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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Apr 29. 2024

너는 내가 현재를 보게 하고 미래를 꿈꾸게 한다.

1월 초에는 계란을 삶았고, 3월 중순에는 컵라면을 끓였다.

1 7

나의 모든 고독과 우울. 손에 쥐면 따갑고 마음에 담으면 쓰라린, 그런 마음들이 찾아오면 꼭 바보가 된 것처럼 쓰러지게 된다.

오래 푹 고아낸 사골처럼 내 관절들이 뚝뚝 떨어져 분리되고 애써 붙여왔던 근육도 사골에 붙은 살코기와 같이 스르륵 하고 내 몸에서 벗겨져버린다.

그 시간들에서 마주한 나를 진짜 나,라고 표현하고 인지하고 이름 붙여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은 여전히 공란이다.


피부가 따가우면 보습크림을 바르고, 눈이 따가우면 안약을 흘려 넣는다. 나의 대처는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1월 13일

회색은 검은색으로 나아갈 뿐이다. 흰색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내가 저 흐린 주관을 가진 이들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그곳에 있었다. 한발 내딛을 때마다 직전에 위치했던 곳을 잃는 사람들.


계란을 냉장고에서 꺼내 바로 끓는 물에 집어넣었더니 여지없이 깨진 채로 삶아져 버렸다. 감정 조절이 힘든 나날에는 깨진 채 끓는 물을 떠다니는 계란마저도 눈물을 짓게 했다.

이게 삶은 계란을 삶기 위한 끓는 물인지 계란탕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인지 순간적으로 혼동하는 시간이 검정이 되려 한 나를  흰자와 같이 흰 물감을 부어 회색으로 만든다.


봄날의 오렌지에 이어서 겨울날의 삶은 계란이 라니 정말 뻔한 레퍼토리의 우울이다. 따끔한 과즙이 내 입가에 범벅이 되었던 게 슬슬 잊힐 무렵 조각조각 부서지는 계란의 껍질이 얄궂다.

기술이고 요령이 생기면 점점 잘 까지는 계란을 마주하게 될 일이다. 식초를 첨가하고 얼음물에 담근 것도 같은 행위이지만 언젠가는 쑤욱하고 벗겨지는 계란 껍데기가 있으리. 지금은 사유 안에만 존재하는 매끈한 알맹이.


더 이상 성장이 없음을 알아채는 것도 성장의 일부인가 하는 의문이 자리 잡을 때쯤 나는 물리적 근육의 성장이 매우 더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초급자의 시간을 아득히 지나서 꾸준히 해왔다면 중급자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영양, 휴식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지킨 게 없는 나.

쉽사리 잃어버릴 허영심이 덕지덕지 붙은 상태로 허영을 유지하기 위해 매번 타행 융통을 서슴지 않는 남자가 되어있었다.


그럼에 계란을 삶고 스티로폼 박스에 가득 담겨오는 몇 주분의 소분 조리된 스팀 닭가슴살은 조리와 구매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 되었다. 허영을 덜어내고 내실을 채우는, 말 그대로 영양을 채우는 별거 아닌 일인데 내가 되게 거창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가시적 결과의 상승이 나를 또 한 번 살게 한다. 인풋이 무엇이던 고영양을 적시에 직접 투입한다는 만족감.

그것은 새로운 나와의 계약이며 감정의 제2, 제3 금융권으로 고꾸라지지 않고 정당하고 합당한 자격으로 감정을 계속 누리겠다는 말이다.


1월 15일

정말 신비롭게도 창모 콘서트 녹화본을 들으며 물레를 차는 와중에도. 피곤함을 잔뜩 두른 채로 환승해 올라탄 버스에서도 불안은 없었다.

도리어 편안함에 가까운 이 상태가 경구제가 가져다줄 수 있는 매우 긍정적인 아웃풋이라는 소식을 일전에도 스스로에게 발송한 적이 있던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라 기시감과 신비로움은 쉽게 해소되었다.


인간은 결코 물리적 상황과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에 베이면 당연히 출혈이 있고 총은 살살 쏜다고 해서 고유한 살상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1월 23일

물가가 오르고 국가들의 성장이 더뎌지듯. 마음도 그랬다. 이유를 설명하면 궁색한 변명이 됐고, 솔직한 진심을 나열하면 허가받지 않은 좌판을 깐 잡상인이 됐다.


