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분의 속도(2)

미워해도 괜찮아

by 반딧불



당시 소개팅에 또! 실패하고 본가로 잠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본가에 가면 항상 하는 일이 있는데 내 과거의 흔적들.. 이를테면 다이어리나 편지 등을 정리하는 일이다. 그날도 이상하게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자라나는 잡초처럼 자생 중인 내 다이어리들과 전공서적들을 버리다가 그 사이 오래된 편지 봉투 다발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열어보니 전부 군대 간 남사친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연애나 잘할 것이지.. 왜 쓸데없이 남사친들에게 이런 정성과 시간을 쏟았는지.. 후회스럽다.



그래도 오랜만에 다시 읽은 그 편지들 속에는 그 나이대 또래들의 꽤 진지한 고민들과 별일도 아닌 사소한 일에 발끈하고 치열했던 우리들의 청춘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그렇게 웃픈 편지들을 하나씩 버리다가 생애 첫 남친이 내게 써 준 편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아니, 이게 왜 여깄 다냐? 곧바로 쓰레기 통으로 던져버리려다 마지막으로 한번 읽고나 버리자 싶어 편지지를 펼쳤다.


당시 내 첫 남친의 말에 따르면 그는 나를 오랫동안 짝사랑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웃긴 게 그와 내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대학교 선후배 사이도 아닌, 20대 초반에 친구를 통해 소개팅을 한 사이라는 점이라는 거다. 소개팅 이후 그는 무려 7년 동안 나를 좋아했다.... 고 말했는데 사실이라고 믿고 싶다.



어쨌든 처음 소개받았을 땐 그는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키도 작고 얼굴도 내 타입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외로 내가 그땐 외모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술도 담배도 안 하는 그를 결혼 적령기에 만났더라면 아마도 결혼을 결심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갔고 마침 그때는 내가 연애고 뭐고 관심이 없었던 시절(근데 소개팅은 왜 나갔지?)이라 계속 찔러대는 그에게 당분간 남자 만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 그의 마음을 거절했었다.



내가 거절했을 때 그 남자가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남자 안 만나고 수녀라도 될 거냐고. 하하하. 그는 그 상황에도 유머스러움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에 나도 지지 않았다. 향후 5년은 남자 만날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았고 그 뒤로 나는 진짜 5년 동안 남자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듯 잊을만하면 연락을 해 왔고 그렇게 친구처럼 2년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보고 지내다가 결정적인 그의 고백에 7년 만에 연인이 된 것이다. 당시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 출장을 갔다가 지진이 나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게 고백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 진심 어린 고백에 내 마음이 움직여 버린 것이다. 솔직히 그가 의외로 인기가 많은 남자였기 때문에 이 말도 나에겐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에 불과했지만 어쩌면 그의 말을 그때는 눈 딱 감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로맨틱했달까.



무튼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그와 사귀게 됐는데 그는 정말이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에게 잘 대해주었다. 500Km 장거리 연애였지만 새벽에 집 앞까지 와서 출퇴근까지 시켜주었더랬다. 나는 혹여 그가 졸음운전으로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늘 노심초사해야 했다. 막상 사귀기 시작했지만 사실 나는 경제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안 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일을 찾아 제대로 미래를 꾸려가고 있었고 나는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서 꿈만 좇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그의 한 마디가 내 발작 버튼을 눌렀다. 그는 당시 개인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나에게 “너는 내가 힘든 상황이 되더라도 옆에서 모두 이겨내줄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뉘앙스의 차이는 사실 종이 앞 뒷면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 말이 나에게는 곧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라고 들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너를 고용하는 이유는 가장 부리기 쉽기 때문이야’로 들렸던 거다. 그 뒤로 어느 날 대뜸 너는 왜 날 좋아하냐고 다그치듯 물었더니 어버버 대답하는 그의 태도에 내 가슴은 그야말로 불덩이가 돼버렸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참 꼬인 인간이란 생각이 드는데 인정한다. 지금은 안다. 그 말의 요지는 그만큼 내가 강한 여성인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는 거슬.. 그렇게 헤어진 후 3개월쯤 지났을 무렵 그 흔한 “잘 지내..?”라는 메시지로 연락이 왔을 때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그 뒤로 1년 2년 단위로 꾸준히 연락을 해왔다. 언제 한 번은 내가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져 마음이 힘들 때 뜬금없이 또 연락이 와서 그때 왜 날 차버린 거냐고 되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이별통보는 정당하다 생각했기에 시종일관 뻣뻣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가 기억하는 이별과 내가 기억하는 이별의 사유가 너무나도 달랐다.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오해를 하는 건가.. 다른 여자랑 헤어진 사유와 착각하는 건가..



