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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Jan 18. 2024

연말? 깝치지마. 나는 1월까지 연말이다.

이제부터 2월 1일이 신정이다. 고로 난 아직 28살

11월부터 쌓은 글을 편집하고 취합하면서 다음 글을 빠르게 써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몇의 주목할만한 굵직한 변화가 있고 그것들은 오늘에서만 쓸 수 있는 감정이자 생각이라 내일은 없기에.

1월 중순의 나는 압력솥의 압력을 높이고 손이 닿지 않는 높이의 선반의 물건을 꺼내기 위해 사다리를 짜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손과 팔에 힘이 남아있음에 정말 감사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행복과 사랑의 글 또한 쓰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건 일종의 구원과 같은 말이다. 신앙이 강하지 않은 나도 그런 믿음은 있다.

가르침을 위한 일화로서든 부풀려진 실화로든 주어진 문장과 텍스트 그대로 구원은 오지 않는다. 이미 반대를 많이 겪어서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 잠들어버린 사도의 부정의 말이든 잠깐 고개를 숙여 꺾은 클로버든 약속은 지켜지고 나에게 손은 건네어진다. 나는 단단히 잡으면 그만이겠다.


1112

착수까지 오래 걸리는 사람이라는 인지를 주변에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이 심히 괴롭다. 또 배움이다. 성실한 사람들은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살고 반대를 이해 못 한다. 또 한 번 감탄한다. 정반합의 실존에.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않는 장소에 가면 혼란하다. 가장 쉬운 도구로 손에 쥐어진 칼이나 다름없다. 다르면 틀린 것이고 틀린 것은 탈락된다. 매끄러움을 만드는 원리와 비슷하다. 요철을 깎아내고 메우는 일.


틀린 자가 되는 일에 버틸 수 있는 저항력이 내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보면 16살에 샀던 패딩을 생각해 보면 간단했다. 10년이 지났고, 유행은 돌았고 다시 멋진 아이템이 됐다. 물건에 대한 생각은 변했고 가치는 내 안에서 녹았다가 다시 재구성됐다.


장바구니와 찜목록에 물건들을 잔뜩 담아두고 정작 고르지 못하고 필요가 임박해서야 급히 뒤져본다.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것들을 항목화해서 박아둔게 어딘가. 그 정도로 무계획적인 사람은 아니라 안도하지만 나는 여전히 미룬 것에 대한 책무를 지고 있다.


인정욕구와 나라는 개인이 충돌한다. 오늘은 겸손을 바닥에 깔고 성실히 촘촘히 쌓아 닿을 수 있는 높이의 건물을 옆에 양립시켜 지을 것을 요구받았다. 제안이 아닌 요구를 거부할 재량도 촘촘함이 나에게 주는 불호를 말할 권한도 없이.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숲으로 향했다. 목재가 얼마나 필요할지도 모른 채로.


1117

참치는 헤엄치는 것을 멈추면 죽는다. 인간의 관점에서나 낭만으로 보이지 참치들은 별로 개의치도 않을 테다. 우리는 헤엄치고 너희는 걷고 서고 앉고 눕는 것이 선악 없는 형태이니까.


실제로 우리를 멈춤에 이르게 하는 거랑 딱 멈춰서 죽는 것, 어떤 게 더 나에게 치명적일까나. 헤엄치는 행위 자체랑 죽는 거랑 같다고 봐야 할까 싶기도 하고.


만드는 것을 멈추고 쓰는 것을 멈추고 그리는 것을 멈추면 죽는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으니 나는 인간참치는 아니다. 이거 아니면 안 된다 싶어서 죽을거였다면 진짜 참치로 태어나면 좋았겠다.


며칠 전 또 언급한 정반합에 입각해 내가 10년 가까이를 믿어오고 밀어오던 가치가 흐려지는 이 시점.

나는 어떤 반과 어떤 합에 도달해야 될지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고, 그것은 보편성과 특수성; 현재는 맞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예측 불가능한 전망을 보고 하는 인생베팅이기에 쉽지 않다.


바닷물이 다 하루아침에 말라버리거나 세상 사람들이 다 참치만 먹게 되어서 무한으로 남획하지 않는 한 참치는 내일 헤엄치는 걸 걱정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3m에 300kg 정도 나가는 생선이 걱정하기에 바다는 크다.


