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노을의 엑스터시
남편 : 당신은 바다가 좋아 산이 좋아?
나 : 난 당근 바다가 좋지.
남편 : 나도 그래. 평지를 뛰는 건 괜찮은데 등산은 힘드네.
나 : 바다를 보러 코타키나발루는 어떨까?
코타키나발루는 석양이 아름답다고 이름이 난 보르네오섬의 해안 도시이다. 그렇다고 바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발 4100 미터나 되는 키나발루산도 있다. 예전에 남편 친구가 키나발루산에 가서 울트라 마라톤을 한다고 해서 그런 멋진 산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석양이 발리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라는 말에 그냥 가고 싶어졌다. 저가 항공만 취항한 곳이라 항공료가 저렴하니 성격 급한 나는 당장 간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땀흘려 산길을 걸어 산 정상에서 야호를 부르고 높은 곳에서 발아래 펼쳐지는 복닥거리는 도시를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올라가는 수고가 필요 없고 차에서 내리면 바로 내 품에 들어오는 바다에 가는 것이 더 좋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석양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이유는 바다 위에 두둥 떠있는 구름이 햇빛을 반사하면서 여러 가지 빛의 발한다는 점이다. 붉은색이 보라 분홍 금빛과 겹쳐지는 극적인 색을 볼 수 있고 바다가 잔잔해서 거울처럼 구름이 있는 하늘을 비추어 주어서 그렇다고 한다. 또 열대성 기후의 공기 중에는 수증기와 미세입자가 많아서 빛이 더 많이 산란한다는 물리적 이유도 있다.
이 찬란한 아름다움을 한번이 아니라 3박5일 여행 내내 바라볼 수 있었다. 호텔 꼭대기 층에 올라가면 아침 식사도 하고 차와 음료를 파는 라운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차 한잔 마시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탄중아루 해변에는 코타키나발루 리조트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샹그릴라 리조트가 있고 그곳 선셋 바에서 선베드를 빌리면 한 시간에 12만 원도 넘는다. 와인 한잔이라는 낭만을 살짝 포기하고 해변에 나가서 세 사람이 3천 원 남짓한 자릿세를 내고 해가 환한 늦은 오후부터 해가 완전히 바다로 떨어지고 어두움이 바다를 집어삼킬 때까지 3시간이나 마냥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해넘이는 자릿값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동일하게 아름다웠다.
탄중아루 해변의 석양은 거대한 불덩어리 같았다.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아름다움의 강력한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갑자기 소리가 멈추고 붉은 침묵의 세계가 펼쳐지는 듯했다. 파도는 너무나 잔잔한데 하늘, 구름, 수평선, 바닷물은 서로 엉켜서 경계가 사라지고 해넘이 때 말하는 붉다는 단어는 노랑, 주황, 빨강 심지어 보라색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황홀한 순간,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엑스터시의 순간이다. 엑스터시는 ecstasy는 밖에 ex 서 있다 stasy라는 뜻이라고 한다. 내가 나라는 존재 안에서 나와서 붉은 하늘이라는 무한 속으로 빠져드는 몰입감이 밀려왔다. 사진에 담기에는 너무 큰 장면이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기쁨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내 몸이 이해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 뜨거운 공기와 색채 속에서 천지 만물의 창조자로서 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구나 탄성을 질렀다. 오키나와의 추라우미 수족관에서 만난 고래 상어의 느린 헤엄이 압도적 침묵으로 우리를 이끌었던 것처럼 불타는 저녁노을 역시 무한의 감각과 신비로움을 느끼게 했다. 이런 순간마다 독일 신학자 루돌프 오토가 누미노제 numinose 라는 단어를 왜 만들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멋지다, 아름답다라는 일상적 단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해서 그랬으리라.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하고 거룩한 매혹이었다. 거룩함의 흔적과 신비로움은 나를 더 이상 걱정에 시달리지 않게 하고, 내 앞의 미지의 시간이 나를 위협하지 않도록 나를 지지해 주는 것 같았다. 질병과 죽음이라는 인간적 한계와 살아가면서 나와 내 이웃이 겪어야 하는 빈곤 야만 그리고 전쟁과 같은 추악함에 압도되지 않고 살아갈 근원에 도달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신을 이해하기보다 신을 체험하는 이런 순간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데, 대도시보다 자연으로 특히 바다로 간다. 도시의 화려함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바다의 장엄함은 인간의 노력 없이 그냥 주어진다. 값없이 거저 받는, 그것도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떨어지는 해는 신이 자연을 통해 이기심에 불타는 인간에게 주는 황송한 선물이다.
코타키나발루에서는 자연의 선물이 해넘이 말고도 또 있다. 해산물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야시장 같은 레스토랑들이다. 우리는 KK 가든 시푸드 레스토랑이라는 곳을 검색해서 찾아갔는데, 아직도 눈에 석양의 붉은 기운이 남아 있어 그런지 붉은 의자,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 원형 테이블와 붉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식당 이름에 가든이라는 말이 들어갔지만 가든은 아니고, 활어해산물 식당이어서 어항에 들어있는 바다의 먹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 고기를 잡는 인간의 노력이 들어있지만 바다가 인간에게 준 선물이었다.
찐 새우, 부드러운 작은 게 버터구이, 흰살생선 튀김요리, 모닝글로리 야채와 볶음밥을 시키고 맥주도 한 병 마셨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어항에 있는 신기한 물고기들과 엄청나게 큰 랍스터, 게, 새우들을 구경했다. 킹프론은 정말 30cm는 되어 보였다. 다음에 여기 다시 오면 저 녀석을 먹어야겠다 싶었다. 어항에서 방금 꺼내온 살아있는 해산물이지만 착한 가격이어서 우리 세 식구가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특히 소프트 쉘 크랩 soft shell crab이 뭔가 궁금했는데 그냥 작은 게였다. 작으니까 껍질이 부드러워서 버터의 향과 어울려 맛이 좋았다. 껍질까지 다 먹어버리는 게요리였다.
손으로 새우 껍질을 까는데 어디선가 음악 소리와 북소리가 들렸다. 식당 중간에 작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어린 남자아이와 젊은 청년이 민속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전통 무용 구경도 할 수 있었다. 춤추고 음료를 마시고 바다에서 수확한 음식을 먹는 것은 저 전통춤이 만들어졌을 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지 않을까? 가족과 함께 붉고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테이블마다 가득했고 우리도 그 사람들 중에 한 가족이었다.
바닷가에서 석양을 볼 때 내 영혼이 잠시 내 밖으로 나가 그 붉은 노을에 빠져 있었다면 식당에 와서 새우, 게, 생선요리를 먹으면서는 다시 제집으로 들어왔다. 붉은 새우 껍질은 석양의 잔상처럼 접시에 켜켜이 쌓아 올라갔다. 거룩함과 일상은 이렇게 지척에서 서로 맞닿아 있었다. 신은 바다와 하늘과 그리고 식탁에까지 우리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맛있고 잊을 수 없는 코타키나발루의 소박한 야시장에서의 저녁 만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