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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일없이사는사람 Jan 13. 2024

엄마가 아팠다 (3/3)

엄마가 아파서 가족 모두 힘들었지만 잘 버티고 엄마도 나아지셨다는 이야기



예상하지 못한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이 결정되고 난 후 세 개의 산이 보였다.


    첫 번째, 수술이 문제없이 잘 끝난다.

    두 번째, 수술 후 합병증이나 후유증 없이 잘 회복한다.

    세 번째, 패혈증의 원인이었던 균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엄마도 이해는 하셨지만 당연히 마음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 간단한 시술도 아니고 5시간 정도 시간이 걸리는 수술이니 당사자인 엄마도, 나 포함 가족들도 다들 걱정이 말이 아니었다. 나이도 있으신데 전신마취 괜찮을까부터, 가뜩이나 면역력과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수술 후 회복에는 문제가 없을까 등등. 이런저런 고민거리는 생각할수록 더 생겨나고 있었다. 


수술 없이 퇴원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최초의 기대가 무너져 낙심한 엄마를 위로하는 게 우선이었다. 앞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더 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지금 미리 짧게 고생하는 거라고 반복적으로 말씀드렸다.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엄마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한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나는 엄마가 교회에 끌고 가기 실패한 무교인 딸이다. 기독교 신자인 엄마를 위해 엄마의 하나님에게 기도하겠다고 했더니 정말 좋아하셨다. 다행히 그동안 꾸준히 해온 재활 훈련이 효과가 있었는지 엄마는 수술실에 침대에 누워서가 아닌 두 발로 걸어 들어가셨다.  


수술이 시작되고 나서 병원에 도착한 나는 아빠, 고모, 올케와 함께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중간에 점심을 먹고 오기도 했다. 그리고 수술이 끝났으리라 예상되는 바로 그 시간 즈음 000 환자의 보호자를 찾는 안내가 들렸다. 이때의 두근거리는 마음은 뭐라 표현하질 못하겠다. 수술이 끝난 엄마의 얼굴을 보고 의사로부터 결과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보호자 한 명뿐이라 아빠가 수술실 쪽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한 15분쯤 후 나오셨다. 수술은 성공적. 집도의도 별 다른 말 없이 잘 끝났다고만 하셨다고 했다. 수술이 잘 되면 의사의 말이 짧고 문제가 있을 경우 오히려 더 길어진다고 하니 ‘잘 되었다’는 말을 믿고 이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커다란 관을 꼽고 자는 듯 누워있는 엄마 사진까지 찍어 오신 아빠가 더 강심장이라고 해야 할지. 사진상으로 엄마는 TV에서나 보는 중환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혈색은 나빠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장치를 달고 눈을 감고 있는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저 곧 큰 문제없이 의식을 회복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수술 후 짧게는 하루, 길게는 3일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일반 병실로 이동하게 된다. 중환자실로의 면회는 아빠가 가셨다. 엄마는 일어나서 아빠를 알아보고 얘기도 나누셨지만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잘 기억이 안 난다고 했지만 아빠에게 ‘앞으로 혼자 잘 살아야 한다’ 고 했다고 한다. � 섬망 증세로 밤새 소리를 지르거나 의료진의 팔을 붙잡기도 하셨다고 들었다. 나중에 엄마 말로는 중환자 실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엄마를 해치러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고 했다. 중환자실 천장에는 꿈틀거리는 이상한 벌레들이 보여 그것들과 밤새 싸우느라 힘들었다고도 했다. 이것에 대해 나는 엄마의 비문증이 일으킨 과대 망상이 아닌가 추측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출입문 밖 멀리서 바라본 것이 다지만 아무래도 중환자실이 주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환자를 더 힘들게 하는 것 같다. 기계소리도 시끄럽고, 다른 환자들이 내는 소리도 있고, 바쁘게 움직이는 의료인들도 그렇고. 집중 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환경이긴 하지만 조용히 안정을 취하기가 쉽지 않은 곳임은 확실했다.