1205

삶은 자켓 지퍼에 달린 스트링과 같다. 떨어져 나와 홀로 있으면 용도도 쓸모도 모두 잃은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비로소 지퍼에 달려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종일 점퍼 가슴팍 주머니를 열고 다니다가 든 생각인데 메모장에 적혀있는 거보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음엔 틀림없다. 취합하면서 추가로 적는데 이건 도저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랬는지 모르겠네. 그래서 아무 말이나 써본다.


틴케이스를 좋아한다. 내가 최근에 가장 좋아한 틴케이스는 하와이에서 사 온 쿠키가 담긴 화형 틴케이스다.

틴케이스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직 세계가 고도성장기일 때 대부분의 상품들이 양철통에 담겨서 나왔다. 시간이 지나고 플라스틱으로, 코팅된 종이로. 시대정신에 맞춰서 흐물텅한 종이로 바뀌기도 하지만 여전히 어떤 상품들은 단단한 철상자에 담겨 나온다.


흐물텅의 대명사, 쓸 때마다 분노를 감출 수 없는 종이빨대도 단독으로 있을 때는 오! 환경 지키기!라는 생각이 들 테다. 아마 그랬기에 개발됐겠지. 종이빨대의 존재 의의가 음료에 꽂자마자 시작되는 눅눅함으로 회색지대에 있던 이들을 환경지킴이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수준이다.


아마 12월 5일의 나는 바보처럼 지퍼 열고 다니다가 이런 생각을 했던 거 아닐까. 시너지에 대한 뭐 그런 거, 대신 한쪽이 비대한 가치를 가진.


1206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할 마음이 들었을 때는 이미 해는 온데간데없고 어둠이 낮게 깔린 캄캄한 밤이었다. 나는 내 감정들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였지만 영화보다 게임보다 운동보다 많은 시간을 잡아먹은 그 노력은 답을 내어주는 일이 없었다.


나약한 인간인지라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도 하루가, 일주일이 일 년이 좌우되는 일이 많았다. 언젠가의 반년은 탈색모와 함께 했고 언젠가의 일 년은 해야 할 간단한 말을 하지 못해서 앓던 이와 같이 전전긍긍하는 시간이 되었었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좋은 일이었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과당과 정제탄수화물이 몸에 들어가면 그래도 이 기계를 돌릴 최소한의 연료 정도는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어떤 기점부터가 잘못된 스텝이었는지를 특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갈 방법도 딱히 그것들을 무마하고 해소할 시도도 없고 하지 않겠으나 그저 알고 싶다. 왜 네 번째 발가락엔 자주 물집이 생기고 손에는 언제 났는지 모르는 상처가 있는지에 대해서.

추측해 때워놓는 것 말고 진짜 내 걸음걸이가, 깔창이 이상한 것인지. 내가 쓰는 도구들의 가장자리에 혹 날카로운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들을 알고 싶다는 말이다.


나는 어떤 아들로 어떤 친구로 어떤 남자로 살아가야 할지. 내가 모델로 삼던 것들이 전부 이미지화되어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고쳐지고 꽤 많은 수정과 보완을 거친 100번대가 넘어간 진짜 최종본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초기에 평생 갈 것이라며 골라놓은 10번대 쯤의 이미지는 이제 구닥다리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와 나이를 먹어간 내가 느끼기에도 매우 시대착오적이고 관습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어릴 적 인터넷을 하면서 접했던 것들. 지금으로 따지면 골방개백수들이 심심풀이 삼아 쓴 글들을 마치 그것이 재미있는 인터넷의 특정 장소에 올라와있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별다른 검열이나 비판 없이 받아들이던 때가 생각난다.

그 시기는 나에게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의심하기,라는 성품의 기틀이 되어주었지만 나는 그 시기의 과도한 인터넷 사용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관성으로 작용했고 그랬기에 지금 내가 된 동시대를 살아온 20대 청년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재미요소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된 셈도 되니까 마냥 후회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이다.


과정 속에서 느낀 점들 중에 유독 강하게 뇌리에 자리를 남긴 일들. 대부분은 눈물 없이는 듣기 힘든 이야기들이지만 읍소는 구질구질한 것이고 나는 바깥으로 흐를 눈물을 안으로 흘려 큰 호수를 만들었다. 감정이 쌓이는 일이 있으면 호수로 물을 길으러 갔다. 그리고 내 방 안에 놓인 가습기에 부어 연무를 뿌렸다. 슬픔은 늘 함께하고 실체가 있었지만 사라졌다. 때때로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도 있지 않았는가.


