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 아니, 이번엔 더러운 여름

내년엔 깨끗한 여름이 되기를 바랄게요

by 글헌

6월부터 8월의. 사랑 없는 소모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나로부터,


효용감에 대하여!


여느 때와 같이 낙심한 어느 날에 들은 이야기였다. 효용감으로 삶을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말. 그날의 나는 글의 수사와 표현들을 아주 많이 덜어냈고, 더 많이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료가 좋으면 별다른 양념 없이도 맛 좋은 먹거리로 기능할 텐데 나의 글은 조미료 범벅의 정크푸드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맛이 있는 글과 말. 모두 맛, 이 있다. 그러나 꾸준히 먹을 수 있는 것은 의외로 입에 넣었을 때는 별 맛이 없는 흰 밥과 흰 빵. 주식이 가진 특질을 무미하고 무자극한 일로 절하하지 않고 들여다보니 그들은 꾸준히 작동하는 담백함으로 지속 가능성함을 내재하고 있었다.


파편처럼 흩어진 글을 메모장에 흩뿌리고 나서 미루고 미룬 뒤 오려내 조합해 내야만 그나마 볼 수 라도 있는 줄글이 된다. 몇 달여간 방치되어 변질된 글의 맛이 아마 더러운 손과 비위생적인 조리환경에서 만들어진 음식의 맛과 같은 듯하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삶에 걸쳐서 적용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나는 대략적인, 혹은 지침으로 있어준 그 말을 삶 전반에 적용하고 있던 모양이다. 나의 삶의 형태는 내가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무엇에 적용하냐에 따라서 기능을 달리하고 모양을 달리했다.


내가 해주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 그런 사람은 없다. 좋은 학교에 진학해도, 보기 좋은 몸을 만들어도. 호불호를 짓밟을 정도로 매력적인 성격을 가지려고 무던히 애써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은 일방적인 충돌이 아니었던가. 충돌주의! 낙석주의! 돌발상황이, 우발적 사건이. 그리고 이유가 없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나의 무의식이 진정 원하는 것이었을까.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 말들이 정말 불필요한 소모를 정제한 후의 결론이었다.


7월 2일

삶이 정말 맛없다. 6월 말에 써놓았던 글을 복기하고, 7월 초에 써둔 글을 디벨럽 하면서 써둔 시놉에는 흐린 개성에서 오는 담백함에 대한 부분이 있다.


맛이 없던 그날들은 아마 조미료와 자극적 식감에 매몰된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그날의 나는 음미하지 못했다.


높아져버린 역치로 인해서 능력을 잃은 말초가 경고한다. 이 이상은 비가역적 영역이라는 것을 본능이나 생존의 범위에서 알려온다.


7월 6일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은 나한테난 그다지 좋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도리어 단조로운 취향이 극한의 개성의 시대에는 몰개성으로 치부되는 것일까.


대개 유행은 젊은 날의 인간들을 흔들지만 그것이 내면의 깊은 울림까지 되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엄한 곳에서 하는 엄한 일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찾으라고 하던데 메신저를 공격할 마음은 없지만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사랑할까?


7월 7일

폐허라는 단어조차 사치스럽다. 좋던 것이 싫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날의 나는.


외면했다. 마치 공중도덕을 모르는 사람의 분리수거와 같이. 온갖 것들을 때려 넣고 봉투를 묶어 버렸다.

시사탐사 프로그램에 나올 거 같은 쓰레기장과 흡사한 방의 안에 꾸역꾸역 갖은 잔해를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누가 이렇게나 많은 잡동사니를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보이지 않으면 됐다. 극복은 나와 가장 먼 단어였고 돌려진 고개가 마음을 쓰리게 했다.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달이 차고 기운다.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온다. 그것은 일방적인 흐름이 아닌 순환의 개념으로 우리의 곁에 있다.


산산이 부서진 나를 모아 녹여 다시 제련하기를 몇 번째이던가. 이제 나는 글을 쓰지 않아도 좋고,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좋고. 흙을 만지지 않아도 좋다. 이 일련의 파괴와 재생산을 그만두고 싶다.


애벌레는 고치 속에서 녹아 재구성되어 마침내 찬란한 날개를 편다. 나는 늘 그와 같이 녹아버리고 형체를 잃어버리지만 날개는 온데간데없다. 오히려 머릿속 쟁여두었던 어떤 깨끗한 것들만 지속적으로 소비하고 잃어버리게 됐다.


