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광 기록일지] 2교시
2023.03.23. 맑음
하루가 길다. 정말 길다. 아침부터 사건의 연속이었다. 한국과 달라진 물 탓에 겪는 물갈이인지, 아니면 그냥 물이 더러운 건지, 피부는 첫날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긴, 밖에 나가면 매연과 먼지바람이 뒤섞여 눈과 코가 매울 정도로 공기 질이 안 좋으니 피부가 반응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물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나왔다. 오늘 목표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등산 장비들을 빌리는 것이다. 워낙 장기 여행을 계획하고 나왔다 보니 최대한 짐을 간소화시키기 위해 등산화를 포함해 등산 관련된 어떤 장비도 챙겨 오지 않아, 현지에서 필요 물품들을 조달해야 했다. 원래 넉넉하게 11시까지 나오려고 했는데, 짐을 싸다 보니 체크아웃 시간인 12시 거의 맞춰서 나와 벌임;;
숙소에서 나와 타멜 메인 거리에 막 들어섰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우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니 어제 네팔 오는 비행기에서 내 뒷좌석에 앉아 내가 네팔어로 안녕하세요, 감사해요 가 뭔지 여쭤보며 스몰토크를 나누었던 네팔 현지인 아주머니셨다. 아주머니는 한국과 연이 깊으신 듯, 한국어를 굉장히 유창하게 구사하시는 분이었다. 그분은 유창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어제 비행기에서.." 라며 말을 걸으셨고, 당연히 곧바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너무 신기하고 반가워서 인사를 나누는데,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시길래, 아직이라고 했다. 그분은 맛집이 있다며, 나를 데리고 옆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다만 워낙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현지인들의 사기행각이나 호객행위에 대한 글을 많이 보기도 했고, 여행초기라 경계심이 높았기에 순간 아, 이거 호객행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가격을 물어봤는데, 저렴하고 맛있다며 날 일단 식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식당에 외국인은 나뿐인 걸 보니 로컬 식당인 듯했다. 아주머니는 직접 메뉴까지 시켜주시고, 나에게 “네팔에 온 걸 환영한다. 이건 환영의 의미로 내가 사겠다, 부디 즐거운 여행을 하길 바란다”며 홀연히 떠나셨다.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긴다는 게 신기하고 너무 감사했다. 아주머니 덕분에 여행의 시작이 맑았다. 식당 직원들도 다들 친절했고, 내가 시킨 '치즈 커리'와 '난'도 맛있었다. 청결은..ㅋㅋㅋ 창문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고 바로 옆은 흙 주차장이라 차가 들락거릴 때마다 흙먼지가 날리지만, 뭐, 이런 게 싫으면 여행하겠는가! 오히려 무료 토핑을 넉넉히 얹어 먹으니 비로소 로컬의 맛이 완성되는 듯했다.
오늘 묵을 숙소에 짐을 풀고 어제 공항에 내리자마자 영업당해 예약한 EBC트레킹 잔금을 치르러 타멜 거리에 위치한 여행사로 갔다. 아니, 근데 트레블 월렛 카드가 도통 결제가 되지 않는다. 달러로 설정을 변경하여 결제를 해봐도 마찬가지다. 하.. 트레블로그 카드도 역시 먹통이고, 역시 믿을 건 비바카드뿐이었다. 해외여행 국룰 카드 삼신기를 전부 동원한 끝에 겨우 결제를 마치고, EBC(Everest Base Camp) 등반 관련 서류 작업을 마무리했다.
다음은 하이킹에 필요한 신발과 패딩, 침낭을 대여하러 상점 발품을 팔았다. 타멜거리는 등산을 위해 네팔을 찾은 세계 각지의 트레커들이 모이는 메인 거리였기에 상점이 많았지만, 여행자가 많은 만큼 가격 역시 아주 사악했다. 게다가 등산화를 빌려주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침낭이나 패딩은 몰라도 신발은 보통 빌려주지 않는 게 당연한데, 왜 현지에서 당연히 구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갔는지 모르겠다ㅋㅋㅋ 그렇게 등산화 대여 때문에 몇 번째인지 더 이상 세기를 포기할 정도로 많은 가게에서 퇴짜를 맞고, ‘그 상점'에 도착했다.