쌀을 배달하던 삼성의 전신인 삼성상회처럼. 어쩌면 나의 솔직한 진심이 언젠간 백화점에 입점하고 플래그쉽 스토어를 가질 수 있는 가치를 가진 것인지도.


나에게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길!


1월 25일 - 2월 1일

시간은 그저 숫자일 뿐, 실제로 나에게 시간을 알리는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점심을 알리고 사람이 잘 시간을 알렸다.


책임감이라는 반석 위에 짓기로 약속한 건물이니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사상누각, 쿨타임 돌면 글에 쓰는 저 사자성어가 나의 반석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 자신에 대한 고찰을 한다. 내가 배고프지

않아도 오는 시간. 마치 관공서와 병원 등이 12시부터 1시쯤을 점심시간으로 약속하고 자리를 비운다. 신뢰는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뜻인 것이다.


나의 보폭으로는, 운이 좋으면.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도 앱에 표시된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괄시하는 것. 아주 사소하지만 신뢰와 비신뢰가 범벅이 된 일상 속 단편 아닌가.

어플이 알리는 시간을 믿고 변수들을 첨가해 양을 늘리는 행위가 일상의 신뢰를 높이고 나를 타인이 자는 시간에 자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리.


2월 4일

시련은 폭풍우 같은 것이다. 제자리에 서서 자리를 지키기만 해도 중간 이상 간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패야할 장작이 쌓인 일처럼 업무가 아닌 그저 다가오는 재해 같은 것이다. 재해라는 말의 뉘앙스가 문제라면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 같은 것이라 명명하겠다.


바다를 보러 가서 어찌 소금기 가득한 바람과 비린내를 피할 것인가. 뻥 뚫린 경치와 신선한 생선으로 뭉쳐진 머리칼과 킁킁대는 코끝을 덮을 뿐.


2월 8일

내가 새로이 지내게 된 공간은 필연적 이게도 모든 곳에 나의 손길이 닿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선망만 하던 장소에 나의 자리가 꾸려졌고 이제는 그 근처에 생활할 수 있는 거처가 마련됐다. 정해진 수순이라고 생각되는 나의 살림이 가져다준 득과 실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마음이 버벅거리고 몸이 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기고 있지만 가솔린을 채우고 타이어 공기압을 체크함과 같은 지금이 어느 정도의 속력으로 어떤 방향으로 튀어나갈지에 대한 기대를 프렁크에 실었다.


2월 13일

붉은 마녀에게 잡혀 살해당한 사람의 이야기


월등히 뛰어난 능력도, 돋보이는 외형도 어떠한 강점 앞에서는 다 강등을 겪었다. 지구력과 끈기라는 성품의 존재는 늘 나를 좌절시키고 길로틴에 목을 올리게 했다.

가까스로 분리될뻔한 목을 부지하고 나면 며칠간 묵직한 사람들에 대한 동경으로 살았다.


누군가의 기쁨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도 얼마 전에는 누군가의 하나뿐인 아기였고 그녀의 기쁨이었는데 내가 겪는, 하는 일들이 그 시간을 부정하게 두기엔 은혜가 깊다.


죽음을 생각할 때 아기였던 나를 함께 생각한다. 삶의 시작점과 죽음을 함께 생각해 상쇄하려는 마음이 얼핏 느껴졌다.


노이즈캔슬링처럼 나는 마음에서 발산하는 파동을 반대되는 파동으로서 무마하고 고요히 하려 부단히 움직였다.


2월 14일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생각으로, 말로 린치를 가하고 나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절벽으로 떠민 자신들 중 살아 올라온 이들만이 나의 친구이자 동료로, 다시 결합하여 하나의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역사를 존중하고 답습하며 학습하지만 그것이 개인과 개인의 계승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아니다.