6월이 지나 7월이 되고 나는 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과정을 지나 또다시 이 협소한 방 안에 흩어진 나의 조각을 쓸어 모은다.


종합심리검사를 왜 했는지. adhd 검사는 왜 졸음이 오는지. 이제는 별 관심도 없게 되었다.

내가 나은 삶을 지향하는 이유이자 목표는 늘 하늘에 떠 있는 반짝이는 어떤 것처럼. 그것은 아주 과거로부터 보내진 빛. 지금의 것이, 오늘의 것이 아니었다.


아, 그저 이 밀려오는 어떤 것들이 나의 코와 폐에 가득 차 이 숨을 가져가주었으면 좋겠다. 내일은 내가 쳐 놓은 내 방의 암막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7월 9일과 10일

불면은 만성적으로 변했다. 자고 싶을 때 잘 수 없다는 사실이 밤을 두렵게 만든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만두고 싶은 것이다. 사는 것도 학교 다니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 자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모두.


그냥 그만하고 싶다 이런 것들은, 자의식이 풍선처럼 부풀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개인적 평가에서의 오만이 있다. 개인에게도 집단에도, 더 크게 사회에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징계로라도 중단의 자비를 구하고 싶다.


7월 12일에서 14일

돌을 씹어 소화시킬 수 없듯이 소화시킬 수 없는 감정들이 있다. 게워내고, 아니. 애초에 먹지 않았으면 좋았으리라.


강아지들이 바닥에 있는 물체들을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모습을 본다. 아마 강아지는 후각이 발달했으니까 적정한 판단을 내려 입에 가져다 넣겠지만 인간위주의 세상에서는 강아지가 먹지 말아야 할 것이 퍽 많아 보인다.

주인들은 오물거리는 반려동물의 입을 벌려 퉤 퉤 퉤.


납은 발색제로서 아주 뛰어난 성능을 가졌다. 때문에 유해성이 검증되기 전까지는 페인트에 많이 함유되어 있었고 많은 가정집에 납이 섞인 페인트가 발렸다. 페인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벽면에서 떨어져 나갔고 불행하게도 많은 어린 아기들이 자극적인 색깔의 페인트칩을 먹고 목숨을 잃었다.


검증도 판단도 할 수 없는 것들. 혹은 나의 무지나 능력 부족으로 알 수 없는 것들. 보호받지 못했기에 피할 수 없던 것들.

이 마음은 돌멩이인가? 이 달큼한 냄새가 나는 초콜릿을 내가 삼키면 치명적일까? 이 알록달록한 색깔의 슬라이스는 어디서 온 거지?


글도 어지간히 슬퍼야 써지는 것이다. 비명도 적당히 놀라야 지르듯이.


7월 18일

불쾌한 낯섦들이 있다. 어찌 새로운 것이 유쾌할 수만 있겠는가. 쾌, 뭐랄까. 교수님은 시각적 쾌, 제작과정에서 제작자로서의 쾌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디빌더들은 수축과 이완에서 쾌를 발견하고 작가는 자신이 낳은 작업물의 소비를 보며 쾌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탁기가 작았던 모양인지, 내가 세탁기 안에 카펫을 잘 넣지 못한 탓인지. 세탁 가능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불가한 카펫이었다던지.


찬 맨바닥을 밟는 게 싫어서 몇 평 남짓한 공간에 발깔개를 포함해 바닥에 러그가 4개나 깔려있었다. 패턴이 있는 이 카펫은 이 집에 들어올 때에 맞춰서 사서 들어왔던 건데. 마음에 썩 들지도, 그렇다고 쓰지 않을 만큼 취향이 아니지도 않았다.

용도를 잘해주었고 나도 그 충실한 쓰임에 만족했기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깔려있었는데. 혼자 세탁 안 하고 두다가 쉬는 날이 아쉬워 세탁기를 돌렸더니 망가져버렸다.


아낀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얼마 없어 소중하기 때문에 아껴 쓴다? 조심히 쓴다? 그런 말인가.

툭, 세탁기를 여니 떨어져 나오는 보푸라기와 실밥들을 보고 알았다. 아 난 이 러그를 퍽 아끼고 있었구나.


나의 삶의 아낀다는 말에 대용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내가 아꼈던 게 있던가. 물도 전기도, 마음도 생각도 아낌이 없던걸. 아꼈다면 여분이 있었을 것이고 그 여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을 텐데.


있을 때는 모른다. 잃어야 아낀 줄 알게 된다.