내 슬픔이 온전한 기억과 타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종종 울적해지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손을 맞잡고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나는 일정 부분 포기했기에 자유로워졌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아마 빙글빙글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소위 영수증이라고 내가 부르는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계속 쓰여진 마음들의 서술. 분방한 마음을 담은 메시지의 런웨이에는 이제 피로감이 생겨버렸다. 내 마음을 주룩주룩 내리는 비처럼, 어디 서 있어도 쉬이 이 강수량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도록 하고 싶었지만 불과 몇 년 뒤의 내가 런웨이에 세울 피스들을 만드는 일도, 그저 걸어 나오는 그들을 보는 일도 지긋지긋한 일로 생각하게 될 줄이야.


이제는 마음을 절절히 표현하는 일도 눈물이 찔끔 나오는 사과와 미안함을 건네고 받아 드는 일도 염증스럽다. 이렇게 새로운 감정이나 관념, 관점 등이 언락 되고 나면 언제나처럼 시기와 사람들의 종류에 대입해 본다. 그리고 내 경험에 색안경을 씌워 내가 못 보고 있던, 혹은 강하게 보고 있던 색깔은 어떤 것들이었나 꼭 되짚어본다.


그것은 건너편 건물 안에 쳐진 커튼과 같은 것이다 볼 수도 있고 색깔도 알지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른다. 아니, 인터미션 뒤의 커튼이라고 비유하는 편이 옳겠다. 준비가 된다면 열리겠지. 그러나 영영 준비될 일은 없다. 극단은 떠났고 관객인 나도 좌석을 부쉈다.


1211-1214

횡설수설 말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었고 못나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단순한 설명 이상의 지나치게 자세한 서술이었다.


나의 보통의 삶은 주장과 강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 흐린 날이 오면 주관의 우산을 활짝 펴 뺑소니 사고를 방지했다. 은유적인 말이지만 고압적인 내부 의견은 종종 나를 지켰다.


비싼 음식이라고 다 맛있는 것은 아니었다. 역치는 실존하는 개념이고 개인의 역치 이상의 일을 사치라고 부름이 옳다. 압도적인 차이쯤 나야 역치를 압도하고 사치를 목 조르는 격차를 내려나? 똥 먹기랑 카레 먹기 정도의 그런 거.

비싼 것이, 보증서가 두툼하게 쥐어지는 옷과 상품이 꼭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진리까진 아닌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일반적인 영역 내에서는 중한 교육과정이기도 하니까.


보통의 삶은 규격 이상의 이들을 만나면 망가졌다. 박살 난 부분이 매번 제각각이었지만 나이와 물리적 시간은 자연히 고치는 기술을 늘렸다. 손상을 고치는 것이 새 차를 사는 것 이상의 비용을 요구할 때, 혹은 이미 불가역적으로 부서져버려 기능 자체가 소멸했을 때 그것은 차가 아닌 고철이 된다.


12월의 나는 내 범퍼가 긁히고 테일라이트가 깨졌다는 정도는 알았지만 차체 자체가 반파될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인지하지 못했다. 어리석었다 비난한다면 그것을 부정하진 못하겠지만 변명의 기회를 준다면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와 원동력 자체를 잃은 시기의 구린 아웃풋 정도로 이해해 주십사 하는 마음이었다.


차가 부서졌으니 이제 내 이동수단은 최초의 자율주행이자 최악의 자율주행인 다리로 걷는 일이다. 오히려 좋다. 차도 박살 나고 비싼 음식도 내 입맛엔 역했다.


비가 내린다. 주관을 활짝 펴고,


1216

쓰다의 반대가 달다인지에 대한 사유는 나에게 많은 질문과 호기심을 남긴다.

반대되는 개념이 상호보완적이라는 측면에서 지어진 것이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서 대응적이고 대조적이나 필수적인 요소라는 뜻이 된다.


높은 테이스트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그것은 반대로 추한 것 또한 많이 알아야 된다는 뜻도 함께 내포한 것이었다. 나쁜 꼴을 보지 않고선 좋은 꼴 되기 힘들다는 말이다.


내 방은 위풍이 심하다. 우풍, 위풍. 표준어가 무엇인지는 이제 검색해 봐야 알겠지만 건물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나는 구어로서 우풍이라고 줄곧 불러왔고, 나는 그 말의 어감이 좋다.

그런 입에 붙은 말들을 생각하면 미국에 떨어져사는 고모의 집에 동생들이 여행차 놀러 갔을 때 베개를 비계라고 부르는 할머니의 사투리를 그대로 쓰는 동생들을 보고 눈물 흘렸다는 고모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풍도 나에게는 비슷한 느낌인지라.


