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어른이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이야기
그럭저럭 다룰 수 있는 악기는 어렸을 때부터 배운 피아노가 유일하다. 메탈에 빠지면서 일렉트릭 기타가 배우고 싶어 대학생 때 음악하는 학교 선배를 졸라 낙원상가에 가서 기타도 사 왔지만 왼손에 굳은살이 생기기도 전에 흐지부지 되고야 말았다. 그때 산 기타는 몇 년 후 사촌동생에게 가게 되었고 그 동생은 지금 전문적으로 음악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불어본다는 리코더도 있었지만 시험 준비를 위해 연주했을 뿐 딱히 리코더에 정을 주진 않았다. 피아노는 좋은 악기지만 휴대가 불가능하고 곡 하나를 통째로 외우지 못해 악보가 없으면 칠 수가 없는 등 아쉬운 점이 있었고, 다른 악기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하여 피아노와는 속성이 전혀 다른 플루트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큰 마음을 먹자마자 코로나로 전 세계가 혼란스러워졌고 자연스럽게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마스크를 쓰고 플루트 레슨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1년 여의 시간이 흐르고 코로나도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어갈 무렵,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좋은 타이밍을 마냥 기다리다간 할머니가 되어서도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일단 바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자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숨0 앱에서 집과 회사 근처에서 1:1로 레슨을 해주실 선생님을 구했고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메신저로 대화를 하여 연습용 교재와 입문용 플루트 정보를 받아 인터넷으로 구매하였다. 야마하 입문용 플루트이지만 그래도 몇십만 원 상당의 악기라 악기 값만은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 의지로 가득 타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플루트를 들고 레슨을 받으러 갔다.
첫날은 플루트 잡는 자세와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첫날부터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을 불어넣는 건 단순하게 리코더 부는 정도를 예상하고 왔는데 일단 바람을 불어넣기 전부터 고난이 시작되었다. 연주 자세를 잡고 플루트를 입에 대는 것부터가 너무 어려웠다. 몸이 향하는 방향과 플루트를 부는 얼굴 방향이 일직선이 아니었던 것이다. 몸과 얼굴을 틀어야 하고 결과적으로 양 팔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악기를 들어야 했다. 악기가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게 좋은 위치를 유지하려고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썼더니 팔과 어깨가 아파왔다. 평생 1시간씩이나 팔을 어깨 높이로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리는 더더욱 처참했다. 플루트는 악기를 입술로 물어 고정시키는 악기가 아니다. 입술 위에 대어 올리고 입술과 가까이에 있는 구멍에 바람을 잘 조준하여 넣어야 했다. 바람 자체도 호흡하는 법을 모르니 무작정 불어넣다 곧 하늘에 별이 보일 지경이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 이전에, 걷지도 달리지도 않는 몸이 제자리에서 삐그덕 거리는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다행히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나아지게 되었다.
저음부터 시작하여 점차 높은음을 배우고 그럭저럭 아주 짧은 연습곡은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피아노를 친 경험으로 악보 읽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기에 그나마 시간을 절약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호흡은 짧아 한 마디를 이어서 부드럽게 연주하기가 힘들었고, 2옥타브 솔 이상의 고음은 예쁜 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텅잉까지 가게 되면 내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혀를 원망하게 된다. 말을 할 때도 의식적으로 혀의 움직임을 신경 쓰는 일이 없는데 생전 처음 혀의 위치와 모양을 신경 쓰게 되니 잘 될 리가 없다. 물 흐르듯 유려하며 빠르게 흘러가야 하는 멜로디는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엉뚱한 소리가 나기 일쑤였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연습이 힘들고 연주 자체가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 되었다. 플루트가 나랑은 맞지 않는 걸까? 어떤 악기인지 맛은 보았으니 여기서 그만둘까?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처음 시작할 때 결심한 게 하나 있었다.
"나는 직장인이다. 그리고 나이도 많다. 이제 뭘 새로 배우든 어릴 때만큼은 빠르게 습득하고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그러한 페널티를 인정하고 기대 수준을 낮춘다. 설마 몇 달 안 되어서 프로만큼 멋지게 잘 연주하는 걸 바라는 것은 아닐 테지? 나는 서툴고 느리게 배워나가는 학생이다. 욕심내지 말자. 짧은 시간에 높은 수준의 목표를 바라지 말자."
내가 시간이 남아 돌아서 하루에 8시간씩 연습을 할 수도 없거니와, 심지어 야근을 하여 퇴근 시간이 너무 늦거나 업무 스트레스로 지쳐서 귀가하는 날엔 몸이 힘들어 악기를 잡아보지도 못하였다.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히 내 뇌가 명령을 해도 혀와 입술과 손가락이 잘 따라주진 않는다. '무조건 매일매일 연습' 같은 충족할 수 없는 욕심을 버리고 상황을 받아들였다. 대신 피곤에 절은 직장인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악기인데 연주가 형편없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 형편없음을 견디고 계속 연습을 하면 된다. 일주일에 단 2일을 연습하더라도 연습하는 동안에는 최대한 집중해서 연주를 했다.
