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엄마였고 쉼터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할매는 내 곁에 있었다.
그 시절엔 대부분 대가족이었다. 할머니랑 같이 사는 집도 흔했다. 나 역시 울 할매랑 같이 살았다.
난 삼 형제였고, 부모, 할매 모두 6명이 살았다.
내 부모는 맞벌이였다. 현재 인연 끊고 살아서 엄마, 아빠라는 호칭은 쓰지 않겠다. 쓸 때마다 내 마음이 불편하고 싫어서.
울 할매는 항상 긴 머리에 비녀를 했다. 머리 감는 모습에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걸 보고 놀랐다. 할매의 머리 스타일은 항상 비녀 머리. 내겐 익숙하다.
울 할매는 담배를 피웠다. 이런 모습에 난 ‘아! 할매들은 다 비녀 머리에 담배를 피우는구나.’하고 당연시했던 거 같다.
살다 보니 담배가 안 좋다는 건 알았지만, 뭐 또 다르게 보면 울 할매는 특별한 존재 아니었을까? 내 할매다 보니 이쁘게 포장해보련다. 울 할매는 외 할매다.
욕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이 많아 따뜻한 사람이다. 욕을 잘한다고 해서 상스럽게 하진 않았다. 그저 말에 욕을 잘 섞었다.
동네 아이들 불러서 배고프게 뛰어다니면 안 된다며 밥도 챙겨 먹이던 그런 사람이다.
요리하는 손도 크고, 재료도 있는 거 다 넣어 푸짐하게 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잘했다. 우리 집이 부자인 것도 아닌데.
동네에선 아이든 어른이든 울 할매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에선 00할매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울 할매는 유명했다.
그 당시 대부분 먹고살기 힘든 시기라, 맞벌이 집이 많다. 지금도 그렇긴 하다.
부모는 학교에 관련된 건 관심이 없었다. 학교 숙제를 했는지. 준비물은 있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다. 숙제했냐고 물어보는 건 할매였다.
할매가 숙제나 학교 공부를 봐주진 못해도 했냐고, 숙제는 해야 한다고 챙겨줬다. 할매가 있어 숙제는 꼬박했다.
잠잘 때 할매 옆에서 항상 잤다. 나의 모든 걸 아는 건 할매였다.
울 할매는 아들을 무지 좋아한다. 난 아들이 아닌데도 할매랑 친했다. 난 위로 언니, 아래로 남동생이다. 세 명 중 둘째고, 그것도 딸이라 많이 치이기도 하고, 손해도 보면서 산다.
옛말에 가운데가 서럽다는 말 다들 알랑가? 그런 훌륭한 명언을 누가 했는지 존경한다.
할매랑 얘기 많이 하고 제일 친하다고 자부하지만, 역시나 아들 사랑은 어쩔 수 없다.
몰래 숨겨둔 맛난 거나 좋은 건 항상 꼴통인 동생 차지였다. 이 동생과도 연락 안 하는 사이라 더는 동생 얘기는 하지 않는다.
울 할매는 거친 사람이다. 따뜻하지만 행동이 거칠다. 모진 세상에 돈 안 버는 학자를 남편으로 두고, 자식 셋을 키워 안 해본 일 없이 고생을 많이 한 할매다. 외할아버지가 학자라고 하는데, 그 두뇌를 물려받은 사람은 아직 집안에 없는 듯. 쓰읍.
울 할매의 거친 행동 중 동네방네 소문난 건 바가지 깨기다. 어린 시절엔 박으로 만든 바가지가 많았다. ‘박 바가지’라고 불렸다는 건 최근에 알았다. 우리 땐 그냥 바가지라고 하면 통하던 물건이었다.
이 박 바가지가 꽤 단단하다. 두께도 두껍고. 우린 이 박 바가지를 머리로 많이 깼다. 하도 할매한테 맞아서. 지금 생각해도 사람의 머리는 단단하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내가 말썽 피우는 애는 아니었다. 말 없는 정도의 조용한 애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사고 치는 애도 아니다. 언니가 동네 대장이었다. 같이 다니다 보니 나까지 얻어 혼날 때가 많았다. 같이 있으면 공범자!
동네 애들이 울 할매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길 하면, 할매는 양손에 박 바가지 들고 뛰어왔다. 우리 있는 곳은 어떻게 귀신같이 아는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할매였다.
양손에 쥐어진 박 바가지는 우리를 만나는 순간 한 명당 하나씩 머리와 인사하면서 바가지가 깨진다.
그 당시 박 바가지가 가격이 저렴했나? 집에 박 바가지는 항상 있었다. 깨어지면 바로 교체할 수 있다.
박 바가지도 참 불쌍하지. 우리 집에 오면 본인의 역할보다 우리 머리에 깨질 때가 많으니 억울했을 거다.
가끔 박 바가지를 보면 울 할매 생각이 많이 난다.