이 집에 이사 오고 나서 지속적으로 추운 방을 덥히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이불을 여러 겹 덮기도 해 보고 전기장판, 라디에이터.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아이패드 정도 크기의 온풍기이다. 이번 겨울에 시도한 두 번째 방법으로 첫 번째는 단프라박스를 창문 사이에 끼워 넣었던 일차원적인 방법이었다.


작은 히터는 효과적으로 바람을 막아주었고 방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라디에이터에서 발산되는 숨 막히는 열기완 다르게 가습기와 함께 사용하니 쾌적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쾌적한 잠자리가 꼭 숙면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유독 추운 날이다. 서향으로 난 창문을 시린 겨울바람이 때린다. 샤시의 틈으로 한기가 스며들어 침대에 누운 나의 창문 쪽 반신에 닿는다. 시린 귀를 느끼며 히터도 전기장판도 조절해 보지만 날씨가 춥다는 사실이 변할리 없었다. 기껏해야 나의 난방이 닿는 곳은 집 안에서도 나의 방에 한정된 것인데 이 추위는 그 너비를 아득히 뛰어넘는 곳으로부터 보내진 것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나의 손을 떠난 일들은 대부분 그런 외력이 되어. 손에 쥐어진 적이 없음에도 내가 자리했던 공간과 시간들이 이내 추위가 되어 나의 창을 때린다. 나는 순서를 기다린다. 이번의 찬 공기가 나에게 전달할 감기와 몸살은 얼마나 심한 것일지 상상만 하며 기다린다.

누군가는 감기 한번 앓지 않고 일 년을 보내지만 나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다. 감기는 전화기 충전을 잊은 날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고, 자리를 제대로 정돈하고 오지 못한 날에 또한 자주 들른다.


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추위는 싫으니 봄은 상대적으로 좋은 일이 되려나. 새삼 눈꽃이라는 말이 어색했다. 가지에 내려앉은 눈일 뿐인데, 짧은 아름다움의 꽃보다 더 짧게 보이고 녹아버릴 어떤 것들. 싫을 새도 없이 왔다가는 일들로 분류할 수 있다면.


싫어하는 것을 지나야만 좋아하는 것이 나온다면 나는 그것을 꺼려지는 일이라고 부르겠다. 마음을 돌부리에 걸고 정말 내 코가 깨져야지만 내어지는 즐거움이라면 나는 마다하겠다.


삶은 꺼려지는 일이고 마다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단 자가 되고 아름다운 자가 되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1217-1218

매우 정제된 것만 보이려 하는 사람을 주의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검열하고 면밀히 정제하기 이전의 불순물들이 혹시 나에게 딸려와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하여.


혹자에게는 나 또한 여러 번 걸러진 모습을 보이려는 매스미디어적 사람과 같이 느껴졌을 테다. 겉보기엔 열심히 운동하고 뭔가 짬짬이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아이가 스트레스에 고약할 정도로 취약하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것은 늦게 자면 늦게 일어난다. 와 같은 일상적 인식의 부작용과는 달리 저는 땅콩을 먹으면 목이 부어요, 새우를 먹으면 입술이 부어요 같은 특징적 부작용인지라.

내가 정말 뜬금없이 저는 스트레스에 취약해서 좀 기다려주셔야 합니다. 저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자 보내는 시간으로 물타기를 해야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는 식의 나만의 이유를 꺼내기 어렵게 만든다.


각자의 새벽. 내 새벽은 텍스트와 휘발되고 증발되는 다양한 감정으로 수 놓였지만 깊은 수면으로 그 시간을 채운 사람들의 낮과 나의 낮이 참 많이도 다르다. 아무리 걸러내고 콜드브루마냥 긴 시간을 들여 내용물을 내려도 색도 맛도 향도 다른, 개인의 수용성에서 편차를 보이는 삶의 산미가 오늘따라 시큼하다.


1221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빨간색 차를 탄다. 주위에 페라리가 많이 돌아다닌다는 뜻은 아니다.


강변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차들의 색을 맞추는 놀이를 했다. 저 택시로부터 5번째 뒤에 오는 차가 무슨 색일까? 하는 식의 놀이였다.

내가 사뭇 놀란 것은 생각보다 강렬한 컬러감의 차를 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의외로 빨간색 차가 정말 많았다.


