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광 기록일지] 4교시
2023.03.25. 맑음
죽고자 하면 살 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더니, 기대를 거의 내려놓고 있던 오늘, 아주 운 좋고 감사하게도 루클라 공항에 입성할 수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아침 루틴이었다. 일어나서 머리를 대충 감고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에 왔다. 어제보다도 비행기 출발 시각이 늦었기에 아마 오늘도 힘들겠거니 싶었다. 대기줄에는 어제 비행기를 함께 못 탄 동기(?)들이 보였다ㅋㅋㅋ 어제 그 에베레스트 2번간 아저씨와 얘기를 했는데, 내가 아마 오늘도 못 가지 않을까라고 하자, 오늘은 루클라 날씨가 좋아서 아마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순간 마음이 좀 동요했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 역시 불어나는 법이니, 금방 다잡았다. 어제 한국말 잘하시는 공항 직원 분께서 오늘 혹시 앞 비행기 편 자리가 좀 남으면 자기가 한 타임 당겨줄 테니 일단 일찍 오라고 하셨었는데, 나는커녕, 원래 앞 타임이었던 사람도 비행기에 짐이 너무 많아서 밀릴 판이었다. 스스로 기대 안 한다면서도 살짝 붙들고 있던 기대마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어제와 같이 티켓을 받고 대기실에 앉아서 오전 11시쯤까지 기다렸나? 앞 비행기들은 슝슝 잘 갔다. 이때 즈음 오늘 정말 루클라 날씨가 좋구나, 싶어서 나도 희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 차례가 왔다. 버스를 타고 비행기로 가면서도 어제처럼 변덕스러운 루클라 기상 상황에 의해 순식간에 엎어질 수 있었기에 들뜨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비행기에 싣기 위해 짐차에 옮겨놓았던 승객들의 배낭을 직원들이 갑자기 다시 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 갑자기 기상이 안 좋아졌나 보다, 역시 오늘도인가.. 싶어 기분이 착 가라앉았는데, 곧 또다시 짐을 싣기 시작했고, 비행기 탑승까지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지금도 왜 짐을 내렸다 다시 실었던 건지는 모른다ㅋㅋㅋ
인터넷에서 본 것처럼 바로 비행기 왼 편에 앉았다. 왼편에 앉아야 하늘에서 에베레스트를 내려다볼 수 있다고 했는데, 막상 산이 워낙 많아서 뭐가 에베레스트인지 알 수가 없었다ㅋㅋㅋㅋㅋ 우리의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는 딱 겉으로 보이는 만큼 흔들렸다ㅋㅋㅋ 30분 정도 소요된 비행기는 곧 공항에 도착했다. 솔직히 루클라 공항의 활주로가 워낙 착륙하기에 난이도가 높고, 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공항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만큼 착륙할 때 은근히 긴장을 했다. 물론 훌륭하신 파일럿분이 능숙하게 기체를 다뤄 우리의 꼬마 프로펠러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공항은 전해 들은 악명이 이해가 갈 만큼 높은 산봉우리 한가운데 절벽 위에, 우뚝 지어진 공항이었다. 고산지대로 올라와서 그런지 온도차이가 많이 느껴졌다. 공항을 나가면서 어디 서류처리 같은 걸 하고 나가야 하나 했는데 그냥 버스터미널처럼 나가면 됐다ㅋㅋㅋ 공항에서 나와 나의 EBC 등반을 도와줄 포터를 만나 인사를 간단히 나누고 공항 앞 포터의 누님이 하시는 롯지에 들려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며 대강 등반 스케줄을 조율하고 통성명을 했다. 포터의 이름은 가지였다. 첫인상은 뭔가 말수가 적고 착한, 순박한 사람 같았다. 뭔가 묵묵맨 스타일? 리드하기보다는 맞춰줄 것 같은 스타일이었다. 나이도 30살이어서 딱 우리 친형 나이였다.
아침을 안 먹은 탓에 꽤 많은 양의 점심을 금방 해치우고 본격적으로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첫 번째 도시인 팍딩이었다. 올라가면서 에베레스트 등산 퍼밋, 허가증을 발급받고, 약 2~3시간 정도 걸은 것 같다.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3시 30분쯤 됐다. 올라오면서 블로그와 유튜브에서만 보던 집들과 야크, 말, 닭, 수많은 동물들을 봤다. 새삼 내가 정말 에베레스트에 와있구나 싶었다. 중간에 있는 빙하수가 녹아 흘러내려 만들어진 강도 색이 옥색깔이어서 엄청 이뻤다. 소름인 돋는 점은,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트레킹을 시작하자마자 구름이 순식간에 껴버려서 결국 우리가 카트만두를 뜬 마지막 비행기가 됐다. 가지도 하마터면 오늘도 못 올 뻔했다며, 내가 운이 좋다고 했다.
숙소는 고지대에 위치해서인지 추웠다. 게다가 땀도 식으면서 더 추워졌다. 서둘러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물이 졸졸 나오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뜨거운 물도 나와서 에베레스트에서는 거의 호텔 수준이었다. 근데 여기도 샤워기는 수압이 너무 약해서 그냥 수도꼭지 틀어놓고 오늘도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전도식 샤워를 했다. 샤워백을 열어보니 수분로션 마개가 열린 건지 내가 안 닫고 넣은 건지 줄줄 새서 안이 엉망이었다. 하나하나 씻으며, 그래도 위에 물도 안 나오는 곳에서 터지지 않은 게 어디냐 하며 닦았다. 샤워하고서는 이른 저녁을 먹고 침대에 침낭을 펴고 누워 미리 저장해 온 LCK를 봤다ㅋㅋㅋㅋ 그래도 누워서 좀 쉬니까 좋다. 아마 내일은 약 5시간 정도 등산을 해야 할 것 같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모든 준비를 해놓고 7시에 아침 먹고 바로 출발할 예정이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 오늘은 이제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