엄마는 중환자실에서 이틀밤을 보내고 일반 병실로 이동했다. 원래는 수술 후 상태도 좋고 환자의 심적 안정을 위해 하루만 있다 나오기로 했지만 항생제 내성균이 발견되는 바람에 하루를 더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균의 타 환자 감염 우려 때문에 6인실이 아닌 1인실로 이동하게 되었다. 환자의 요구로 1인실을 사용할 경우 1박에 4-50만 원에 가까운 큰 금액을 지불해야 하지만, 이처럼 치료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병원 측에서 이동을 결정한 경우는 다행히 의료보험 지원이 된다고 했다. 환자의 안정을 위해 가능하면 가족이 하루라도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병원 측 의견에 다들 찬성하여 내가 다시 간병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앞서 해본 경험도 있고 엄마를 직접 보고 싶었기에 빠르게 짐을 싸서 병원으로 들어갔다.


일반실로 이동하는 날, 중환자실에서 나오는 엄마를 픽업해서 같이 병실로 갔다. 미리 연락을 받고 일반병동의 간호사 분들 여럿이서 병실을 세팅해 주시고 엄마가 병실 침대로 옮겨진 후에 필요한 여러 조치들을 취해주셨다. 이전에도 느낀 거지만 정말 간호사분들은 대단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매일 아픈 환자들 상대해야 하고 일상에서 보기 힘든 징그럽고 비위상하는 것들을 매일 봐야 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거 같다. 병원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내가 멋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기보다는 번거롭더라도 꼭 간호사분들에게 물어봐서 확인받았다. 그 외에도 환자 요청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부탁하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어찌나 친절하게 답해주시고 도와주시던지. 그게 그분들의 일이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간호사분들 덕분에 많이 도움받고 엄마 간병을 할 수 있었기에 정말 고마웠다. 


아무튼, 엄마는 초췌해 보이고 말이 조금 더딘 느낌이긴 했으나 바로 이틀 전에 큰 수술을 한 환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력이 좋아 보였다.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고열에 시달리던 때보다 훨씬 더 좋아 보였다! 몸을 가로지르는 수술 봉합 자국이라던가 배에 연결된 호스라던가 서너 개가 한꺼번에 연결된 링거를 보며 앞으로 또 한동안 고생을 해야겠구나 싶어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수술이 잘 끝났고 엄마가 그 큰 일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세 개의 산 중에 하나는 넘은 것이니 정말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다. 


1인실은 비싼 만큼 좋았다. 방도 넓고 TV도 있고 냉장고도 크고 거대한 통창을 홀로 사용할 수 있다. 6인실에서 사방으로 커튼만 보이던 곳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창 밖으로 병원 주변의 전경이나 푸른 하늘이 잘 보여서 바깥 풍경만 바라봐도 기운 차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병실 안에 화장실이 달려 있으니 환자에게도 간병인에게도 편하다. 다른 환자와 간병인들로 인해 시끄럽지 않으니 편히 쉬기도 좋다. 방 안 공간이 넓으니 복도로 나가지 않더라도 방 안에서 걷기 운동이 가능하다.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고 나면 심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수술 후 회복을 위해서라면 비싼 돈 내고라도 올만하다 싶었다. 그리고 나도 1인실 정도만 되어도 병원에서 한 두 달은 풀로 간병 가능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엄마에게는 저렴한 가격으로 호캉스 온 셈 치고 잘 회복해 나가자고 했다. 


중환자실에서는 자다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손을 침대에 고정해놓기도 했다고 들어서 걱정을 했으나 일반실로 옮긴 첫날 밤 엄마는 몇 번의 잠꼬대 외에는 평온하게 주무셨다. 수술 부위도 그렇고 몸에 달려있는 줄이 많아서 혹시라도 몸을 움직이다 잘못될까 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엄마는 뒤척이지 않고 정자세로 잘 누워계셨다. 잠꼬대가 들리면 달려가서 손을 잡아주었다. 엄마가 눈을 뜨면 꿈을 꾼 거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시 주무시라고 말씀드렸는데 다행히 이게 효과가 있었는지 곧 다시 잠드시곤 했다.  


병원에서의 생활은 똑같이 돌아간다. 아침 일찍 여러 검사를 위해 이동하고, 몸무게, 혈압, 체온 등 기본적인 상태를 체크하고, 정해진 시간마다 링거를 맞고, 약을 먹고, 담당의 회진 시간이 돌아오면 대기했다가 궁금해서 정리해 놓았던 것을 질문한다. 아침부터 점심 전까지가 제일 바쁘다. 물론 점심시간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정해진 일과를 하기 위해 누군가가 병실을 방문하곤 하지만 중간중간 텀이 있어 긴장을 풀고 쉴 수 있다.


