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분의 속도(1)

미워해도 괜찮아

by 반딧불



코로나로 긴 요양을 마치고 다시 독서 모임에 돌아왔을 때 B와 C님을 만났다. 두 분 다 현재는 연락이 끊긴 상태로 두 분의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써 남겨도 될지 모르겠지만, 양해를 구할 방법이 없으니 최대한 본인인 줄 모르게 분신술이든 뭐든 써서 방어해 볼 작정이다.



나는 모임장의 삼고초려로 결국 독서 모임의 운영진까지 맡게 되었다. 솔직히 이 프로젝트만 아니었다면 운영진이라는 직책 따위는 결코 맡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어코 모임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까닭은 새로운 무리의 리더가 되는 일은 절대 나다운 행동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 자체가 나 다운 행동이 아니었기에 그 과정 역시 그래야 한다는 나름의 신념이었달까. 해서 나는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매번 나 다운 일은 뭐고 나답지 않은 일은 뭔지를 고민했다. 하다못해 크리스마스이브 날 아침 모임에 나가면서 모두를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 초콜릿을 사 갈까 말 까라는 아주 사소한 고민을 하루 반나절을 한 적도 있다. 또 가끔 번개 모임이 생기면 갈지 말 지를 거의 압박 수준으로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게 비록 울며 겨자 먹기로 운영진이 되었지만 나란 인간.. 아무리 하기 싫은 일도 맡은 일은 분골쇄신 책임을 다하는 타입이 아니던가. 열정적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과 맡겨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 나갔다.


B님을 만난 건 요양을 끝낸 직후 운영진으로 첫 스타트를 하는 모임에서였다. 그때 얼굴을 처음 뵈었고 이후 운영진끼리 모인 파티에서 조금 가까워졌다. 물론 B님은 운영진이 아니셨지만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운영진 중 한 명이 B님을 파티에 초대한 거였다. 실제로 B님은 명문대를 나온 수재에 상당히 배려심이 넘치는 온화한 분이셨다. 그런 B님과 내가 더욱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역시 비즈였고 비즈 팔찌를 만들면서 나는 B님께 내가 모르는 모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들과 풍문들을 시시콜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남의 소문에는 그닥 관심이 없는 편이다. 왜냐면 내 문제 하나로도 머리가 아픈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얘길 하면 또 맞장구는 기가 막히게 잘 쳐주는 타입이다. 그때 모임에서 누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다더라, 누가 누구에게 고백을 했다더라, 누가 누구랑 싸웠다더라.. 카더라 통신을 참 많이도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관심 없는 얘기를 나는 아주 즐겁게도 들었다. 오히려 운영진인 나보다 B님이 모임의 속사정을 더 잘 아시는 것 같았다. 들어보니 모임에서 일어나는 남녀 문제는 거의 사랑과 전쟁 수준이었고 여기가 커플 매칭 모임인지 독서 모임인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더 혼란스러웠던 건 소문의 진실을 당사자에게 직접 묻지 않고서는 진실을 알 길이 없었고 소문 속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또 다른 인격체 같이 느껴졌다.


B님은 제비가 박 씨를 물어 나르듯 이야기보따리를 물어 나에게 열심히 날라주었다. 그리고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연락이 뜸해지더니 어느 순간 아예 모임에도 나오지 않으시고 연락이 뚝 끊어져버렸다. 그 후 한참 뒤에 내가 안부차 먼저 연락을 했을 때 좋은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말에도 자신의 결혼 소식조차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명백한 손절인데..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가 이유가 없는 게 이유라는 생각으로 혼자 결론을 내려버렸다. 사람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C님은 특수 직업 종사자로 나는 업무적으로 그분을 취재하고 싶은 마음에 모임장에게 부탁해 연락처를 얻었다. 나는 곧바로 C님께 연락을 해서 취재를 요청했고 다행히 C님이 흔쾌히 승낙을 해주셔서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카페에서 단둘이 만나게 됐다. 나는 C님의 가정사부터 직업적인 부분까지 세세하게 전부 인터뷰를 했고 C님도 굉장히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주셨다. 그렇게 준비했던 질문지의 질문이 모두 끝나고 난 뒤 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그냥 돌아가기가 너무 죄송스러워 근처 식당이라도 가려고 찾아봤지만 갈만한 곳이 없어 결국 우리 두 사람은 근처에 열려있는 아무 분식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서로 동갑내기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대화가 점점 편하게 흘러갔고 어쩌다 보니 푼수처럼 또 내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C님께 하게 됐다. 함께 깔깔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사는 동네도 가깝고 간간이 얼굴을 보며 동네 친구처럼 담소나 나누며 운동도 같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헤어졌는데.. 다음 날이 되어서야 나는 이 모든 게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다음 날이 낮에 C님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낮에 한참 회사 업무에 바쁠 시간이었다. 급한 용무인가 해서 받았더니 대뜸 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는 C님의 말에 나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아뿔싸. 빠르게 어제의 일을 복기했지만 서로의 목소리가 당장 듣고 싶을 만큼 그럴 정도의 스탠스는 오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핸드폰 전파를 타고 그분께 닿자마자 그분도 당황한 듯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후 C님은 그 어떤 연락도 없었고 나도 따로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일을 겪으며 나는 내가 이들에게 뭘 잘못했는지 되짚어봤다. C님은 정확히 알 것 같았지만 B님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살다 보면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고 스치듯 사라지는 인연들이 한 두 명이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고 친해지려 했던 그 노력과 시간들이 전부 한낱 바람처럼 사라진 것 같아서 아쉬움과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난 연애들도 하물며 연애가 아닌 썸이나 소개팅도 그랬다. 사람마다 마음의 속도가 너무 다르고 그 속도가 같아지기가 정말 힘들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하염없이 한 곳에 머물러 있고 누군가는 발이 보이지 않게 빠르게 달리고 또 누군가는 너무 더디게 가서 곁에 있는 사람을 외롭고 지치게 만든다. 내가 안달이 나면 상대는 언제나 차분하고 상대가 안달이 나면 내가 극도로 차분하고. 어째서 이 관계의 속도는 이토록 맞기 어려운 것일까. 나는 그제야 여태 수많은 인연들을 이 속도 때문에 잃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는 서로의 속도를 맞춰가는 것이다. 과속하면 사고가 나고 너무 천천히 가도 사고는 난다. 내가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닌데도 아직 타인과 마음의 속도를 맞추는 건 어려운 숙제다. 이상하게 어릴 땐 그토록 쉽게 되었던 마음이 맞는다! 는 그 속도가 어른이 되고 나니 참으로 로또 번호만큼이나 맞기가 어렵고 맞았다고 해도 그 부귀영화가 그리 오래가지 않는 것 같다. 좀 전에 속도 때문에 인연을 잃었다고 했는데 나의 첫 남자 친구가 딱 그랬다. 그의 속도는 100km, 나의 속도는 고작해야 10Km.. 그때 나는 그저 상대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언젠가 본가에서 첫 남자 친구가 내게 쓴 편지를 발견하게 되면서 속도에 숨어 있던 진짜의 진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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