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했는데 결항

[세계관광 기록일지] 3교시

by 관광학도

2023.03.24. 맑음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아닐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그냥 평범한 여행자였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해 공항에 도착해 6시간 정도를 기다린 나는, 결국 비행기를 못 탔다. 냄새만 슬쩍 '킁' 맡아본 수준이었다.

아침 8시 30분 네팔 국내선 비행기였기에 늦어도 공항에 7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부랴부랴 씻고,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갔다. 가는 길에도 역시 택시 흥정이 있었는데, 그새 3일 차라고 보다 여행자답게 흥정을 했다. 택시기사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따위는 협상의 고려 목록이 아니었다. 5000원에 합의 보고 공항에 가서 대기를 했다.


공항에 도착해 약 40분 정도 기다려 짐을 맡기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기다리면서 어떤 네팔 현지인분과 스몰토크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에베레스트 정상을 두 번이나 다녀오셨다고 했다. 뭔가 인자하게 생기셨는데, 그런 반전 이력이 있음에 놀라며 새삼 내가 지금 네팔에 있구나 싶었다.


다른 항공사들은 다들 카운터가 4~5개씩 있는데, 내가 타는 항공사는 카운터가 하나였다. 그것도 굉장히 남루해서 이거 괜찮나..?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내가 탈 국내선 비행기는 프로펠러가 달린 꽤 작은 사이즈의 비행기여서 허용 중량이 15kg 정도인데, 내 짐의 무게를 재보니 23kg이 나왔다ㅋㅋㅋㅋ 머쓱;; 하지만 애초에 추가요금을 내고 등산에 필요한 짐을 전부 가져가겠다는 각오로 짐을 싼 거였어서 기꺼이 지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추가 요금이 만원? 정도였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생각보다 꽤 저렴해서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 와중에 카운터 아저씨(직원)는 한국어를 되게 유창하게 하셨다. 정말 거의 준 한국인 급이셨다. 한국어로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길래, 천안이라고 했더니 바로 선문대를 말씀하셨다;; 아니 내가 네팔에서 선문대를 듣게 될 줄이야;;

3.1.jpg 침낭과 각종 등반에 필요한 장비를 욱여넣은 내 23kg 배낭..

체크인하고 대기실로 들어갈 때가 8시 10분쯤이었으니 비행기가 좀 늦게 뜨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여의치 않은 기상 상황 때문에 지연시간이 계속 길어졌다. 루클라 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공항 중 하나'라는 수식어가 있을 정도로 공항 시설이 열악하다. 산 중턱에 지어져 있어 활주로의 길이도 짧고, 기상상황도 시시각각 변해서 원하는 날짜에 루클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고 했다. 중간에 직원분이 한 타임 앞 비행기로 당겨줬음에도, 탑승시간은 계속해서 늦춰졌다. 비행기가 지연될 때마다 나도 루클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포터에게 전화해 지연 소식을 전했다.


계속 기다리다가 아침으로 공항에서 햄버거를 사 먹었다. 내용물이 굉장히 겸손한 햄버거였는데도 3000원이나 했다. 300 루피면 네팔에서 한 끼 식사인데.. 햄버거를 먹고 기다리며 어제 밀린 일기를 썼다. 그러다 몇 시쯤 됐을까, 내가 탈 비행기 번호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명당인 비행기 왼쪽 자리에 앉고 싶었던 나는 후다닥 달려갔다(매우 작은 비행기라 좌석이 따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비행기 활주로 같은 곳으로 나갔다. 이때 너무 설레고 신나서 당장 고프로를 꺼내 들고 당장 영상 찍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잘 가던 버스는 활주로 구석 쪽으로 향해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그대로 멈췄다. 또 갑자기 루클라 공항 쪽 기상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못 갈 거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정말 설마의 설마 정도? 약간 무의식에서만 의식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대로 1시간 정도가 흐른 뒤에, 나는 다시 공항에 있었다. 내 뒷 루클라행 비행기들 역시 하나도 뜨지 못하고 지연됐다. 루클라 공항이 워낙 날씨에 예민해서 결항이나 지연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왠지 나는 아닐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그냥 평범한 여행자 1이었다.. 심지어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던 서양인 여성분은 어제도 못 타셨다고 했다.