기침과 가래가 여전하긴 하지만 그래도 일반실로 이동한 지 이틀 만에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안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엄마와 2박 3일을 보내고 다시 간병인과 교대했는데 그날 엄마는 소변줄을 빼고 직접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졌다. 수술 전 봐주시던 간병인 분과 얘기가 되어 다시 같은 분을 불러올 수 있었다. 엄마랑은 이미 언니 동생 하면서 친해진 것 같다. 비록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난 인연이고 앞으로 그 인연이 계속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엄마가 편하게 마음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드디어 병원에서 탈출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엄마는 2023년의 마지막 날 일요일에 퇴원하셨다. 처음에 병원에 갈 때는 빠르면 1주일, 늦어도 2주일 안에 퇴원하겠지 생각하던 것이 한 주씩 추가되었다. 한 달 째에는 정말 퇴원할 수 있겠지 생각하던 것이 수치가 너무 안 좋아져서 다시 무기한 미뤄졌다. 그러다 몇 번에 걸친 심장 정밀 검사를 통해 심장 수술을 하기로 결정되었고 입원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날 수술이 있고 그 이후로도 일주일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 


그동안 다른 환자들이 엄마보다 더 빠르게 퇴원하는 것을 볼 때마다 엄마가 많이 속상해하셨던 것 같다. 6인실의 다른 5개 병상의 주인이 바뀌는 동안 엄마는 계속 한 곳을 지켜야만 했으니. 농담으로 엄마가 방장해도 되겠다고 했는데 유머가 잘 먹히진 않은 것 같다. 자꾸 퇴원이 미뤄질 때마다 엄마가 낙심하는 것이 보였고, 매번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것보다는 아예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었다. 그래서 엄마에게도 가능하면 올해 안에, 안되더라도 내년 1월 안에는 퇴원 가능하지 않겠냐, 이런 식으로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위로해 드리긴 했었다. 나도 사실 1월 첫 주는 지나야 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해를 넘기지 않고 퇴원하게 되어 기뻤다. 


물론 여전히 문젯거리는 남아 있다. 수술 후 처치를 위해 혈액 관련 약인 와파린을 몇 달간 복용해야 하고 그 외에도 다른 약봉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후유증이 생기지 않도록 폐 운동도 꾸준히 해줘야 한다. 그동안 병원에서 몸을 많이 움직이지 못한 터라 일상생활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재활도 해야 한다. 우선은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천천히 걷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겠지만. 


수술 자체야 잘 되었다고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것이 아닌 인공적인 장기를 몸에 넣었으니 그것이 과연 앞으로 기대 수명만큼 잘 동작할까 의심이 되기도 하고… 만에 하나 이상 동작을 하면 어쩌나 하는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상상해 보고 걱정을 하기도 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걱정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지금은 수술이 잘 끝나고 몸도 새로운 장기 파츠에 적응 잘해서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미래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보다는 현재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종종 잔소리를 하고 있다. 


엄마도 사람인지라 딸이 하는 잔소리는 듣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피가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의 얘기는 그렇게 잘 들으면서 왜 제일 가까운 가족이 하는 얘기는 잘 듣지 않으려 하는 걸까. 늘 갖고 있는 의문이었지만, 이건 다른 지인 분이 해주신 얘기, “우리들도 부모님 말씀 잘 안 듣잖아요. 원래 가족이 하는 얘기는 귀에 잘 안 들리나 봐요.”를 듣고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앞으로는 귀에 잘 안들리더라도 반복해서 계속 말하는 수밖에 없다. 아예 대놓고 얘기했다. 내가 어릴 때 엄마가 했던 잔소리, 이제 내가 돌려주는 거라고. ‘복수’는 아니다. � 엄마도 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했었던 말이었고, 나도 엄마가 앞으로 더 건강하고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얘기라고.  


