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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국

바다에서

당신을 생각하며

by 노태헌

지난 19일, 햇살은 여전히 쏟아지고 있고 한낮의 해는 여름의 기세를 품고 있지만 8월 중순이 넘어가는 시기 영국 남동부 바다 온도는 매우 차다. 늦여름 가족 단위로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도 점점 뜸해지고 있다. 아이들과 개들 정도가 그들을 염려하는 어른들의 눈길을 뒤로 한채 여름 파도의 끝을 마지막 물놀이로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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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바다든 땅끝과 맞닿아 있는 모든 바다는 고유한 색을 지닌다. 파도는 규칙적으로 밀려오고 빠져 나간다. 같은 바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바다는 지금이라고 여기는 현재 순간처럼 세상에 단 한번 단 하나의 형태로 존재한다.


아침에 본 바다를 저녁까지 바라본 사람은 안다. 세상의 모든 아침에 해와 함께 바다가 밀려오면 밤까지 단 한번도 바다는 같은 빛깔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주의 탄생과 사라짐의 신비처럼 생동하는 바다의 현재는 과거로 밀려나고 미래로 이어진다.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듯 파도가 해안으로 마지막 힘을 다해 밀려오면 바다의 물결은 마침내 마지막으로 수장되고 어디선가 운명처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공기가 맑고 청명한 영국의 아침, 바다 역시 맑고 차다. 저녁 바다는 태양의 기운을 여전히 담아내기도 하는데 이는 아마 저녁 노을의 붉은 빛이 바다를 마지막으로 데워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국에 도착한 이튿날 새벽 신선한 공기를 느끼며 영국 남동부 해안가(런던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로 차를 몰았다. 70마일을 훌쩍 넘어 달릴 수 있는 M3(고속도로)를 타고 바다에 가까워지면 도로를 벗어나 구부러진 길을 조금 지난다. 이내 도착한 해안가(람스게이트-마게이트 해변)에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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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고 가는 동안 최근 유독 바다를 찾아다니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한다. 대부분 그저 바다가 그곳에 있어 내키는 대로 가기도 했지만 한 때는 특별한 의미를 담아 가기도 했다. 바다에 왜 가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잊어버린 것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소년 시절에 가졌던 청명하고 투명한 그 무언가를, 지금은 숨어버리고 사라지고 있는 소중한 무언가를, 세상의 끝(바다와 육지의 경계)에서 희미하게 불러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개인마다 여러 터닝 포인트가 있고 무엇이든 계기로 삼을 수 있겠지만, 나는 과부하된 감정의 한 부분들이나 스스로 만든 상처 같은 것을 씻어내고 정화할 수 있는 장소(바다)에서 비워내고 싶다. 나아가 그것이 무엇이든 소중한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찾고 싶다. 해안가에서 바람을 맞으며 존재 안에 숨겨진 작고 따뜻한 씨앗을 온기로 싹틔우고 싶다. 그리고 소중하게 발아한 씨앗에 물을 주고 가꾸고 싶은 바람을 가진다.


후회스러운 것을 계속 상념하는 것을 끊어 낸다. 햇살 가득한 자연 앞에서 씻을 것은 씻어내고 비울 것은 비워내는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 예를 들면 햇살, 공기, 자유롭게 걸어다니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사랑하는 사람과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현재라는 상황, 그리고 어떤 것이든 선택하고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힘을 믿고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어떤 행동의 결과가 의도와 일치하지 않아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혜에 대한 기원을 찾고 싶다. 어딘가 있겠지. 소박하지만 개인적인 소망을 꿈꾸기 위해 밀려오는 파도를 맨발로 느끼며 해안가를 걸어본다.


바다에서 여름과 가을 사이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흐름은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지고 재생된다. 차갑거나 뜨거워야 했던 지난 시간에 대한 생각, 이어지는 마음의 파고를 유리병에 넣어 바다 어딘가로 실어나르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이대로 밤이 밀려와 별이 내려 앉기까지 모든 것이 하루에 주어 진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해안가로 밀려와 부딪히는 파도가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생명의 기운을 달과 함께 밀어주고 있음을 느낀다.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파도의 물살을 가르며 주인이 던진 공을 물어오는 개들, 작은 돌과 해초 사이로 게를 잡고 모래성을 쌓으며 무언가를 해 집는 아이들. 그래, 이곳에서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만 킬로미터를 넘게 이동해 왔겠지. 일생에 모든 순간들은 각각의 의미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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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편적 일상의 틈 사이를 기억하기 위해, 혹은 시간을 소유하려는 작은 욕심을 가진 채 사진을 찍는다. 기억하고 싶은 광경, 햇살, 밀려오는 파도 소리 속으로 바다 멀리 보이는 배 안에선 누군가 열심히 육지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일을 하고 있다. 인생에서 박동하고 움직이는 운명의 파고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 바다는 시작하는 장소이자 끝인 장소다. 해안가 한 곳에 앉아 주변을 살펴보니 서서 본 전경과 다르다. 빅뱅으로부터 펼쳐진 우주. 우주 속 세계는 늘 흔적을 남기고 사람들도 늘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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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지나면 태양은 마지막 힘을 발휘한다. 사람들의 살갗에 태양의 문신을 남기기 위해 해는 더 높은 고도로 올라가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파도가 만드는 바람에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특별한 기억의 문신, 흔적,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어떤 지점들이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가능성 그 자체라고 생각해, 오늘 내가 그것을 느끼고 있어"라고 말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 세상의 끝에서 이 모든 것들이 진짜로 이루어 질 것만 같다. 어떤 장소나 어떤 사람에게는 우리에게 신비로운 힘을 낼 수 있는 마법같은 일이 가능하다. 사랑도 그중 하나. 만들어진 세계, 가짜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가 온기로 발현되고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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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마게이트 해변에서 바다를 지키는 남자(청동상)저길은 2차세계 대전때 군수물자를 나르는 철로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저 길 끝에 청동으로 된 남자를 세워놓았다. 그는 무엇인가를 지키고 있는것인가.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것인가.


언젠가 테이블에 앉아 바다의 파도 소리 같은 음악이 들려올 때 이곳을 기억하면 좋겠다. 그때는 말 없이도 소중한 마음 같은 것들이 조금은 전달 될 수 있기를. 부상하는 연민과 연대. 나는 내가 최근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어쩌면 겪지 않아도 되었던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알게 된 것들을 나와 같은 일을 겪거나 겪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주저 앉을 수도 있었겠지만 운 좋게 일어날 수 있었던 방법을 당신에게 알려주길 희망한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돕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당신은 나처럼 고통 받지 않아도 되고 나처럼 힘든 시간의 늪에 빠져 들지 않기를. 그렇게 함으로서 그 무기력한 시간의 공백에 생겨진 어떤 빈틈을 채울 수 있기를. 잘 생각해보면 우주에는 틈이란 건 없는 것이니까. 세상은 어쩌면 내가 만든 머릿속 세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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