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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Jun 19. 2024

스마트폰이 현대인에겐 뇌와 같다고 한다

나는 매일 전화기를 부수고 싶은 기분으로 산다

3월 16일

사용법이 단순할수록 고장이 적다. 물리적으로 진행되는 파손이나 소모품의 노화 등을 대처할 수만 있다면 용법의 간결함이 수명을 결정짓는다.


사람은 우주선이나 비행기가 아니다. 철저히 준비하고 확인 또 확인. 매번 봐주면서 오래도록 대비한다고 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앞서 말한 기체들도 그렇지 않으냐고 반문한다면 그 말 또한 맞다. 그러나 실사용에 들어가는 시간 자체가 다르지 않는가. 살아가는 인간과 날아가는 비행기는.


유비무환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존재 자체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우주로 배를 쏘며 대륙과 대륙으로 쇳덩이를 날려 보낸다.


절대로 준비되지 않는 존재가 무결함과 운에 의해 성공되는 것들을 한다.


3월 31일

숲은 많은 것을 숨기고 그 풍경에서 나는 아주 오래전 살았던 사람들의 눈동자를 엿본다. 내가 몇 걸음만 물러서도 보고자 하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가 정말 머리카락처럼, 갈대밭처럼 촘촘히 자라 있는 것이 아닌데도 조금의 거리가 내 시야를 가렸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곳이 마치 숲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역설적인 말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라든가. 풍요 속 빈곤, 이라던가.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맞닿아 있지는 않다. 라든가.

각자가 향하는 장소와 목적이 다르지만 일순간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움직이는 숲과 같았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과 시야에 어디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길을 잃을 뻔했다.


내가 쭉 따라오던 이들은 어느샌가 따른 시간과 비례해 절하되고 떨어져 버린 존경심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나는 애써 지니고 다니던 것이 쓰레기로 전락한 것에 대해서 굉장한 회의를 느꼈지만 이 일이, 이 시간이, 이 나날들이. 방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용한 것들의 사이에서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 나는 또 보잘것없는 것에 도금을 하고 치장을 해 팔아야만 하는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영역에 들어온 나에게는 이제 선택권이 없구나.


4월 3일

뭔가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참 대단한 능력이다. 하나를 알기에 다른 것을 쉬이 알고 전이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참 무능력하다. 익히는 것이 느린가 하면 그것은 아닌데 내가 앞서 적은 전이의 영역까지는 도무지 확장되지 않는다.


아마도 기질이나 성향 자체의 개선으로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이 4월의 토픽을 취합해 보충할 이야기를 적는 것은 6월 말의 나이다. 아마도 나는 2달 전의 경외를 정말로 두려워해 혐오나 증오로 치환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 같다.


이쯤, 혹은 저쯤. 글을 정리해 올리지 않으면 내가 영영 올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나의 안에 있는 불안들은 나를 밀어내고 부추기지만 이제는 선뜻 시도하지 않는 내가 있다.


4월 16일

도구란 인간의 신체가 가진 물리적 한계를 깨도록 돕는다. 보통은 이렇게 말하면 전통적인 방식의 망치나 장갑등을 생각하게 된다. 물리적 한계의 주안점이 안전에 있는 도구들.


나에게 한계를 깨 주는 도구를 꺼내보라면 나는 키보드를 꺼내련다. 이제는 내가 생각해서 말하는 것인지 띄어쓰기를 관장하는 엄지를 제외한 여덟 손가락이 생각대로 움직여 말을 적는 것인지 헷갈린다.


그도 그런 게 이제는 타이핑이 아니라면 진심을 구구절절 이야기하기가 어색해진다.

인색해진 나의 말주변. 아마도 정말 종이 위에 펜으로 쓰는 글이 나에게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5월 20일

센스와 센시티브의 간극을 이해하는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감자만 먹고 살아갈 수 있다. 구황작물인 감자가 유럽인들의 역사 속에서 긴밀히 추위와 허기를 채웠으며 그것은 인류와 역사라는 포스터와 벽 사이의 단단한 접착제 역할을 해주었다.


작디작은 작물과 인간, 그리고 막연히 거대해 보이는 역사와의 연결 고리를 부정하거나 절하하지 않는 의미에서 인간은 감자만 먹고도 연명할 수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우유를 넣고 으깬 감자의 부드러움. 풍부한 뇨끼의 식감과 튀긴 감자의 강렬함을 이제 전 인류가 안다.


현시대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그런 것이다. 땅에서 캔 감자에 싹이 있던 흙이 묻었던 개의치 않고 베어 물어 주린 배를 채우는 시대는 가고, 앞서 언급한 것들을 아주 세련되고 먹음직하게 요리해 멋스럽게 내놓아야 그제서 식기를 들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


우리는 감자만 먹고 살아갈 수 있다. 아주 고고하고 아름답게 재구성된 감자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5월 29일

나와 같이 자란 내가 나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기다려야 되는 일이 있으면 그 사이 마가 뜨게 된 시간을 잠으로 채워 넣고, 별거 아닌 소식들에 화들짝 놀랄 준비를 하며 대기하는 전전긍긍하고 초조한 삶이 언제 끝날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나의 삶의 고유한 권한이자 재료이자 내용물이라면 나는 그 권한을 포기할 수도, 재료를 내다 버릴 수도, 내용물을 쏟아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건 이전 글들에서 썼던 일시적인 현상에서 비롯된 메타포와는 다른 묘사법이다. 정말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시력교정술은 오래된 표본이 많지 않다고 들었다.