그 뒤로 또 2년 뒤 연락. 계속 반복되는 연락에 지친 나는 어느 날 담판을 짓자는 마음으로 그에게 처음으로 먼저 만나자고 제안했더니 이번엔 그가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라며 갑자기 발을 슥 뺐다. 이후 그가 한 행동은 턱시도를 입은 사진과 신부가 될 여자의 사진을 자신의 카톡 프로필에 올리는 것이었다. 지딴엔 복수랍시고 한 행동이리라. 나 품절남 됐다! 메롱! 그래 너 잘났다. 그냥 받아줬다. 그리고 또 2년 뒤 연락이 오기에 이번엔 결혼도 한 것 같은데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고서야 질기디 질긴 인연의 끈을 마침내 끊을 수 있었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런 그가 쓴 네 장의 편지를 봉투 다발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다. 더 황당한 건 내가 그 편지를 읽으며 그때도 흘리지 않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네 장의 편지에 그 남자가 꾹꾹 눌러쓴 수줍음과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것이다. 그땐 왜 그의 진심을 몰라줬을까. 아니 왜 나는 그토록 마음이 불안정하고 엉망이었을까. 그 순간 우리 관계를 망친 건 그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의 속도가 빠른 게 아니라 내가 눈앞에 장애물이 너무 많아서 아예 멈춰있었던 것뿐이었다. 물론, 그 남자가 결혼 전 한 행동은 정당방위고 결혼 후 한 행동은 육아 때문에 잠깐 해까닥 한 거겠지만 좌우간 서로가 좀 더 감정에 솔직했으면 어땠을까, 좀 더 대화를 나눴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고 자존감이 낮고 속은 엉망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더라면 나로 인해 그 사람도 상처받지 않고 나도 후회가 남지 않았을 텐데. 그 남자를 잃은 것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전혀 연락할 길이 없지만 만약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사과하고 싶다. 물론 이런 공식적인 사과로 상대의 마음이 누그러질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 마음이 편해지자고 사과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조금은.. 아니 나로 인해 상처받았다면 그걸 좀 내 손으로 문질러 주고 싶은 심정이랄까.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땐 내가 엉망이었다는 걸 몰랐고, 당신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야 이리 고백을 해본다. 그리고 그런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웠다고. 그러니 내 몫만큼 가족들과 더 많이 행복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정신이 번쩍 들었으면 두 번 다시 후회할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바보처럼 똑같은 행동을 지금 이 순간에도 무한 반복하고 있다. 정형종 시인의 ‘방문객’ 시가 드라마에 나와서 굉장히 유명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시를 책에서 처음 접했다.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판다는 게 과연 이런 기분이려나.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이후 상대와 속도가 맞지 않을 때는 그게 상대의 문제라고 단정하지 않고 내 내면을 먼저 들여다보게 된다. 내 마음의 신호등이 지금 내게 무슨 신호를 보내는지 이제는 모른 척하지 않기로.


어느 훌륭한 작가가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건 이 우주에 상처를 주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그래.. 인간도 어찌 보면 이 우주의 일부인데 그럴 수 있지. 그럼 나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우주에 상처를 낸 것일까. 아니 나조차도 한 우주의 일부인데, 난 나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힌 걸까. 생각해 보니 참 구석구석 아파오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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