개인이 불러올 수 있는 존경심과 경외에는 한계가 있고 때문에 집단과 업적이 불러들인 것들에 증축을 기획한다. 허가받은 증축이 아닌 경우도 빈번해 알게 되는 것이 늘고 함께하는 시간이 느는 것과 반비례해 리스펙을 떨어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단말기로 냉면을 시키는 지금도, 새벽에 노비를 뛰쳐나가게 시켜 해장 냉면을 대령하게 했던 이전에도 사람들이 정반합의 원리를 이해하고 적용한다는 사실은 나를 증축하게 한다.

나는 어떤 개인으로 타인에게 이해될 것인가. 합법적이고 적법하게 진행된 증축이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2월 15일

그럼에도 사랑은 나를 살아가게 한다. 나는 아직 차가 없지만 보통의 사람들의 개인 운송수단 소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익혔다. 차량을 구하는 것은 차치하고 인간은 벌려놓은 고정지출을 감내하기 위해서 버티는 것이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구원하고 모레의 내가 내일의 나를 구원한다면 구원받은 삶이 아닌가.


체중은 마음의 무게와 반비례했다. 만약 정말 편한 마음과 느긋한 성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쉽게 비만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2월 17일

나는 단단하고 꽉 찬 사람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언젠가는 이 심연에서 떠오를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비어 있기에 살아나가고 가볍기에 날아가는 것이 있다.


2월 18일

지금 내가 깨어있는 시간이 낮인지 밤인지 모르는 때가 온다. 더군다나 내가 새로 꾸린 내 방은 얼핏 봐서는 낮과 밤을 가늠하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에 물리적인 판단력이 흐려지는 날은 생각보다 빠르게 왔다.

하지만 내가 원한 것은 단순히 시간이 언제가 됐는지, 해가 떴는지, 달이 떴는지, 비가 오는지 같은 진짜 현상이 아니다.


아무리 저녁을 잔뜩 먹어도 아침이 오면 공복감이 든다. 잠을 무지하게 때려 넣고 쓸쓸함과 공허함을 가득 담은 방을 무대로 일어서면 손이 갈 곳을, 생각이 갈 곳을 찾았다. 시대의 이기로 나는 쉽사리 생각을 털면 터는 대로 쥐어짜면 짜는 대로 내려놓을 수 있다. 먹을 갈고 붓 끝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카페트나 러그가 있어서 다행이다. 온돌을 늘 켜두지는 않으니까 찬 바닥에 발바닥이 닿는 일은 새 시대의 먹과 붓으로 하면 될 차가운 일 앞에서는 겪고 싶지 않은 전조이니까.

즐거운 일들은 차가운 표면을 가린다. 중립적인 러그처럼, 덥히지는 않아도 떨게 하지는 않는 그런 일을 즐거운 일이라고 부르겠다. 관성 있게 할 수 있는 것들. 글을 쓰는 일은 약간은 차게 식은 러그 같다. 예상했던 포근함은 아닐지라도 나는 글을 딛고 선다.


보통의 기립은 새벽에 온다. 위가 비었을 때의 쓰린 느낌과 비슷한 정신이 글을 쓰게 한다. 이런 날 쓰는 글들이 나를 살게 했다. 공복감과 허기가 나를 살게 했다.

고독이 가진 어감처럼 쓰디쓴 어떤 것들이 나를 살게 했다. 감탄고토, 사상누각, 각골난망. 이런 말들은 마음속 선반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졌다. 오히려 부정적인 에너지가 나에게는 참 달아서.


급변하는 것들은 충격을 동반한다. 급하다는 시간과 변화라는 사실이 개개인마다 다른 뉘앙스와 실재로서 발생하겠지만 나에게 지난 반년은 급변과 충격이며 충돌로 펼쳐진 에어백은 쇄골과 같은 약한 뼈들을 부러뜨려놨다. 단 것들을 토해낸 후의 내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뱉어내지 않았다면 필히 죽었으리라. 전부가 아니라도 일부는 확실히 죽었으리라.


음미하던 것들의 맛이 변한 것인지 내 혀를 누군가 바꿔 끼운 것인지는 알 수 없고, 그 질문 자체는 내가 천성적으로, 기질적으로 온순함과 온화함을 내재한 것인지 혹은 내가 따로 부르는 이름인 만들어진 기분들이 얼레벌레 뚝딱거려 만들어준 쇼윈도 안의 보일 뿐인 평안인지에 대한 의문과 맥이 맞아떨어졌다.