처음 불기 시작하여 한 달 정도 후 어느 정도 각 음에 알맞은 소리는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울림이 없는 답답한 소리였다. 그러길 몇 달, 언젠가부터 그럭저럭 플루트의 소리가 나게 되었다. 레슨 때 선생님이 알려주셨던 것들, 당시에는 끄덕끄덕하며 머리로만 외우려고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직접 연습을 하면서 이것이었구나, 이해를 할 수 있었다. 1,2옥타브 음을 사용하여 쉽게 편곡된 유명한 곡들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피아노로 치면 하농을 기계적으로 치듯 악보를 100% 표현해내지 못하는 연주였고, 고음은 여전히 장벽이 되어 좋지 못한 소리를 내었다. 여기가 2차 정체기였던 것 같다. 회사 일이 바쁠 때면 2주 동안 악기를 잡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악기를 꺼내서 잠깐이라도 불어보았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면서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가 좋아졌다.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은 이상한 바람소리가 나거나 삑삑거리는 소리 때문에 이웃에 폐가 될까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소리의 울림이 커져서 소리 크기 때문에 폐가 될까 걱정이다.
시간-실력 그래프는 내가 희망했던 고정된 기울기를 갖고 꾸준히 올라가는 직선이 아니었다. 너비만 길고 높이는 낮은 그런 계단들이 모인 계단식 그래프였다. 그래도 가끔 중간에 높은 계단이 한 칸씩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도 여전히 긴 프레이즈를 자연스럽게 연주하는 것은 힘들다. 예전보다 훨씬 좋아지긴 했으나 2, 3옥타브의 고음을 내는 것은 어렵다. 그래도 악보가 의도하는 대로 감정을 담아 좋은 소리로 연주하는 것은 가능해졌다. 처음 교재를 샀을 때 언젠가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영화음악 악보를 이제는 그럭저럭 힘들이지 않고 연주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의 시간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피아노는 건반을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는데 플루트는 바람을 불어넣으며 스트레스를 푼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연주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플루트 연습 자체가 회사 업무나 다른 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기도 한다.
피아노를 칠 때도 그랬지만 나는 하나의 곡을 완성시키겠다는 의지로 그 곡만 주야장천 연습한 적은 거의 없다. 차라리 완성도는 떨어지더라도 여러 개의 곡이 담긴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연주하는 편이다. 그게 훨씬 더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아서다. 플루트도 마찬가지였다. 소곡집에서 좋아하는 곡들을 골라 한 번씩만 연주해도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재미를 붙이기 전까지는 이 방법으로 연주를 하곤 했는데, 어느 정도 실력이 늘었다 싶으면 하나의 곡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연습해 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당연히 내가 듣기 좋아하는 곡이면서 적당히 어려워서 도전 의식도 생기는 곡.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연주한다고 생각하고 집중하여 하나의 곡에 몰입하여 완성을 시킨다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플루트의 최대 장점, 휴대가 간편한 점이 빛을 발한다. 배운 지 몇 달 되지 않아 삑삑거리는 시점에서도 나는 짧고 쉬운 생일 축하 곡을 연습해 엄마 생신 때 연주를 해드렸다.
그리고 당연한 것이지만 플루트 연주를 많이 들어보아도 도움이 된다. 나는 플루티스트를 보고 플루트를 시작한 게 아니어서 아는 플루트 연주자도 없었다. 그래도 플루트 독주회 정보가 있으면 직접 공연장에 찾아가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자세나 호흡법, 악상 표현법 등을 눈으로 직접 보고 배우는데 좋았다. 물론 연주를 듣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다.
처음 2달 정도는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 받으러 갔었다. 그러다 너무 나아지는 것이 없으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연습을 하여 어느 정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다 생각이 들 때 레슨 일정을 정했다. 1주일 만에 갈 때도 있었고 길면 3주 만에 갈 때도 있었다. 대신 연습하면서 막혔던 부분, 잘 모르겠는 부분들을 정리하여 꼭 물어보고 해답을 찾았다. 요즘은 특히 유튜브에도 잘 정리된 강의 영상이 많아서 이것으로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나의 연주 원리와 팁에 대해 여러 선생님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여 주시기 때문에 비교해 가며 연습에 적용해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플루트 잘 불고 있냐고 물어보신다면, 그러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아무 문제없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진 않는다. 세 달 전에 왼쪽 어깨를 다치는 바람에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재활 운동을 해야만 했다. 당연히 병원에선 어깨를 사용하는 작업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셨고 나는 한동안 연습을 쉬고 있다. 그렇다고 플루트를 버린 건 아니다. 여전히 플루트 연주곡을 듣고 있고, 좋아하는 곡은 악보를 구해보기도 하며, 복식 호흡을 연습해보기도 한다. 통증이 많이 나아진 지금 조만간 다시 연습을 시작할까 생각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악기를 손에서 놨어도 잡을 수 있을 때 다시 잡으면 된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하고 또 나를 가장 기쁘게 만드는 연습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