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라우미 수족관에서 신비 체험
남편 : 애구구, 이번 여행 내내 비소식에 흐림이구만.
나 : 에머럴드 바다는 언제 보나...
남편 :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오니 수족관에 가요.
나 : 바다 위가 아니라 바다 아래로 고고!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려 우리는 수족관으로 향했다. 여행 내내 날씨가 안 좋다는 우울한 소식에 일기예보가 틀리기를 바라며 숙소인 차탄에서 약 1시간 30분을 차로 달렸다. 도착하니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가득했다. 주차장에서 우산을 쓰고 아버지 휠체어를 밀면서 둘러보니 건물까지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졌지만, 비가 오는 관계로 서둘러 매표소로 가서 표를 끊고 인파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두운 조명의 수족관에서 처음으로 만난 물고기들은 작은 열대어들이었다. 유리를 통해 보이는 저 작은 미물들이 나를 향해 오다가 휘리릭 방향을 바꿔 옆으로 돌 때 이 물고기들에게 표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눈빛이 다 달랐다. 눈은 크고 작고 또 색도 검은색에서 초록과 파랑으로 다양했다. 서양인들의 색이 강한 홍채를 보는 것처럼 물고기의 몸의 색만큼이나 눈의 색도 다양했다. 슬퍼 보이는 또는 신나 보이는 눈을 가진 물고기들은 산호초와 해초 사이를 무심히 헤엄치고 있었다. 서로 전혀 다르게 생긴 녀석들이 산호초와 함께 온갖 색을 내뿜으며 서로 부딪치지 않고 유유히 노닐고 있었다.
애니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 나오는 니모와 똑같이 생긴 열대어 모양의 자석이랑 또 다른 몇 개의 열대어 자석을 20년도 넘게 냉장고에 붙여 놓았는데, 그 열대어들과 똑같이 생긴 물고기들이 내 앞에서 동영상을 펼치고 있었다. 작은 산호초 속에 숨었다가 다시 하얀 모래 위로 나타난 니모 친구들이 형형색색의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쓰윽 내 시야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타나 그윽한 눈매로 나를 보았다. 조금만 결이 달라도 선을 긋고 미워하고 오해하고 싸우고 상처 주는 인간들에 비해 얼마나 우아한가. 바닷속의 생명체들을 보면 생명이 저절로 진화한 게 아니라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넘어 바로 저기 내 눈앞에 신이 계시구나 하는 신의 현존을 느끼게 된다.
그 우연한 몸과 움직임 그리고 그 평화로운 눈빛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가슴이 많이 떨려 왔다. 이러한 광경을 보기 위해 물에 몸을 던져 스노클링을 할 수도 있지만, 스노클링은 내 몸을 가누고 입에 문 호스로 숨을 쉬느라, 손에 쥔 빵 부수어 물에 던지느라 주느라 정신이 없다. 이렇게 편안하게 공기 속에서 숨을 쉬면서 바닷속에 들어온 느낌을 가질 수 있으니 다시는 스노클링은 하지 말아야겠구나 싶었다. 해양 엑티비티에서 관상으로 넘어가는 나이가 되었는데 왠지 슬프지는 않다.
니모와 그의 친구들에 넋이 나가 있다가 드디어 추라우미 수족관의 최대 하이라이트인 고래 상어가 있는 방에 도착했다. 오종종한 열대어들과 심해어들을 볼 때와 전혀 다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전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수족관 유리에 붙어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개미만 하게 작게 보이는 이 어마어마한 대형 수조에 들어있는 고래상어는 아주 천천히 관람객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서 춤추고 있는 만타 가오리가 평범한 작은 가오리처럼 보이게 만드는 엄청난 크기의 생명체였다.
우주의 놀랍고도 합리적인 질서는 작은 풀 한 포기에서부터 또 이렇게 큰 고래까지 여러 조건과 필연이 모여 생겨나는 신비로운 일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생명이 태어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감탄이 나왔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일상이 모두 상호 최적의 상태로 조율된 ‘연결’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다시금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지구에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촘촘하고 기묘한 연결과 공존을 개미가 인터넷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이 살아 움직이는 고래상어와 그 친구 물고기들이 만드는 화려하고 장엄한 음악에 입을 벌리고 멈추어 섰다. 합창이라고 해야 하나 교향곡이라 해야 하나. 문득 떠오른 건 음악의 성인이라고 하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2악장에 금관 악기의 당당한 소리였다. 빰빰빰 빰!
이런 느낌은 종교적인 신비체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기석 성공회 신부님도 <종의 기원 vs 신의 기원>에서 청소년 시절에 옥상에 올라가 별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눈을 감고 감전된 것 같은 느낌과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그냥 예쁜 별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별의 빛줄기가 우주 공간을 잇는 거미줄이나 실타래처럼 이어져 눈동자에 연결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주와 내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상호연결성의 체험을 신부님은 별을 통해 느꼈다면 나는 고래상어와 만타가오리를 통해 느꼈다. 수족관은 이 상어가 있는 방을 극장처럼 꾸며 놓았다. 너무 가까이서는 느낄 수 없는 크기여서 경사면이 있는 관중석 위쪽에 앉으니 내 망막에 편안하게 고래상어가 닿을 수 있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오키나와에 올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한참이나 대형 수조를 바라보았다. 흰 수염을 바람에 가르는 신선처럼 유유자적하는 생명체 밑에서 사진 찍는 저 오종종한 사람들은 다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지닌 사람들일 것이다. 사랑하느라 애쓰다 사람에게 상처받거나 계획한 일에 실패해서 실망할 때, 마음에 담을 쌓고 혼자가 되는 자발적 고립을 택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이든 자신의 껍질 속에 있는 것은 눈 앞에 펼쳐진 이 멋진 생명을 보여주는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수족관에서 본 아름다운 물고기들과 세상에서 제일 큰 물고기인 고래상어는 신에 대한 외경심뿐 아니라 겸손이나 평화라는 단어도 떠올리게 했다. 스트레스와 불안, 원망과 시기 이런 쪼잔한 인생의 찌꺼기들을 덜어내는 시간이었다.
수족관 밖으로 나오니 보너스가 많이 더 있었다. 돌고래들의 쇼도 보았고 바다 거북이들이 모여 있는 큰 수조도 관람할 수 있었다. 거북이들의 얼굴에서도 표정을 보고 나서, 관내에 있는 뷔페식당에 가서 바다를 보면서 합리적인 가격에 건강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커피까지 마시고 만족한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또 보너스를 주셨다. 작은 아이스크림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셨다. 디저트로 드신 아이스크림이 맛있는데 내가 못 먹은 것이 아쉬워서 가지고 나오셨다. 아버지의 애틋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모이고 모여 저 큰 바다와 하늘,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푸른 별 지구를 지탱시킨다. <코스모스>의 서문에 아내에게 바친 칼 세이건의 헌사를 작년 캘리그라피 전시회 때 썼는데 그 글귀가 다시 생각났다.
’이 광대한 우주 무한한 시간 속에서 당신과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