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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미 Aug 18. 2023

어머니, 이제 그만 편히 쉬셔요

16년간 요양원 생활 끝에 임종하신 시어머니를 보내 드리며....

“이제 편한 세상으로 가셔서 편히 쉬셔요 어머니…”


하얀 바탕에 은은한 보랏빛이 도는 돌 판 위에 마지막으로 시어머니께 인사말을 남겼다. 다시 한번 눈물이 시야를 가리는 것 같았다. 가엾어라 우리 어머니…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엾은 어머니를 병마 없는 천국으로, 좋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7.25 이른 아침 시어머님이 떠나셨다는 연락이 왔다. 온 가족이 마지막 면회를 한 것이 지난 주말이었으니 3일 만에 떠나신 것이다. 어차피 의식은 없으셨지만 남편과 시동생이 임종을 지켰다. 병원의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옮기고 장례절차가 진행되었다. 남편과 시동생, 시누이는 며칠간 어머니의 상을 치를 여러 절차에 대해 미리 의논을 했기에 일사천리로 예식 치러졌다.


나는 3일간의 장례식 내내 지난 36년의 결혼기간, 아니 연애시절부터 어머니를 알게 되었으니 근 40년에 걸친 어머니와의 애증관계를 생각하며 그 누구보다 안타까움이 컸다. 어머니를 처음 뵌 것은 40년 전 남편이 살던 서울의 한 허름한 동네에서였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계시다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한 어머니는 자그마한 체구에 소박하면서도 인자한 초로의 모습이셨다.


또다시 어머니를 뵌 것은 아직도 살 속으로 파고드는 봄바람이 매서웠던 이듬해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였던 나는 연애 중이던 남편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 근처로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문득 건너편 시장입구에 노인 한 분이 자그마한 좌판을 깔고 도라지 껍질을 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낯이 익었다. 바로 그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신가!


처음 남편과 만났던 날, 그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신다고 이야기했었다. 나는 당연 상가에서 장사를 하시려니 생각했지만 내가 본 어머니의 모습은 겹겹이 끼어 입은 옷이며 얼굴을 두텁게 감싼 머플러며 그 행색이 너무도 초라하고 고단해 보이셨다.


대학 입학 후 첫 미팅에서 만난 남편은 가난한 집 장남으로 가정에 대한 큰 의무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를 미친 듯 사랑하게 된 나는 집도 절도 없는 가난쯤은 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막상 한 평도 안 되는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도라지를 깎아 파는 어머니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 나는 철없는 마음에 하루속히 그와 결혼하여 어머니를 따뜻하게 모셔야겠다는 순진한 결심을 하였고 그날 밤 일기에 나의 다짐을 적으며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스스로 다시 한번 확인했었다.


남편과 결혼 후 시어머니와 나는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한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동지와 같은 관계로 함께 했다. 어머니는 결혼 후 장사를 그만두시고 특수직 공무원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나를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해 주셨고 나를 대신하여 세 아이들의 육아를 도맡아 주셨다.


남편과 맞벌이를 하니 살림은 조금씩 나아져 갔고 나는 시어머니가 다시는 “돈”으로 인해 맘 고생하지 않게 해 드리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하며 어머니를 전적으로 믿고 모든 살림을 맡겼다. 아마 그 시절에 내게 있어 가정적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경기도 인근에 첫 내 집을 마련하여 살 때는 퇴근할 무렵이면 “엄마 차가 언제 오나 보러 가자” 하며 세 아이들과 함께 동네 입구로 나와 나를 마중하곤 하셨다.


휴일이면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남편이 온갖 요리를 해주며 여섯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다. 여름휴가며 주말에도 우리들끼리 여행을  본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로 항상 어머니는 우리와 동행하셨다. 어머니는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며느리인 나를 최고로 치켜세워주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던 분이다.


그런 어머니가 변하신 것은 70대 중반이 지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당신의 건강에 지나치게 집착하시는 모습. 무엇인가 불안해하시는 모습. 건강에 좋다는 모든 것에 집착하셨고 사소한 증상을 가지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셨다. 회사 근무하는 내게 아이를 통해 119 응급차를 부르라 하시고는 걸어서 응급차에 오른 뒤 응급실에서 받아주지 않아 되돌아 오는 경우도 있었다. 신혼 때 어머니는 늘 “너희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건강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달고 사셨는데 그것이 집착이 되었던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의 행동으로 나 또한 매우 지쳐갔다. 어느 날 서울대 병원 안과 정기 검진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미덥지 못해 하시는 어머니의 독촉에 못이겨 또 다른 안과에서 진료를 받았을 때 안과의사가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눈에는 문제가 없고 뇌신경과를 모시고 가보라”는 것이었다.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이상행동들이 모두 치매 초기 증세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수년을 병원을 전전하시다 결국 어머니는 요양원에 입소할 수밖에 없었고 무려 16년을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머니는 예쁜 치매셨다. 가족도 곧잘 알아보셨고 화투 한몫만 있으면 종일 패 떼는 것으로 소일하셨고 세탁된 당신의 옷을 찾아 곱게 접어 정리하곤 하셨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나는 회사의 격무와 살림, 세 아이들 뒷바라지에 점차 지쳐갔고 초기에는 남편과 함께 이 주에 한 번 정도 어머니를 면회 다녔지만 그 또한 결국 남편이 도맡다시피 하게 되었다. 3년이라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겪으며 증세가 악화되어 결국 어머니는 16년이라는 긴 투병 끝에 임종을 게 된 것이다.


입관식을 하며 또 선산에서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기나 긴 세월을 동지처럼 함께 했던 어머니가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요양원에서 치매와 싸워야 했던 것이 너무 가여워 울었고 그러한 어머니를 어느 순간 미워도 했고 면회조차 소홀했던 지나간 애증의 세월을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났다. 입관할 때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뵈며 나는 울면서 속으로 돼 내었다.


    “어머니 잘 가셔요.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셔서 이제 그만 편히 쉬셔요.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못해 정말 죄송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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