3.3.jpg "빈 버거가 요란하다"

계속 기다렸지만 기상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고, 나와 함께 비행기를 기다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새 하나둘씩 사라졌다. 아무도 공식적으로 항공기가 취소 됐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여기 저거 물어보고 다니는데 내 항공사 카운터에는 사람이 계속 없었다;; 지나가던 또 다른 한국어 능력자분께서 나를 보고서는 내 표를 들고 직접 이리저리 물어봐주셨지만, 아쉽게도 소득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직접 나서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터덜터덜 걸어 나와 당장 오늘 묵을 숙소를 예약하는데 어떤 아부다비 분이 말린 대추와 사과를 주셔서 조금이나마 기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사람으로 인해 힘을 얻는 게 또 여행의 맛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오랜 기다림과 실망감에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숙소에 돌아와 냅다 누워버렸다. 숙소에 오는 길에 어제 갔던 로컬 식당에 들러 점심 겸으로 모모라는 만두를 시켜 먹었다. 어제는 배가 고파서 맛있었던 건지, 아니면 오늘 츄라이 한 모모가 맛이 없는 건지 결국 좀 남겼다. 소고기 만두 같은 거였는데, 고기 잡냄새가 좀 났다. 숙소에 들어와서 잠시 쉬며 기력을 보충하고 반팔에 작은 힙색 하나 메고 다시 타멜 거리로 나왔다. 아침에 중요한 물건을 넣어놓는 작은 가방의 지퍼가 기어이 본인의 레일을 탈출해 버려서 가방을 새로 사야 했다. 더불어 얇은 장갑과 물통, 엽서, 가방에 붙일 네팔 국기 뱃지도 사기로 했다.

3.5.jpg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에는 안 좋을 수도 있다. 그 와중에 라씨(음료)는 선택이 아닌 필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그래도 밖에 나와 돌아다니니 꿀꿀했던 기분이 좀 풀렸다. 내가 딱 생각하던 뱃지를 발견해서 구매하려고 했는데, 아니, 참, ㅋㅋㅋㅋ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게, 뱃지 두 개를 사는데 15000원을 달라고 했다, 정말 이건 누가 봐도 천 쪼가리에 15000원이라는 건 어이가 없었다. 바로 사진만 찍고 뒤돌아 나왔다. 바로 옆 가게에 가져가 물어보니, 개당 1500원에 팔았다. 흥정해서 (이것도 비싸지만) 개당 1100원에 샀다. 지금도 700%를 올려서 팔려고 한 그 녀석을 생각하면 열이 솟구친다. 네팔엔 좋은 분들도 되게 많았는데,, 하여튼 장사꾼 사기꾼 녀석들이 문제다; 그 외에 슬리퍼(4000->2500), 물병(6500->4000), 장갑(6500->3500), 가방(20000->18000)으로 흥정을 통해 다 샀다. 가방은 흥정을 많이 못했는데, 여러 군데 돌아다녀 봤지만, 마음에 드는 녀석은 그것밖에 없었던 데다, 그 가격에 가방을 구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 그냥 구매했다. 어제 등산용품들을 빌렸던 렌탈샵에도 들려 오늘 비행기가 못 떠서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 추후에 돌아와서 추가금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3.6.jpg 이게 만오천 원? 사장님 맞을래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처음에 한국어 능력자 네팔 아주머니께서 밥을 사주셨던 로컬식당에 갔는데, 오늘은 볶음밥이 안된다고 해서 숙소 근처 다른 가게로 갔다. 요 며칠 밥을 못 먹어서 오늘은 밥이 먹고 싶었다. 내가 간 가게는 천장은 약 2M 정도로 낮고, 넓이는 집 안방만 한 작은 식당이었다. 완전히 반지하처럼 밀폐되어 있는데, 거기서 물담배, 연초 등 다양한 흡연자들이 서식하고 있어 고역이었다.. 하지만 타멜 거리에서 하루 종일 흙먼지와 눈이 따가울 정도의 매연에 절여져서인지, 버틸만했다..

3.7.jpg 비행기는 안 떴어도 볶음밥 먹었잖아~ 한잔해~(라씨를)

오늘 기대한 루클라 공항에 못 가게 되어 아쉽긴 하지만, 이것도 여행의 일부인가 싶다. 세계일주를 하는데 뭐 비행기 하나 결항된 게 큰 대수겠는가, 어차피 나는 시간도 많으니 여유롭게 기다려보기로 했다. 내일은 비행시간이 더 늦어서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일도 결항되면 숙소 와서 하루 종일 실컷 영화 드라마나 봐야지!


응~ㅋㅋ 안 가도 돼~(제발 보내줘)

3.2.jpg 앞으로 난 티켓팅 표를 몇 번 더 체크인해야 루클라로 넘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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