2월 25일

모든 것은 피로도 관리가 핵심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인가 스스로도 싶지만, 적어도 내 삶과 일상에서는 피로도가 모든 행위를 지배했다.


삶이라는 건 당최 알 수가 없다. 유기적인 흐름 같다가도 별인간 누군가 정해놓은 장기짝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지디가 도 모든 가치들이 시간의 바람과 파도를 만나 부서지고 깎여나가 새로운 모양새를 갖춘다는 사실이 앞서 느꼈던 다행을 부수고 깎는다.


관망과 좌시의 차이가 개입에 있다면 나는 내 삶을 때로 좌시하고 흐르는 대로 둘 필요를 느낀다. 전전긍긍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멋없다. 멋, 제멋대로 살아간다는 말은 어쩌면 묘한 긍정과 소소한 동의를 내포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제 멋이 있는 사람은 필히 좌시나 관망의 개념을 넘어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삶을 닦고 살펴보는 이 일 테니까.


어제는 주먹을 울리다가도 오늘은 정말 눈물이 나도록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는 알 수 없는 진행방식들. 교묘히 짜여진 관계성과 촘촘한 시선들 사이에서 나는 틈을 비집고 다시 안정을 손에 넣을 수 있으려나. 방편은 늘 내 손 바깥에 있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는 원리는 행동을 유도하고 바깥으로의 전향을 어느 정도 강제한다. 이 짜임새 좋은 니트가 내 몸에 맞으려나.


3월 3일

아픈 건 싫다. 슬픈 건 더. 아픔과 슬픔은 늘 널려있고 나는 발자국을 조심스레 남겨야 했다. 낭자한 더러운 길을 걸을지언정 언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정글은 싫었다.


책임만 질 수 있다면 그 어떤 잘못과 과오라도 난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00% 정말 온전히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어떤 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내 중론이다.


3월 5일

긴축도 누군가에게는 기회다. 나를 구성한 부서들에게도 그랬다. 들어오는 인풋들에 업무가 많아진 구성원들도 있는 반면 반사적으로 더 발전되고 의미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이들도 많았다.

비록 내가 원한 건 전체 인원이 함께 비약적인 상승을 이루는 것이었으나 언제나 불균형은 있고 나는 일련의 거부과정을 거친 후에 균등을 모색했다.


질량이 큰 물체는 인력을 갖는다. 내가 낸 해법 또한 비슷한 의미를 전달했다.


3월 6일

우울과 감상도 여유이고 사치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꽤 서글펐다. 많은 젊음과 방식이 모인 곳에서 다양성을 몸소 체험해 보면 내가 회식을 마치고 지금 집으로 돌아가려고 올라탄 대여자전거 위에서 느끼는 이 감정은 정말 한정적이고 제한적인 일전의 나의 세계에서 보낸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3월 12일

잘하는 이들은 귀감이 된다. 잘한다는 것은 마치 주머니 속 송곳처럼 숨겨도 삐죽 튀어나오게 된다.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것.

사랑이나 재채기 같은 그런 것들은 불쑥 나타나 무언가를 자극한다. 자극은 반응을 동반하며 질투가 튀어나오던 경외를 쏟아내던 어떠한 결과를 내놓고 소강을 이룬다. 질투는 그릇 작은 자의 성품이라고 믿은 시간들. 내가 토해놓은 질투들이 협소한 나의 속을 더 긁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감은 모여 표본이 된다. 표본은 모여 어떤 집단과 기득권이 된다. 보수적인 것이 어떠한 변화가 나오는 가능성을 틀어막고 방해하는 악처럼 그려지는 미디어가 많지만, 개인이 모인 집단의 힘을 괄시할 수는 없다.

멋진 사람들의 멋진 생각들에서 시작되어 유지되고 연구되고 발전된 유산을 고리타분한 표본이나 배타적인 공고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내가 필요하다.


3월 12일과 13일

앞으로 살며 한 렌즈와 앵글 안에, 정말 양보해서 음성조차 한 공간에서 담길 일조차 없는 사람들이 같은 대기를 마시면서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에 괴로워하던 시기가 있다. 세상은 내가 눈을 감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고 내가 눈을 뜬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았다.