7월 말의 이야기, 31일까지.

하루아침에 세상에서 사라지는 취미가 있다니 참 놀랍지 않니?

취미 없는 나로서는 진짜 뼈아픈 일인걸.

애초에 취미로 성립될 수 없는 일을 취미로 삼아서 그렇다. 기름이 어찌 물 대신 섭취될 수 있을까. 난 기계가 아니다.


해이하게 살아도 잘 풀릴 수 있다면. 나는 풀어진 눈과 하늘 한 손짓으로 일상을 끌어가고 싶다. 악몽은 새벽의 나를 깨운다. 어젠 교반기가 다 부서져서 산산조각 났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비가 올까 말까 하는 꾸물꾸물한 이런 날씨는 질색이다. 솔직한 사람은 검증이 필요하다. 마치 견해와도 같다.


파편적으로 메모장에 적힌 문장들을 한 문단에 버무려놓으니 꼭 자신만 아는 사건들을 뒤죽박죽 섞어 가사로 쓰는 어느 래퍼가 생각난다. 가을은 내 여자친구처럼 갈색,


7월의 마지막 날. 1년, 12달 중 한 달이 또! 절뚝대며 지나갔다.


심리 검사에는 꼭 이런 질문들이 있다.

‘내가 지은 잘못은 용서받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나는 지금 스스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늘 매우 그렇다에 체크를 했다.


사람들은 과거를 전체양에서 어느 정도나 기억하고 있을까.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기억을 모아 모아 뭉쳐놓아도 빈자리가 많을 것 같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크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남은 한 해는 5개월보다 큰 시간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8월 3일과 4일

생명력은 담을 타고 올라가는. 서포터 스틱을 감아 올라가는 덩굴에도 있다


소각. 내가 버린 것들은 어디로 갈까?


굳세고 단단한 마음이 있는 반면 툭 건드리기만 해도 넘쳐버리고 잠깐만 실온에 두어도 상해버리고 녹아버리는 마음이 있다.


남들의 행복을 조망하는 것에 지쳐 도망친 블로그, 블로그를 하는 친한 친구들에게 서로 이웃을 하자고 했다.

서로, 이웃. 그렇다면 일방적인 이웃도 있다는 말이 되는 게 참 우습다. 그냥 단순히 팔로잉과 팔로워라는 말을 이웃으로 대변하는 것이겠지만 이웃이라는 단어는 계속 보아도 익숙지가 않다.

이웃이라는 개념이 흐릿해지는 세대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웃이라는 것이 실제로 사라지는 대상이라 그런 것일지도.


전화 한 통이면 부를 수 있는 것들의 간편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전화기 터치 한번, 문자 한 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무수히 많다. 어떠한 삽화를 겪으며 저질렀던, 혹은 처리했던, 혹은 이루었던 많은 일들이 간편함의 수혜를 받은 경우가 많다.


간단한 문의만 넣으면 에어컨을 고치러 오고 메뉴만 고르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배달 온다. 심지어 마음도 문자메시지로 부를 수 있다니. 문명의 이기에 탑승해 있지만 정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내가 이해하기에는 크다.


기온이 어떻던 날씨가 어떻던 밖을 헤집고 와준 사람들에게 감사했지만 내가 그들에게 제공한 쉼터와 먹거리는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었음에 드는 미안함에 고개를 들었으나 똑바로 응시할 용기가 없었다.


단기적 이익과 기만 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부르는 이름이 있다. 그들을 집에 보낼 때 드는 생각은. 그들은 떠나는 여정에서 오늘을 어떻게 기억하고 받아들일까에 대한 생각이다.


늘 부끄러움이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읽는다. 식상한 표현인 개미와 코끼리. 주관은 허무맹랑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들에도 의미를 부여해 주고 생명력을 가진 말로 만들어준다.


곰살맞은 장난을 좋아하며 자란 부유층의 자제는 스스로의 생을 부끄러움이 많다고 지칭했다.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 후안무치한 사람으로 생을 끝내게 될지 누군가의 은인으로, 변화의 기점이자 말뚝으로서 기억될지 알 수 없다.

아마 한국나이 29살의 내가 평의 한 바로는, 열정이 식은 용광로에 끓인 라면. 식어가는 용광로라도 라면을 잽싸게 끓일 정도는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이 라면을 끓여 먹는 정도에 머무르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거대한 철의 모임을 다시 붉게 발그레하게 만드는 일은 내 능력 밖의 일이 아닌가?


