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해도 괜찮아
인간 환멸 극복 프로젝트
2022년 겨울,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제작사 대표에게 부당해고 당한 것에 비하면 그때는 원하던 글을 쓰며 돈도 벌고 주변의 아낌없는 응원도 받았으니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몇 안 되는 행복한 시기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당시 내 상태는 무기력증, 우울증, 번아웃으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침대에 누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무기력증과 눈물샘 괄약근이 느슨해진 듯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결정적으로 내가 이 프로젝트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날은 아파트 16층 베란다에 서서 죽자!라고 심플하게 결심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원치 않게 임신된 아이였다. 언니가 태어나고 아빠는 정관수술을 하셨는데 수술이 허술한 탓에 내가 뿅 생겨버렸고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신세를 졌다. 어찌 보면 태생부터 행운 혹은 변수인 셈이었다. 언니는 나와 세 살 터울로 첫 손주(엄마가 장녀)였기 때문에 모든 가족의 기대와 예쁨을 한 몸에 받았다. 그에 비해 나는 톡 깨 놓고 말해서 못생겼었고 공부도 못 했고 내성적인 탓에 친척들은 나를 울보라고 불렀고 좀처럼 귀여워하려야 귀여워할 수 없는 정이 안 가는 아이였(던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언니는 나에게 영어를 가르치다 화병에 걸렸고 엄마는 나에게 산수를 가르치다 까무러졌다고 한다. 어쩌면 내 열등감의 불씨는 이때 발화한 건지도..
어쨌든 미술이면 미술 음악이면 음악,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언니는 당시 최고의 영예였던 학교 단상 위로 올라가 상을 받는 동안 나는 언니 덕 같은 건 보지도 못했고 오히려 선생님들에게 구박 아닌 구박을 받았고 친구들에게 놀림과 무시를 당했다. 이후 내 열등감은 계속 몸집을 키워 급기야 고등학생 때는 나 자신을 지킨다며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쁜 짓도 참 많이 했다. 공부는 일찌감치 포기했기에 반에서 꼴등을 한 적도 있는데 이를 만회하고자 열심히 공부하려고 했던 나에게 어떤 친구는 "그런다고 이번엔 꼴등 안 할 것 같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때 기분 나쁜 티를 팍 내며 화를 내자 미안하다며 얼버무렸던 그 친구의 이름을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말고도 일진인 친구가 자기 물건을 나에게 강매했던 일, 매번 면전에다 대놓고 내 외모를 지적하던 이모, 화장실에 어린 나를 가두고 이불을 덮어씌워 발로 짓밟던 언니, 학원 계단에서 난데없이 내 입에 신발을 집어넣으며 학원 폭력을 가하던 남자아이들, 이에 방관하던 선생님 등등.. 태어난 지 겨우 10년 남짓한 무해 한 아이에 불과했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일들이었고 성격 탓에 속으로만 삭여야 했던 지난 과거였다.
지금부터는 학창 시절과 완벽한 콜라보를 이뤘던 내 가정사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나의 부모님은 단 하루도 서로 다투지 않는 날이 없었다. 아빠는 매일 술을 마시고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소리를 질렀고 엄마도 이에 지지 않고 고함으로 응수했기에 우리 집에선 매일 곡소리가 났다. 그때마다 나는 방구석에 처박혀 일기를 썼고 거기엔 부모를 저주하고 내 생을 저주하는 글들로 가득했다. 큰 방에서 고성이 오갈 때면 숨죽여 울어야 했고,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아빠에게 맞은 것도 부지기수다. 나중에 아빠가 말씀하시길 우리가 엇나갈까 봐 엄하게 대했다고 하시는데 3층 집에 살 때는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1층까지 끌려 내려온 적도 있었다. 대부분 이유는 말대꾸를 해서였다. 참으로 희로애락이 넘치는 살벌한 어린 시절이었다.
