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운 일 vs 나답지 않은 일

미워해도 괜찮아

by 반딧불


지금껏 나는 이 인간 환멸 극복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독서 모임에 참여하며 운영진을 맡게 된 모든 일련의 행위들이 결코 나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점차 이런 상황들에 익숙해지다 보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가끔은 즐기기까지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생경한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이거.. 애초에 진짜 나답지 않은 일이 맞긴 했던 거야..?

그때부터 시작된 자아 혼란은 한동안 나 다운 일과 나답지 않은 일을 선택함에 있어 상당한 혼돈을 야기시켰고 이로 인해 기어코 내 영혼의 본질과 존재의 진실에 닿기 위한 자아 성찰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크리스마스이브 전날로 되돌아가본다. 나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아침 실시되는 독서 모임에 초콜릿을 사서 갈까 말까로 무진장 고심했었다. 왜냐면 나는 평소 가까운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소소하게 선물하는 걸 꽤 즐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비싼 건 아니더라도 맛있는 과자나 새로 나온 신상 초콜릿, 예쁜 필기구나 텀블러 등을 선물하며 상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행복감을 느꼈다. 허면 모임에 초콜릿을 사 가는 게 분명 나다운 일일 터인데 어째서 이렇게 고민을 하게 됐냐고 하니 때로는 내키지 않은 상황에 억지로 베푼 적도 있었고 선물하는 대상이 항상 특정 다수로 정해져 있었던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체로 베푸는 걸 좋아하지만 그 범주는 내 주변인들에 한정적이었고 그게 꼭 내가 베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생각해 낸 솔루션은 이 일을 운명에 맡기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면 초콜릿을 사서 가자고. 다행히 전날 잠을 설친 탓인지 당일 아침 일찍 눈이 떠졌고 약속대로 얼른 나갈 채비를 하고 마트로 가기 위해 장바구니를 챙겨 집을 나서는데 웬걸? 약 500미터쯤 걸어가다가 갑자기 급 신호가 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고민 따위 시시하게 끝났고 초콜릿도 없던 일이 됐다.


허탈한 마음으로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서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여태 이런 사소한 문제도 결론 내리지 못하면서 내가 나를 안다고 자부하며 감히 난 이런 사람이라고 호언장담했던 게 참으로 부끄럽고 어불성설처럼 느껴졌다. 어느 자기 계발서에는 ‘저것만 아니었다면 난 뭐든 해낼 수 있었을 거다’라는 사람들의 말속에는 ‘사실 나는 뭐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개념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거란 말을 본 적이 있다.

알고 보면 나 역시 지금까지 모든 일들을 하기 싫다, 혹은 하고 싶다는 감정을 혼자 과대 해석해서 이건 진짜 나다운 일, 이건 절대 나다운 일이 아니라고 분리하며 그냥 퉁치고 덮고 넘겨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이금희 아나운서가 쓴 책 '우리 편하게 말해요'를 읽게 됐는데 거기엔 '어릴 적 모습이 본인의 실제 모습과 가장 가깝다'는 글귀가 있기에 곰곰이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내 어린 시절은 앞서 말했듯이 친구들에게 놀림당하고 간혹 불우한 가정환경에 노출된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쌓고 가족들로 충만한 행복을 느끼던 때도 분명 있었다. 성격은 다소 소심한 면이 있었지만 때론 과감한 구석이 있었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땐 확실히 리더십이 강하고 진취적인 성향을 가진 아이였던 것 같다.


