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싱퀸

by 혜승



청명한 오월의 주말, 상사 호로 향했다.

신록이 우거진 길을 따라 호수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차 의자를 뒤로 제쳐 편하게 눕는다. 차창으로 꽃내음까지 산들산들 들어오니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이 스며든다.

호수 너머의 산들이 진초록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틀었다.

퀸, 유리스믹스, 앤 마리, 올리비아 뉴톤존, 비지스의 노래가 차례로 흘러나온다.

이번 곡은 아바(ABBA)의 댄싱 퀸(Dancing Queen). 나에게 행복한 기억을 준 곡이다.

피천득 선생이 "나의 시선이 일순간에 수천수만 광년 밖에 있는 별에 갈 수 있듯이, 기억은 수십 년 전 한 초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긴 세월을 단숨에 건너뛰어 그날의 신박했던 기억 속으로 간다.


둘째를 낳고 몇 달 후에 남편 임지인 서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라 몸도 마음도 고달플 때였다. 지인도 없는 외지에서 아기들을 키운다는 것은 무척이나 벅찬 일이었다.

그해 8월의 초저녁, 집 근처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으로 갔다. 그때 마침 노을이 지기 시작했고 찰랑거리는 바다도 붉게 물들고 있었다.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졌다.

우리는 해수욕장 앞 롯데캐슬의 야외 카페로 갔다. 일몰의 바다를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장소였다. 거기에 신나는 음악까지 쾅쾅 울렸다.

육아 스트레스로 찌든 나에게 탁 트인 공간은 위안을 주었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타들어 가는 노을,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물결과 어우러지는 음악으로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바의 노래, 댄싱 퀸이 여기저기 스피커를 통해 신나게 흘러나왔다. 거기 모인 많은 사람이 함성을 질렀고 흥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와~하는 소리와 함께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그쪽을 바라보니 통통한 체구의 점잖게 생긴 남자가 흥에 겨웠는지 의자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있었다.

어찌나 리드미컬하게 잘도 추던지 사람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특히 You are the dancing queen~으로 시작하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허리를 더 빨리 흔들며 팔로 사방을 찔러대는 그는 코믹 디스코의 진정한 댄싱 퀸이었다.

젊은 시절, 디스코 파마머리에 핑크빛 미니스커트를 입고 무교동[코파카바나]에서 신나게 찌르던 추억의 춤, 디스코.

테이블에는 그의 가족인 듯 어린아이와 아내도 함께였다.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도 저렇게 신나게 즐길 수 있던 남자. 실루엣만으로도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춤을 잘 추기도 했지만 그 자신감, 솔직함이 사랑스러웠다. 남의 이목 따윈 신경 안 쓰고 본인 감정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 춤에 푹 빠진 나도 그와 함께 찌르고 싶었지만, 유모차에서 내 눈을 맞추며 웃는 딸을 보면서 정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참 즐거운 저녁이었다. 그는 힘든 일상의 나를 건드려 즐거운 윤활유를 주고 사라졌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가끔 그때 춤을 멋드러지게 추던 남자가 궁금해진다.

내 또래였으니 환갑 전후의 나이일텐데 지금도 춤을 잘 출까?

그 자리에 있던 내가 지금도 기억한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그날 당신이 무척 멋졌다는 것. 내가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이 노래 속에서 툭 튀어나와 주인공이 된다는 것도.

그 사람은 그날 내 기억 속, 아니 여러 사람의 기억 속에 각인 됐을 것이다.

짧은 인생에서 남에게 행복한 기억을 남겨 준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행복한 기억을 심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그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어떤 것으로든 줄 게 있다는 건.


나는 누구에게 행복한 기억을 남겼을까.

한 번이라도 준 적이 있었을까.

없었다면 지금부터 춤 연습이라도 해야할까.

오늘, 그 남자 덕분에 행복한 상상에 빠져본다.



*댄싱 퀸ㅡ스웨덴의 4인조 그룹 아바의 댄스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