이번에 가장 아쉬웠던 것은 평소에 부모님과 따로 사니 연락을 좀 더 자주 했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원체 부모님들도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자식들이 걱정할까 봐 먼저 얘기 안 하셨을 수도 있지만. 넘어진 날부터 점점 상태가 안 좋아졌을 때 왜 내게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왜 먼저 안부를 묻는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하루라도 더 빨리 큰 병원에 갔더라면 고생을 조금 덜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다.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해 봐야 무엇하겠는가. 이제 알았으니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연락해서 물어보고 엄마 아빠가 먼저 얘기하시게끔 해야겠다. 


이렇게 엄마도 집으로 돌아오고 집에 혼자 계시던 아빠도 마음의 안정을 찾으신 것 같다. 그리고 남은 것은 병원비. 실비보험이나 기타 질병보험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아플 일이 없을 줄 알고 그동안 가입했던 것들 다 정리했다고 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우리에겐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민건강보험이 있다. 심장 수술비가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는데 실제 환자 부담 금액이 생각보다 적게 나왔다. 간병비가 보험 없이 그대로 현금으로 지출되는 거라 그 부분이 좀 셌고, 병원비 자체는 우려했던 것보다는 적게 나왔다고 아빠가 말씀하셨다. 집을 팔아서라도 엄마 병 싹 낫게 해 주겠다고 소리치셨었는데 다행히 집은 안 팔아도 될 것 같다. 





TV나 영화에 나오는 병실의 분위기는 처연하면서도 낭만적이다. 하얀 침구와 하얀 커튼, 그리고 창 밖으로 보이는 푸른 잎사귀들.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경험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주의이기 때문에 살면서 한 번쯤은 입원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입원은 안 해도 좋은 경험이다.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도. 아프지 않고 건강해서 병원에 갈 일이 없는 삶이 경험적인 면에서도 훨씬 더 풍부하다. 


상상 속의 1인실과 달리 실제 병원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통증에 괴로워하는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 우울하거나 화가 나 있는 간병인들의 말소리, 어딘가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간호사들의 발소리, ‘최악’의 상황이 아님에도 견디기 힘든 것들이 항상 주변에 있다. 배우들처럼 깨끗한 환자복에 반질한 긴 생머리를 늘어트리고 있을 수도 없다. 제대로 씻지 못해 얼굴에는 기름이 흐르고 떡진 머리는 산발하지 않도록 묶어놓는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병원에 가야 한다면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 가능한 빠르게 회복하고 나오는 것이 최선이다. 아픈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가 주는 그 낯선 우울함에 압도되지 말고 다시 밖으로, 일상으로 나가기 위해 재활 훈련하는 곳이라는 생각으로 병원 생활 잘 버티고 이겨냈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안에서도 서로 인사를 나누고 빨리 나으시라며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고, 힘들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간병인이 있고, 말을 듣지 않는 환자도 인내심을 갖고 웃는 얼굴로 보살피는 간호사들이 있다. 힘들지만 다른 사람들을 보며 힘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환자의 의지다. 이번에 나는 엄마가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아빠나 이모 말로는 엄마도 이때까지 이런 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어 크게 놀랐을 거라고 했다. 엄마는 원체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고 겁이 많은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는 나이가 들면서 겁이 많아졌다. 나약해질 때는 한 없이 나약해져서 정말 이러다 몸의 병이 아닌 마음의 병 때문에 상태가 더 악화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어느 순간 살아서 병원을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그다음부터는 죽기 살기로 노력을 많이 하셨다. 그렇게 맛없다던 병원 밥도 꾸역꾸역 억지로라도 다 드셨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시키는 지시도 잘 따랐으며 무엇보다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훈련을 시작하셨다. 무력하게 침대에 누워있던 기간도 있었지만 한 번 마음을 먹은 이후로는 꾸준히 운동을 하셨다.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엄마의 심정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엄마는 담담히 수술 준비를 했고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수술 후에도 더 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로 의욕적으로 재활 운동을 하셨다. 


한 달 반이라는 긴 기간 동안 병원에서 미치지 않고 버텼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다. 나도 스스로를 원망하는 우울한 소리만 하셨던 엄마가 용기를 내서 먼저 몸을 챙기고 이것저것 재활에 필요한 요구를 하게 되었을 때가 제일 기뻤다. 엄마도 이번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이 많다고 한다. 아직은 크게 삶이 달라지진 않았다. 지금은 우선 수술 후 일상으로의 적응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니까. 그래도 이제는 전화를 받으면 활기가 가득한 커다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신다. 그게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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