일례로 전부 초등학교 때의 일이지만, 축제 무대에 서기 위해 친구들을 직접 모아 댄스연습을 진두지휘했고 친한 친구들을 선동해 장애우 시설에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녹음기를 들고 해운대 백사장을 활보하며 장사를 하는 할머니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다.(아마 당시 인터뷰로 자체 신문을 제작하고 싶었던 듯 하다) 그뿐 아니라 그림을 그려서 친구들에게 50원 100원에 팔아 그 돈을 모아서 기부를 하기도 했고(그림 실력이 꽤 있어 친구들이 공짜로 그려달라는 걸 금전활동으로 치환한거다) 공부를 못 해서 반장은 못 됐지만 인기투표에 이겨 부반장이 된 적도 있었으며 중학교 때는 교내 중창단으로 활동, 고3 때는 개근상 말곤 타본 적 없던 내가 반 대표로 선행상을 받기도 했다. 또 내 주변에는 언제나 친구들로 넘쳤고 남자 50%, 여자 50%의 비율을 항상 유지하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과연 어떤가? 당연히 이와는 정 반대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가장 질색하고 언제 어디서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공기 같은 존재가 되길 선호하며 내 감정보다는 남의 기분과 눈치를 더 많이 살피는 허제비 같은 인간이 됐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힘들어져 한 두명씩 연락을 끊게 됐고 이젠 친구도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대인관계가 협소해 졌다. 또 어릴 적 해야겠단 생각이 들면 일단 지르던 성격도 이젠 생각과 고민만 잔뜩 하느라 허송세월 다 보내는 걱정많은 성격으로 변해버렸다. 이렇게 쓰다 보니 참으로 슬픈 격변의 사례가 아닌가도 싶은데 여튼 어릴 적 자신감, 당당함, 패기 같은 건 눈 씻고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무색무취의 사람이 됐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더 놀라운 사실을 전해주었다. 근래 만난 지인이 말하길 어릴 때 내가 참 말도 잘하고 애교도 많았었다고 칭찬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순간 만감이 교차했는데 그 이유는 언제부턴가 남들 앞에서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게 점점 힘들어져 스스로 말을 지지리도 못한다고 생각해 괴로워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또 어른이 되면서 애교가 많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오히려 조용하고 낯을 가린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란 존재가 이토록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나 스스로를 하나의 인간성? 개성에 가둘 수 있겠는가. 처음엔 아! 어릴 적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세상이 날 이렇게 멍청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돌아가자 과거로!! 내 진짜의 모습을 찾자!!! 이렇게 생각했으나 마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분리된 자아처럼 느껴지면서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뭔데? 지금의 내 모습은 그럼 내 모습이 아닌가? 이도저도 뭣도 아니라는 건가?!(화내는 거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요술램프 속 지니가 튀어나와서 자, 너에게 딱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과거의 너로 살래? 현재의 너로 살래? 라고 묻는다면 과연 나는 자신만만하게 과거로 돌아가겠다 대답할 수 있을까. 짧은 상상만으로도 망설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 내가 푹 빠져 지내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혼숙려캠프와 오은영 리포트다. 도저히 어쩔 수 없이 이혼을 결심하게 된 부부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출연하는 프로그램인데 정말 다양한 인간군상을 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어제도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오밤중에 눈물로 베개를 적혔다. 어릴 적 상처받은 개인이 부부가 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공통점이 있다면 남자들은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가 대부분 문제였고 여자들은 난 원래 이런 여자가 아니었어! 가 대부분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오은영 박사님의 솔루션과 부부 상담을 통해서 이들은 서로 변해보리라 결심한다.



어쩌면 나답다 vs 나답지 않다는 명제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 근저에는 스스로 규정해 버린 자기 모습이 뿌리처럼 깊게 박혀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면 우리는 돌연변이 엑스맨들처럼 때때로 엄청난 범주가 가능한 범상치 않은 인물일런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처럼..

언제 한 번은 언니와 이 주제를 두고 굉장히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긴 대화 끝에 우리가 내린 결론은 굳이 그런 거 머리 아프게 왜 생각하고 있냐는 거였다. 결국 과거의 모습도 현재의 모습도 모두 '나'라는 건 변함이 없고 중요한 건 과거로 돌아가니 마니, 현재가 어떻고 저떻고 후회하고 불평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모습 그대로 가장 좋은 점을 발견해 내고 그걸 가장 가치있게 빛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얼마나 자신의 영혼 밑바닥에 닿기 어려우면 세기의 철학자가 이러한 격언을 남겼겠는가. 아마 우리는 일생을 바쳐도 '나'라는 존재의 밑바닥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도달했다고 해도 잠깐 손끝으로 터치만 하고 오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내면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변화 무쌍한 '가능성'의 존재라고 믿는다면 지금은 다소 불만족스러운 자신에 자책할 일도 그런 자신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일도 나는 이런 사람이라 냅다 우기는 일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 뒤로 나는 나다운 일, 나답지 않은 일을 고민하기보다 세상이 물음표를 던질 때 언제나 느낌표로 응하는 자세를 가지게 됐다. 지금 나 만날 수 있어? YES!, 혹시 이것 좀 해줄 수 있어? YES!, 그렇게 안 할 순 없어?! YES! 이렇게 살다 보니 나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분이 들어서 인생이 더 재밌어졌다. 그리고 그 여유속에 불쑥불쑥 과거의 패기와 당당함이 튀어나올 때 느껴지는 희열은 나만이 아는 기쁨이요, 행복이다.






작가의 이전글관계 분의 속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