비교적 개발이 되고 발전한 기간이 최근의 일이기도 하고 특히나 사람의 감각 중에서도 최고로 중하다고 여기는 시각이기에 어떠한 리스크를 감수하고라도 안경이 없는 쾌적하고 선명한 시야를 원했으리라.


오늘의 나의 눈에 흐림도 전혀 메타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눈을 흐렸고 누군가를 노려보고 째려보며 열심히 주간에 눈을 굴렸다. 죄스러우며 복잡하고, 부정적인 에너지는 나의 눈으로 들어왔다. 눈으로 들이마신, 눈으로 들은, 눈으로 맡은 것들을 정말 오래오래 기억된다.


나는 나의 속에 고인 부정을 때때로 진공 밸브에서 유류나 고인 수분 빼내어 성능을 유지하듯이 비워내곤 했다. 점점 독이 차올라 나에게 어떠한 중독으로 나타난다.


6월 7일

그 세상엔 내가 들어갈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구나, 그저 서서 기다릴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는구나. 잠시간의 허탈함을 느끼고 다시 채비를 했다. 흐린 날엔 장화를 신겠지만 나는 맑은 날에 신을 샌들을 구해야 하니까.


그것을 세상이라고 불러야 할까? 혹은 마리아나 해구처럼 아주 깊디깊은 심연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하늘에서 보면 그저 우거진 수풀사이 뻥 뚫린 들짐승의 잠자리라고 해야 할까.

쉽사리 접근할 수 없지만 한번 진입한다면 다시 성히 나오기 쉽지 않은 그곳들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때때로 림보, 장막 뒤편. 베일로 가려진 곳. 수렴된 자리 뒤의 어떤 이. 하고 불러야 할까


웃음이 사라진 나날에 당신이 띈 표정에 얼마간 속상했지만 앞서 내가 가진 신발처럼. 이 여정에 사용할 수 있는 도구와 물건들이 다채롭길 바란다. 나는 그거면 됐다.


6월 13일

붙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은 보내고 다음에 날아올 것에 대비하는 편이 낫겠다. 잘 보이려고 한 사람에게는 늘 똥볼을 찼고 낙담한 나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나에게 웃어주었다.


질투가 나를 덮쳤다. 시기심이 나의 호흡기에 가득 찼다. 아아, 익숙한 이 질식이여. 나는 언제까지 이런 파문에 휩쓸려야 하는가.


일생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있다. 그간의 서른 개가 채 안 되는 해를 갈음한다면 어떠한 말을 채워 넣어야 할까.


테트리스 게임의 빈 틈처럼. 쌓이고 쌓이고 또 쌓여서 웬만한 각오나 실력으로는 해소하지 못할 시간과 삶이 쌓이면 이전에 남겨둔 빈 틈에는 원망이 끼이고 후회가 썩어 내가 짐을 쌓아둔 책상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아아, 이 질투야. 이 시기야. 부릅 뚠 눈과 심호흡을 함께.


6월 17일

크로와상을 베어 물었을 때처럼 켜켜이. 밀도 있게 추려진 여러 개의 겹들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지새웠던 새벽들은 아무 의미 없어졌다. 퇴색도 아니다. 애초에 색이 없이 만들어진 것에 무슨 퇴색은 퇴색.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침대 맡에 걸터앉아 절망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싸매고 한 껏 슬퍼한 후, 내일 아침을 두려워하며 수면제를 털어먹고 오지도 않는 잠을 부르러 멀리까지 마중 나갔다 오는 것뿐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내 인생 최고의,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고 인간으로서 만개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냘은 정말 비참하고 가난하기 짝이 없다. 내일은 무겁고 오늘은 깔려 죽었다.


6월 18일

개체수 조절이 필요하다. 관리자로부터의 요청이었다. 감정을 줄이고 이성을 찾아오는 것이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사용의 과도함 때문인지 근래 들어 더 초점을 자주 잃는 오른쪽 눈을 위해 무리해서 안경을 맞추었다. 오늘이 3월부터 부재중인 나의 글에게 기별을 할 수 있는 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지 정도가 있다. 지나친 사용이 오용이라 불리듯이 내가 급한 대로 끌어 쓴 것들은 부작용을 낳았다. 치우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으나 예정되어 있던 날. 그 이전에 거친 클레임이 있었다.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나. 아마도 먹는 마음을 늘리는 것이 옳다. 먹는 잠도 늘릴 때가 왔다. 혼자 청승 떨며 글을 쓰는 이런 밤들은 이제 정말 미미한 위안만을 줄 뿐이어서.


6월 19일

정말 마주하기 싫은 날이었다. 삶을 적절히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시기심이 들 정도로 나의 방식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하필 이런날에 가족들에게는 행사가 있어서 가족친지들 앞에서는 웃는 얼굴로 내 근황과 괜찮음을 알려야했다.

나는 이런거 잘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비참함을 들키지 않으려는 마음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게 한 것만 같다. 비참함아 고마워.


침범하지 않으려 하는 나의 기질이 오늘날엔 독이 됐다. 아주 심하게 나를 앓게 할 것만 같다.


이번 여름은 아마 정말 많이 아플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경감할 수 있는 대책이 있다면 뭐든지 끌어다가 써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아마도, 아마도. 늘 그랬듯이 시작과 동시에 끝을 바라는 어떠한 고단한 일들이 찾아오면 그동안에도 으레 그랬듯이 많은 것들이 망가지고 부서질 것이다.

내가 그것들을 보상할 수 있을지, 고쳐 쓸 수 있을지 알지 못함이 내 어깨를 누른다. 미리 가서 대출심사를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은행에 가져갈 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의 모든 감동을 모아,

우울과 행복, 슬픔과 경외를 모두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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