삼촌이 결혼하면서 할매는 삼촌 식구랑 살았다. 멀지 않은 곳이라 자주 갔다.
갈 때마다 집에 일을 다해주고 가야 해서 느긋하게 할매 집에 있어 본 적은 없었던 거 같다.
내가 초등학교 (그 당시는 국민학교) 2~3학년 때쯤 삼촌이 결혼했던 거 같다.
중 학교 땐가 할매보러 가다가, 슈퍼에서 바나나 항아리 우유를 우연히 샀다. 그 당시엔 뭐든 내겐 비쌌고,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바나나 우유도 나온 지 얼마 안 된 거로 기억한다. 귀하기도 했지.
어? 할매가 좋아한다. 한 번에 다 마셨다. 이렇게 다 마시는 건 보기 드문데.
내 생각엔 할매도 먹고 싶은 거 못 먹고 살지 않았을까? 본인 입에 들어갈 거 손주들 식구들 먹인다고. 그게 부모 마음 아닐까? 내가 부모가 되니 그 맘을 알 것 같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내 애들 입에 들어가는 모습이 더 좋은 맘.
그때부터 할매한테 갈 땐 거의 사 갔다.
할매는 속바지에서 만 원 한 장 꺼내 주곤 했다. 울 할매는 별이 되기 얼마 전까지 일을 했다. 동네에 충무 김밥 파는 집에 가서 잠깐씩 일을 해줬다. 그 덕에 가끔 얻어먹기도 했다. 울 할매의 손맛.
자식들에게 용돈 받는 돈보다 본인이 더 많이 주는 할매.
어릴 땐 몰랐다. 어떤 마음으로 속바지에서 꾸깃꾸깃해진 돈을 꺼내 주는지.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다.
울 할매는 일을 하고, 성격도 당차서 그런지 거의 아흔이 다되어 별이 됐다.
어느 날, 숙모가 할매 행동이 이상하단다.
앞에 물건을 손으로 더듬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할매는 괜찮다고만 했다.
병원에 가니 백내장? 수술은 늦었단다.
그렇게 2~3년을 아팠다. 병원도 왔다 갔다가 했다.
욕하던 담배 피우면서 남들 앞에 항상 당당했던 울 할매였는데. 내 할매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그때 내가 20대 중반? 집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앞이 안 보이니 대부분 할매는 누워있었다. 기어 다니면서 생활했다.
울 할매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성격에.
난 할매를 보러 갈 때마다 바나나 우유는 항상 사 갔다.
10월을 끝물쯤. 다음날 할매보러 가야지했다.
새벽에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전화가. 느낌이…. 사람의 예감이 맞을 때가 있다고 하지. 울 할매가 나의 할매가 별이 됐다.
내가 가려고 한 그날이었는데. 하루만 더 일찍 갈걸. 가려고 했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부랴부랴 할매 집으로 갔다. 할매가 이불속에 덮여있었다. 얼굴부터 다리까지 전부.
난 할매 옆으로 가서 앉았다. 미안하다고 일찍 안 와서 미안하다고. 하루만 더 있지. 아니 내가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난 두 손으로 이불속 할매 손을 잡았다. 손이 딱딱했다. 나뭇조각처럼 굳어서 딱딱했다. 차갑긴 왜 그리 차가운지.
“할매, 내왔다. 대답 좀 해봐. 할매.”
당장이라도 답답하다며 이불을 젖히고 일어설 것 같았다.
난 아직 할매한테 아무것도 못 해줬는데…. 울 할매는 그렇게 별이 됐다.
장례 치르고, 마지막 날 영정사진 앞에 절하면서 하고 싶은 말 하란다.
“할매, 고생만 하고 가네. 울 할매 다음에 태어날 땐 금수저 집에서 태어나라. 고생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자식들도 할매 고생 안 시키는 자식 만나라. 꼭.”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내 진심이었고.
울 할매가 별이 된 지 20년 정도 됐네. 벌써…. 가끔 할매 생각이 난다. 울 할매 지금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고생은 안 하고 있을까? 사람이 싫어서 꽃으로 태어났나? 울 할매 꽃 좋아했는데.
하늘 볼 때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힘들 때, 하늘 보면서 “할매.”하고 불러볼 때도 있다.
내게 그려지는 할매는 비녀 머리의 담배를 피우는 할매.
울 아들이 바나나 우유를 좋아한다. 그럴 때마다 할매 생각이 난다.
울 할매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으면 좋겠다.
추억이 사라지면….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진짜 죽은 거란다.
조금만 더 있다가 별이 되지. 날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결혼 후 자유가 됐는데. 이제 할매랑 어디든 갈 수 있는데. 할매 좋아하는 거 같이 먹을 수 있는데. 이제야….
내게 엄마였던 울 할매.
아마도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울 할매지 않을까?
적어도 내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