의 여정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한 여정은 긴 세월이 흘러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방황과 시련은 ‘귀환’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귀환은 예전처럼 젊고 찬란하지는 않지만 고통스럽지 않고 안온하고 평화롭다.


진주의 여행은 노부부가 된 소년과 소녀의 인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굽이굽이에는 늘 어려움과 고통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해서 인생은 고통스러운 바다라고 불가에서는 가르친다. 그럼에도 우리가 돌아갈 곳, 그것이 하느님의 품이든 대자연의 품이든, 하늘이든, 궁극의 세계이든, 돌아갈 곳을 아는 사람에게는 여행을 마친 진주가 다시 반지에 놓이는 것 같은 평안을 소망할 힘이 있다.


헤매고 있는 것 같지만 우연과 우연을 거쳐 떠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생의 신비다. <진주의 여행>은 ‘우연은 평범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라는 영화의 한 대사로 끝난다. 나는 한 신부님이 캘리그라피 작품에 쓴 글귀로 이 책의 감상을 마무리한다. 벽에 붙여 놓은 글귀는 이러하다.

'인생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할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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