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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로 걷기 May 01. 2024

상견례와 4만 원짜리 양복

100만 원짜리처럼

11월에 큰아들 혼사를 앞두고 지난 주말 상견례를 했다. 양가 부모가 처음 만나는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인지라 정장을 입는 게 예법에 맞기에 상견례 전 옷장에 있는 양복들을 이것저것 입어보았는데 마음에 드는 마땅한 것이 없었다.


작년에 34여 년 직장 생활을 은퇴하며 그동안 입었던 오래된 양복들은 대부분 버리고 몇 벌을 남겨 두었는데 그마저도 왠지 모두 구식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결혼식 때도 입을 정장이 필요하니 이번 기회에 양복을 하나 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집사람 옷도 한 벌 살 겸 날을 잡아 청주 외곽에 있는 의류 전문 브랜드 L사의 아웃렛을 들렀다. 이월 상품을 주로 취급하는 곳이라 다양한 제품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낫겠다 생각하며 나가기 전 큰 기대 없이 1층 남성 용품 매장에 들렀다.


그곳 역시 제품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쪽 편에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양복들이 몇 개 있었다. 제품을 살펴보는데 판매원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허리 사이즈가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31인치라고 했더니 여기 있는 양복들은 그 사이즈만 있는 제품들이라고 했다. 


가격표를 보니 상하의 한 벌이 4만 원에 불과한데 최초 가격은 무려 135만 원이었다. 몇 년 전 생산된 이월 상품인 데다가 사이즈가 31인치만 남아 어쩔 수 없이 저렴하게 팔고 있다고 판매원이 묻지도 않는데 설명을 했다. 


만져보니 원단도 좋고 입어보니 디자인도 마음에 들어 8만 원에 두벌을 구입하였다. 50만 원 넘게 예산을 잡았는데 요즘 아이들 말로 득템을 한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동안 몸매 관리를 열심히 해온 덕을 이런 데서 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몇몇 지인들에게 양복 이야기를 하니 혼례에 입을 옷으로 4만 원짜리는 좀 적절치 않느냐 한다. 웃으며 “백화점에 파는 100만 원이 넘는 제품과 비교해 차이도 없고, 결혼식에 누가 입었는지도 모를 양복을 20만 원 넘게 주고 대여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말했다. 


혼사를 위해 가격이 있는 양복을 구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닌데 몇 번 입지도 않을 것이고, 품질 등에 차이도 없는 옷을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하느니 차라리 그 돈을 아이 결혼비용에 보태주는 게 훨씬 현명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이들이 다 떠난 큰 평수의 집에 사는 것도, 부부만 이용하는데 큰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 등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실제 은퇴 후 평수가 작은 집으로 옮기는 걸 고민 중이고, 15년 된 차를 양도하고 신차를 살 때 다른 것보다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었다.


반면, 지인 한 분은 은퇴 직전 선호하는 지역의 큰 평수 아파트를 분양받고 주택자금 부담 때문에 시간이 많아도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못하며 지내고 있다. 그럼에도 좋은 동네와 큰 평수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익숙함과 편리함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한다.


사람마다 생각과 사는 방식이 다르기에 정답은 없다. 하물며 나조차도 젊은 시절에 가졌던 생각과 지금이 다를 진 데 다른 사람들 생각과 사는 방식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재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저 다름을 인정하고 행복이라는 본질에 충실하면 될 것이다. 


나의 경우,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에 도드라지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다 보니 남들을 의식해 외형이나 형식에 얽매였던 적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형식보다는 실질을 점점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비록 4만 원짜리 양복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지만, 무언가 내가 내린 결정이나 판단, 그리고 사는 방식이 사회규범과 예절에 벗어나지 않고, 누군가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면 외형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질적인 걸 추구하는 게 슬기로운 삶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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