해서 결과적으로 어린 시절 내 가슴속에 가장 깊게 자리 잡은 감정이 있다면 그건 인간에 대한 '모순'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서로 사랑한다면서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묘한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괴롭힘을 당했고 선생님들은 대놓고 무시와 차별을 일삼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이 언행 불일치인데 40줄을 앞둔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언행일치를 보이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다. 물론 어찌 인간이 한결같을 수 있나 그때그때 임기응변하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 하지만 조선시대 정조 때 정약용이 <맹자>를 풀이한 책인 <맹자요의>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인의예지의 명칭은 반드시 우리의 실천 이후에 성립한다. 어린애가 우물에 들어가려 할 때 '측은지심'이 생겨도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가서 인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밥 한 그릇을 성내거나 발로 차면서 줄 때 '수오지심'이 생겨도 그것을 버리고 가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가서 의義라고 말할 수 없다. 큰 손님이 문에 이르렀을 때 '공경지심'이 생겨도 맞이하여 절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가서 예禮라고 말할 수 없다. 선한 사람이 무고를 당했을 때 '시비지심'이 생겨도 분명하게 분별해 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가서 지智라고 말할 수 없다.』《출처 : 철학이 필요한 시간》
그러니 음주 운전자를 경멸 한다면서 본인은 음주 운전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을 나는 납득할 수 없으며 봉사하는 걸 좋아한다는 애가 냉장고 청소를 위해선 반차를 쓰면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시간 내길 아까워하는 일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이후 팀장의 모함으로 회사에서 해고당한 일, 아카데미에서 만난 언니에게 난데없는 폭언을 당한 일, 동업하던 친구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금전을 요구하던 일, 사내 불륜을 저지른 친한 직원이 되려 헤어진 남자와 나 사이를 오해한 일 등.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는 인간들의 민낯과 가식으로 내게 인간은 두려움을 넘어서 지겹고 진절머리 나는 존재가 됐다. 이쯤에서 인정하자면 나는 인간을 사귀어서, 나 아닌 타인을 통해 좋은 피드백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경험도 몇 번 없는 연애를 하면서도 좋았던 적이 없다. 물론 간혹 내가 먼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들은 되려 나를 피하거나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 뼛속까지 자리 잡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상처들이 환멸감이라는 마음의 흉터로 자리 잡아 때때로 엄청난 통증을 일으키며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여기에 우울증까지 거드니 그 환멸이 결국은 나를 향하게 되었고 또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스스로가 환멸스러워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데도 수심 5M 아래에 있는 것처럼 숨이 차고 눈을 뜨면 햇볕이 쨍한 하늘에 괜히 부아가 났다. 또 하루가 시작됐구나 싶을 때는 또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슬펐고 내가 오늘도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비극인 것처럼 느껴졌다. 상태가 이토록 위중한데 왜 병원에 가지 않았느냐고? 병원에 갈 의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죽음만이 이 고통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만 같았다. 이게 내가 아파트 16층 베란다에 서서 짧지만 길게 복기한 내 인생의 파노라마이며 굳이 환멸의 숙주를 찾고자 가족들과 친구와 지인들의 만행을 팔아보았지만 결국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몬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고비를 넘긴 다음 날 밤,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어디 매달릴 만한 튼튼한 곳이 없나 눈을 굴리고 있는데 핸드폰에 문자 하나가 띠링~하고 들어왔다. 몇 주 전에 신청했던 컬투쇼 방청 신청에 당첨이 된 것이었다. 사실 컬투쇼 방청은 내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언제 신청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방청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답장을 달라는 제작진의 문자에 고민이 많았다. 이 와중에 방청은 가서 뭣할라고. 기분 좋게 웃을 수는 있을랑가. 방청객들이 많을 거란 예상이 가장 끔찍했지만 고민 끝에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루 더 늦게 죽는다고 누가 뭐래는 것도 아니고.. '참석'이라는 답장을 써 보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대한민국 국민만 오천만이고, 지구에는 60억 인구와 다양한 인종이 살고, 하물며 화성에는 생명체가 발견됐다는 기사도 있는데 나는 고작해야 내 주변과 환경에 속한 사람들을 만났고 이걸로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기에는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잖아. 아직 포기하긴 이른 게 아닐까..!'
처음 자가 출판을 했던 내 책에는 해외여행을 하며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의 따뜻한 추억담이 담겨있다. 왜 내가 잊고 있었을까? 나는 곧장 책상 앞으로 달려가 컴퓨터를 켰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하나씩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간만에 두들기는 키보드에 힘이 실렸다. 살려고 애쓰는 내 마지막 발버둥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글이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일단 내 계획은 이랬다. 해외여행이 아니라 한국에서 여행하듯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자. 1년에 12명의 사람을 만나 좋은 피드백을 얻지 못한다면 그때는 이 세상 미련 없이 떠나자! 그보다 이 계획의 이름은 뭘로 할까? 아 그래, 인간 환멸 극복 프로젝트가 좋겠구나! 계획은 아주 거창했지만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누굴 만나느냐가 난제였다. 이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철칙 중 하나는 만나는 사람이 '누구의 아는 사람 혹은 건너 건너 지인이 아닌 생면부지 남'이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우울증 환자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할 때 실은 진짜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죽음 같은 생을 붙들지 삶 같은 죽음을 택할지.. 그 기로에서 나는 어쩌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고통을 감내할 결심으로 삶을 택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