일단 아들로 보이는 가죽재킷을 입은 소년이 있었는데, 굉장히 거칠고 무뚝뚝해 보였다. 몇 번 말을 걸었지만 역시 단답뿐인 소년이었다. 상점 주인아저씨가 렌탈 가능한 신발이라며 보여주셨는데 사이즈가 한 300은 돼 보였다;; 역시 허탕인가 싶었는데, 그 자리에서 등산화 박스를 하나 뜯더니 새 신발을 렌탈 해주겠다고 하셨다. 순간 당황했지만 나로서는 나쁠 게 없는 선택지였다. 가격은 하루에 2000원씩 해서 총 3만 원이었다. 하이킹화를 새로 사려면 적어도 65000원 이상은 줘야 했기에, 나로서는 좋은 딜이었다. 침낭과 패딩도 여기서 한 번에 빌릴지 고민하고 있는데, 금방 낌새를 눈치챈 주인아저씨가 침낭도 함께 빌려야 신발을 렌탈 해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반납하려면 한 곳에서 빌리는 게 낫다는 생각에 결국 침낭과 패딩을 다 빌렸다. 침낭과 패딩도 각각 하루에 2000원 씩이었다. 그러니까, 침낭, 패딩, 신발 합쳐서 15일간 총 90000원인 셈이다. 15일 일정으로 꽤 나쁘지 않은 가격이라고 생각되어 그대로 진행했다. 일단 당장은 현금도 부족하고 보증금도 없어서 나가서 인출을 해오겠다 하고 나가려는데, 날 붙잡더니 먼저 지금 있는 만큼은 선납부하고 가란다ㅋㅋㅋ 어제 여행사도 그렇고 여기는 이게 문화인가 보다. 하긴.. 손님이 다른 데로 가버릴 수도 있으니 그러는 것 같기는 하다. 나와서 혹시나 싶어 다른 가게에 가 비교해 보니, 침낭과 패딩 하루에 100루피..ㅋㅋㅋㅋㅋ 하.. 두 배를 덤탱이 맞은 거지만, 신발 비용까지 계산해 보면 그래도 내가 빌린 곳이 차선이었다.. 이미 계산까지 했으니 정신승리 해야지 뭐..
보증금 200달러를 부르길래 ATM에서 뽑으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달러는 인출이 안된다. 오직 네팔 루피만 된다ㅋㅋㅋ 하;; 그래서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수수료가 가장 저렴한 ATM 찾아다니고.. 한 2시간 넘게 계속 걸어 다닌 것 같다. 그러다가 너무 지쳐서 일단 소득 없이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이때가 3시쯤이었다.
이번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 ‘달러 인출 ATM’을 찾아다니며, 달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에, 남은 여행을 하는 동안 달러는 웬만해서는 아끼려고 한다. 그래도 보증금은 어차피 돌려받는 금액이니까 일단 한국에서 인출해 온 비상용 달러를 빼 들었다. 나가서 가장 수수료가 저렴한 ATM을 찾아 네팔 루피도 뽑았다. 하이킹을 시작하면, 산에서는 네팔 돈만 받는다고 해서 하루 약 30000원 잡고 15일 분으로 45 + 렌탈비 4 + 네팔 생활비 3으로 약 52만 원 정도를 인출했다.
렌탈샵에서 두 배의 가격을 부른 것에 배신감을 느꼈지만 마저 계산하고 빌린 물품들을 받아 돌아오며 고산병 약, 등산 중 먹을 간식을 샀다. 아니 여기서 또 웃긴 게, 고산병 약을 사려는데, 분명 인터넷에서 1000원이라고 봤는데, 7000원을 부르는 거다 ㅋㅋㅋㅋ 진짜 그냥 놀라움 -> 무시로 이어지는 사고 과정을 거치고, 다른 상점을 찾아봤다. 그러다가 심상치 않은 상점을 발견했는데, 이미 그곳에서는 한 아시안 여성이 여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분이 내 은인이다. 나는 장갑을 사러 들어가서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여사장님이 내가 빌린 물건들을 보더니 얼마에 빌렸냐고 물으셨다. 가격을 얘기해 주고 비싼 건지 물어봤더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 신발 로컬 시장에 가면 24000원에 살 수 있다고.. 했다. 침낭과 패딩 역시 빌리는 가격은 각각 1000원이라고.. 또 한 번 배신감이 밀려들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래도 아주머니께서 다른 약국을 알려주셔서 고산병 약은 1000원에 잘 샀다. 하.. 오늘 겪은 오전과 오후의 네팔은 극과 극이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현지 식당에서 뿌맛? 뿌멋? 뭔가 진한 수제비 국물에 면을 넣은 듯한 음식을 먹었다. 이거 먹고 “나 고수 좋아하네?” 처음 알았다ㅋㅋㅋㅋ 음식은 걱정과 달리 맛있었고, 계란 토핑도 아주 맛났다.
오늘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기진맥진한 상태로 숙소에 돌아와 그대로 기절해서 약 1시간 정도를 잤다. 일어나서 샤워를 하는데, 이상한 게 위에서 나오는 샤워기는 찬 물만 나오고, 밑 수도꼭지에서만 뜨거운 물이 나왔다;; 진짜 뭐냐고;; 하는 수 없이 비굴과 공손 그 사이의 자세로 몸을 잔뜩 낮추어 샤워를 했다.
자기 전 확인해 보니 다행히 다음 여행지인 인도 E-VISA가 잘 발급 됐다. 그래도 여행이 나쁘지 않게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첫날이라니, 하루 참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