3월이 오는 것과 동시에 나는 많은 것들을 분리수거해야 했다. 자취를 이미 한번 해봤기에 쓰레기를 버리고 집을 구성하고 정리하는 것에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분류하자면 나는 깔끔한 사람에 가까웠고 악취나 더러움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위생을 위했고 그것은 타인과 있을 때는 유동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할 수 있는 유연함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감사하게도.


즉석밥 용기와 내가 먹는 냉동 닭가슴살의 포장재는 늘 한번 씻어서 재활용 봉투에 담아놓는다. 물은 여의치 않아 500ml로 소분된 생수를 사 먹었지만 도통 가성비가 나빠 2L짜리 물로 바꾸게 됐다. 음식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한식류의 배달음식이나 테이크아웃은 하지 않는다. 샌드위치나 햄버거 등의 후처리가 간단한 음식들이 좋다.

빨래는 마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쾌한 경험을 줄 확률이 높기에 아직 난방을 하는 여건을 기회삼아 빠르게 말린다. 혼자 사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방해받지 않는 편안함을 유지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 내가 온수기를 켜고 가도 아무도 꺼줄 사람이 없는 것.


처음 이 집에 살림살이를 바리바리 싸들고 왔던 날을 기억한다. 난방 사용에 익숙지 않아 커튼봉과 커튼을 달고 각종 물품들을 자리를 정하고 비치하는 동안 발이 많이 시렸다. 풍수지리나 다양한 미신들을 수치적으로 믿지는 않으나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따뜻함과 을씨년스러움은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나는 학업을 위해 구한 이 방, 이 집이 나의 향과 온기를 어서 머금기를 바랐다.

온돌이 들어오고 전기장판도 켰음에도 방은 여전히 차가웠다. 시험 삼아 잠시 눈을 붙인 저녁시간 동안 온도와는 별개로 등이 오싹한 채로 뒤척였다.


본가의 인테리어와 집기, 가구들은 나의 의견이 들어간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그 선반에 올라간, 그 옷장에 들어있는 옷들이 나의 취향과 선택에 의한 것들이었을 뿐 담는 그들을 담는 것은 어떤 모양새던 그다지 상관이 없었던 것인지, 커튼을 고르고 이불을 고르고 바닥에 깔아놓을 러그를 고르며 나는 목적지는 같으나 다른 경로로 걸었던 어떤 날을 떠올렸다. 익숙한 곳으로 가는 새로운 길,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한 달보다는 길고 두 달보다는 짧은 이 집에서의 시간들. 난생처음으로 침대 머리맡에 놓을 인형을 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애착인형으로 자리하고 있을 이케아 리트리버. 이케아 강아지라는 의미에서 이름은 이지로 지었다. 정말 살아있는 강아지는 아니지만 그 형상을 한 인형을 안고 있으면 많은 안도와 위안을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남성호르몬이 부족한가 싶어 몇 주간 무겁게 레그프레스를 했다.


선택과 집중을 토픽으로 올려두고 나면 선택받지 못하고 집중되지 못한 것들의 원성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된다. 내가 버린 것은? 내가 잊은 것은? 잊었고 버렸기에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는 견해라는 말도 좋아한다. 의견보다는 견해. 의견보다는 견해가 조금 더 개인적인 해석이라는 뜻의 어감에 가깝다. 나의 견해는 그랬다.


쓰레기를 싸들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저건 피자를 포장해 왔을 때 함께 사 왔던 콜라를 다 먹고 찌그러뜨린 페트병이고, 저 종이상자는 타코를 담았던 박스였으나 안쪽에 속지만 오염되었기에 종이로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복기하고 생각하고 반추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쓰레기는 봉투에 들어가면 버려진 것이고 잊히면 되는 것이다. 관악구에서의 생활은 쓰레기더미를 만들었다. 이미 이태원과 분당에서의 일은 선별되어 전시되고 선반에 올려지고 외의 것들은 폐기했음에도 유독 반년 간의 수거를 늦췄던 나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12일에서 13일로 넘어가는 밤. 기존에 하던 작업을 한 차례 갈무리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꺼내놓고 온 날. 귀가 후 잘 준비를 마치고 소중한 사람이 선물해 준 정말 잘 때만 입는 잠옷을 입고 나서 누웠다. 방금 내가 씻고 나온 욕실의 샴푸와 바디워시의 향과 몽글한 스팀의 습기.

