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를 우리가 만들었잖아, 우리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좀 더 잘했어야 했지 않았을까?” 넷플릭스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에서 살인을 한 13살 소년의 부모 대사다. 아이를 기르다 보면 아이가 많이 어긋나기도 한다. 그 수준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행동일 경우, 부모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다. 아이의 반사회적 행동은 부모의 탓일까? ‘소년의 시간’은 양육의 죄책감을 짊어지려는 부모들에게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무장한 경찰들이 한 주택의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간다. 집에는 엄마, 아빠, 소년, 소년의 누나가 살고 있다. 경찰들은 가족에게 총을 겨누고 소년의 방까지 들어간다. 소년을 잡아 경찰차에 태운다. 가족은 혼비백산한다.
소년은 구치소에 이송됐고,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조사받는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국선 변호사가 함께한다. 소년은 아버지를 조사하는 과정에 함께할 입회인으로 선택한다. 소년은 살인하지 않았다며 계속해서 주장한다. 경찰은 소년의 같은 학년인 소녀가 살해되기 바로 전에 찍힌 영상을 보여준다. 영상에는 소녀와 소년이 밀치고 때리는 장면이 있었다.
경찰은 소년이 소녀를 죽였다는 강력한 정황 증거인 영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두 가지가 없다. 살인하는 장면과 살인에 사용된 칼이다. 경찰은 칼을 찾고, 다른 증거를 찾기 위해 소년의 학교에 간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칼의 주인을 찾았다. 그리고 소년, 소녀, 아이들이 SNS에서 주고받았던 말의 진실을 알게 된다.
소년은 심리 상담자와 몇 번에 걸쳐 상담을 한다. 상담사는 죽음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소녀는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의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상담 과정에서 소년 안에 있던 치명적인 편견, 살인에 대한 생각이 드러났다.
13개월 후, 가족의 생활이 보여진다. 이웃은 살인자를 키운 가족으로 이들을 본다. 가족은 이러한 시선이 힘들다. 가족 중에 아빠는 극도로 민감해지고, 과잉반응을 보인다. 엄마, 아빠, 누나를 태운 차는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향한다. 아들로부터 전화가 온다. 이날은 아버지의 생일날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아들은 말한다. “내 주장을 바꾸고 싶어” 살인을 부인했지만 인정한다는 말이다. 가족은 태연한 척했지만 전화를 끊고 가족은 오열한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와 아빠는 깊은 슬픔에 잠긴다. 부부는 우리가 이 아이를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을 잘못했을까?를 생각한다. 아빠는 어렸을 적 자신의 아빠에게 모진 매를 맞았어도 이렇게 컸는데, 한 번도 때리지 않은 우리 아이는 왜 그랬을까? 비통한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딸아이가 슬픔에 잠겨있는 엄마, 아빠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한다. 동생의 살인은 가족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딸아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아빠는 말한다. “어떻게 저런 아이가 나왔을까?”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만들었어요” 엄마는 대답한다. 이 말이 마음에 메아리가 된다.
얼마 전 읽은 해리스의 ‘양육가설’에도 비슷한 글이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유전자 중에 어떤 것을 받을지 모른다. 부모가 선택하는 것도, 아이가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성격과 사회적 행동은 유전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또 하나 또래 집단의 영향도 함께 받는다. 이 책은 아이의 사회적 행동은 부모의 양육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고 한다.
나쁜 행동을 하는 아이의 부모가 자책할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물론 아이가 안 좋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안타까운 것은 일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부모가 아이를 반사회적이거나 반인권적이지 않다면 아이의 불행에 스스로를 감옥에 가둘 필요는 없다.
부모가 그 부모로부터 유전 인자를 선택하지 못하듯이, 아이도 부모의 유전인자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사회화는 또래집단에 큰 영향을 받는다. 부모가 아이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보다 그렇지 않은 아이가 더 많다. 현재에서나 공부가 어떤 기준이지, 이 기준은 인류 역사의 기간에 비하면 티끌 만큼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못하는 아이가 더 많다. 부모가 아이의 공부에 더 관심을 가져서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공부 잘하는 또래 집단 안에 있기에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공부 잘하는 집단에 놓이는 경우보다 공부를 못하는 집단에 놓일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아이의 공부 또는 아이의 불행에 딱 그만큼의 걱정이면 충분하다. 어렵지만 의식적으로 딱 그만큼만 해도 부모로서 자격은 충분하다. 아이에게도 배우자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다.
행복한 가정에 날개 달기(건강, 관계, 돈)연수 오픈 채팅방
https://open.kakao.com/o/gbCSPYKh
연수 후기(20250528 연수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