자세히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의 소중함에 대해서 말한다. 자세히 봐야 사랑스럽다 오래 봐야 어떻다 하는 말들. 내쪽에서는 민망스럽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저 흐르는 물도 들여다보면 물고기도 나뭇잎도 흘러가더라.


1231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나의 얼굴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모른척하려던 건 아닌데 괜스레 숨기려던 뭔가를 들킨 기분이 들어 귀가 화끈해졌다. 호의를 가진 이들이 알아봐 주면 감사할 따름이다. 극단은 나의 단어이고 갈등은 심화되기 일쑤이니까.


올해 들어 머릿속에 자주 정차한 생각 중, 해의 말일에 한 개를 꼽아 상을 주자면 보편성에서 오는 격차와 두려움에게 수상하는 것이 옳겠다. 평범함이 불러오는 파급력을 깊게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의 마음과 뇌를 관통하는 생각들을 이전의 시대와 세대에 한 이들에게 경의와 경외를 표하며 오늘도 평범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진첩을 열어보지 않으면 이제는 1년 전이 되어버린 해의 시작에는 나의 사진이 많이 없었다. 공부를 했고, 결과는 단기간에 나왔지만 단기간일지라도 궤도에 올라가 있는 자는 괴롭기 짝이 없었다. 불치의 시간을 지나고 분명히 널브러진 채로 지낸 기간을 많이 가졌음에도 여전히 두렵고 마주하기 힘든 부분이 많은 다음 챕터이다.


새 학교, 새 신분, 새 마음. 그다지 새롭지 않은 새로움들이라 도리어 괴롭진 않았을까. 차라리 생경한 일들이라면, 정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과 일들이라면 긴장감이 나의 불평조차 가리워주었을텐데.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2023년을 닫는 글]


두려움은 나에게 전달된 두터운 암막과 같은 사랑으로 덮어두고,


중불, 요리의 기본은 중불이라고 했다. 레버를 3단으로 해놓는 것도, 인덕션 숫자를 9로 해놓는 것도 아닌 2단이나 7 정도의 뜨거움이 내가 원하는 장소까지 나를 데려다줄 것이다.

라면정도 끓여 먹을 때는 모르지만 조리와 요리는 엄연히 달랐다. 직선적으로 순서대로 다 때려넣고 최대한 빨리 끓이면 식사가 되는 그런 일 말고. 엄연한 순서와 규칙이 있는 그런 일을 불 앞에서 한다면 그것은 요리라고 불렸다.


태워진 냄비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몰라 쌓아 놓기를 반복했다. 탄 냄비가 늘어감에도 요리는 늘지 않고 망치고 태우기 일쑤였다. 스스로 중불을 켜라고 알려주었다면, 그런 가정은 의미 없으나 나는 아쉬움을 발라놓았다. 연마제와 적절한 용품들이 다시 탄 냄비만큼의 쓸만한 냄비를 나란히 쌓을 것이다.


그 사람은 요리를 잘한다. 중불을 켜는 법을 알고 있었고 어떤 모양과 크기로 잘라야 즐거운 식사가 되는지 잘 아는 사람. 오늘도 배우고 내일도 배울 준비를 한다. 흙이 묻어있는 작물을 씻고 고기의 핏물을 뺀다.


그 사람은 마카롱을 만들 줄 안다. 나는 마카롱이 꼬끄와 필링으로 이루어진 아주 단 간식이라는 것만 안다. 배울 것이 또 있어 기쁘다.


엉킨 실과 성긴 반죽과 같던 생각과 이미지는 타래가 되고 잘 치대진 둥근 반죽이 된다.


실들이 엉켜있다. 매듭을 지으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이 보여 때때로 애처롭다. 꼼지락대며 마무리하려고 했던 시도는 잊히고 이제는 가위를 준비하리. 어떤 타이밍에 잘라내야 할지, 그 어디를 잘라내던 이 절삭은 훈련이고 절단에서 오는 부산물 또한 전부 내 것이다.


잘 치댄 반죽이 잘 부풀어 오르는 빵을 만든다. 나는 수타면의 맛이 기계면의 맛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거면 해외도 헤엄쳐서 가지 왜.

그러나 관념은 믿는다. 언젠가 엉킨 실이 잘 둘러진 실타래였을 때, 기계가 없는 때에 단단한 팔을 가진 주방장이 반죽을 늘일 때 존재한 가치를 자르기 위해서 준비한 가위가 아니다.


새 시작은 없다. 다만 큰 조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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