지속적으로 모티베이션을 얻고, 잘하는 사람을 관찰하고 멋진 사람을 답습하고 그들의 생활양식이나 하는 일들을 모조리 흡수하고 적용하다 보면 나 또한 새로운 버전의 영감을 주는 이가 되지 않을까


잠이 전혀 올 수 없는 밤의 정신이 줄글을 쓰게 했다. 구구절절한 말들에 졸음의 끈적함과 그 와중에 든 생각 속 정수의 고요함이 있다.


*8월 7일

악몽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들이 나온다. 가마가 폭발하고 교반기가 부서진다. 가족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이미 사진도 기억도 다 사라진 연인이 등장해 나를 흔든다. 흔든다고 흔들리는 꿈속의 나의 모습을 현실에서도 보게 될까 봐 두려움이 엄습한다.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 내가 익숙하고 알고 있는 공간에서 발생한다. 꿈의 나는 절망하고 주저 앉는다. 꿈속의 내가 몰던 두카티는 망가지고 cls는 반파된다.


보이기 싫은 모습들을 들추고 나를 발가벗겨 광장으로 내몬다. 오히려 이용해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말했다.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는 것이 두려움의 극복의 첫 시작이라고.


알고 있지 않은가. 뼈아픈 시련과 가슴 찢기는 실연 후에는 정식으로 대면하고 자주 들여다보아서 내가 속상했기 때문에 점찍어 놓았던 슬픔들에 대응하고 파훼법을 찾는 일이 나의 삶 전반의 숙제라는 사실을.


8월 10일

싫어하는 아티스트가 늘어간다. 언젠가의 카모와 존박, 그리고 죠지. 널 지워야 해는 발매 안 해서 목록에서는 뺐다.

가고 싶지 않은 동네가 늘어간다. 언젠가의 수원시청, 부천. 10년 전 갔던 해운대의 바다. 중구의 풍경들. 해방촌의 고즈넉한 모습. 그리고 제주도의 자연, 가족들과 자주 갔던 이야기들도 모두모두 훼손되어 스러져갔다.


아스라이, 손 끝에 느껴지는 이 스위치는 한번 누르면 다시 올라오지 않는다. 영화 상영관에서 영화가 끝나고 나올 때 일방향으로만 열리는 그 문처럼. 나오고, 닫히면 그곳에서의 할 일은 끝난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건 무엇인가. 어디와 맞닿아 있는가. 꽃과 바위에 비유되는 그것을 쫓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 포장이 그럴싸한 말들은 꾹 묶은 리본으로 봉해졌지만 나는 안다. 더 이상 이 말들은 효력이 없다. 상대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제 우뭇가사리나 묵같은 물컹한 식감의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답례품일 뿐이다.


8월 25일과 29일

왜 기쁨을 준 사람들은 결국 기쁨을 앗아갈까? 이유를 묻기보다는 받아들이는 편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쁨을 준 사람들은 기쁨을 앗아간다. 등장과 퇴장의 원리에 손을 얹고 받아들이려고 했다. 변화만이 유일한 상수이니까.


뭉툭한 송곳은 그 이름도 빼앗기고 역할도 빼앗길 따름이다. 무뎌도 칼이라고 불러야 하나? 유명무실한 것에는 박탈만이 있다.


항목화 하려는 사람들과 항목화 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무한한 투쟁, 규격화와는 다른 한정된 인간성을 위하는 집단의 이기.

개인 속에 수많은 집단이 있다. 타인의 내부는 어떨까 하다가도 이내 생각을 그만두었다. 적어도 나의 안에서는 개성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이는 집단들이 곳곳에 터를 잡고 있다.

내가 항목과 규격을 정하려고 한 것은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 컸다. 그런 제한적인 요소들의 안에 있는 것들은 안전했다. 그러나 재미는 없었다.


일전에 써둔 무미하고 무자극한 것에 대해 다시 떠올린다. 자극추구는 뻥 뚫린 구멍의 지름을 넓힐 뿐이었고 실제로 내가 원했던 것은 보호에서 벗어난 규격 외의 것들이었다.


뭉툭한 송곳과 무딘 날로 뚫고, 썰면 정말 더러웠다. 실제로도 더러웠고 기분도 더러웠다. 24년도의 여름에는 더럽다, 불쾌하다 이런 수식어가 달렸다. 상수에 대처하지 못한 내 책임이다.


다 써놓고보니 글이 엉망진창이다. 아마 이후의 나는 이 글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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