삶이 언제나 감격이나 환희로 가득 찰 수는 없겠지만  자기 전 누웠을 때 안심하고 안도할 수 있는 나날이 되길, 하고 나만의 어떤 믿음에 기도했다.


3월 14일

#1

오차가 나를 살렸다. 영점을 맞추는 사격 또한 일생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이리저리 움직여서 맞춰나가는 명중을 향한 미세한 조정들. 얼마만큼의 크리크를 더 수정해야 나에게 맞는 영점과 중앙에 모인 탄착군을 찾을 수 있을지. 표적지가 등 뒤에 있을 줄은 가늠자를 뚫어져라 보는 동안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반대로 가기. 어쩌면 정말 획기적인 삶의 지침이자 오차라고 불리는 정확함이 아닌가. 내가 노리는 모든 곳들이 틀린 방향이라면 나의 판단과 반대되는 일을 하면 삶은 지속되며 활기를 얻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단서를 모아 해결해나가야 하는 일은 허탈감을 준다. 누군가는 알고 있을 사실을 탐구하고 이제야 알았다는 늦바람과 같은 마음이 코 끝에 닿으면 재채기가 난다. 혐오와 짜증 섞인 말투들은 겨우 찾은 맞는 톤의 파운데이션으로 가릴 수 있었지만 피부를 감출지라도 기관지에서 튀어나오는 불수의근의 작용은 내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취, 하고 멀리 나의 비말을 보낸다. 팔뚝과 손수건이 틀어막는 불쾌한 비말의 확산이 튀어나가려던 것들에게는 얄궂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허탈한 마음이 들어 그것을 거부하려는 나름의 방어기제였을 텐데도 말이다.


사실을 알아가는 일만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닌 사람을 알아가는 일도 비슷하다는 의심이 허탈함에 숟가락을 얹는다. 부디 사실과 사람이 가족이 아니길 바랐는데 성씨가 같은 것이 단서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의 특징과 성향, 심지어는 시선의 방향과 입꼬리의 움직임까지 나에게는 하나의 데이터로서 그들을 항목화하고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도움을 주었다. 결과적으로는 어떤 시뮬레이션 게임의 코딩된 캐릭터들의 특징적 성격이나 고정적 요건들에서 파생되어 모델링 된 객체와 같이 사람들을 바라본다.


나는 그런 습관과 체화된 사고방식을 토대로 나를 선입견의 인간이자 편견의 동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선입견과 편견들이 모두에게 범용적이고 실용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입력된 시트에 특성을 대입해서 소화를 시켜보면 한 번쯤은 읽어보고 들어봐도 손해라고 느껴지지 않는 요인들로 해석한 하나의 도움말이 출력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친구이자 빠른 용융을 허락한 친구는 나의 그런 특성들을 조금 덮어놓을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위협과 위험에서 자유로워지고자 생각과 견해와 정보를 모아 선택한 하나의 엔진이 사실은 너무 빨라 유심히 보지 못하게 하고  너무 느려 정해진 시간과 비용 내에 도달하지 못하는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는 취지에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단박에 이해했다. 다만 계도기간과 조정기간이라는 일종의 인터미션이 우리의 삶에 늘 있기에 나는 조정을 거쳐 도달한 어떤 것에 또 한 번 손을 대야 하는 시기가 왔음 스스로의 내부에 경고하고 조율하기로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은 꼭 자야만 하는 날이었고 밥을 먹을 수 없는 날은 꼭 잘 챙겨 먹어야만 하는 기간이었다.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은 우리들을 매혹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들은 사실 일생을 바쳐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아름다움을 숨겨 간직하고 있지 않았던가.


#2

사람은 통조림이 아니다. 놔두면 상하고 닫혀있어도 열려있다.


상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내가 온전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간과 장소를 비웃으며 모두 손실되어 버린다. 떠나간 입장에서는 이미 수많은 안녕과 작별을 고했으나 나는 당혹스러워한다. 유비무환, 그는 준비했기에 감동 또한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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