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이어지지 않아도 해피엔딩

파올로 조르다노 <소수의 고독>

by 에디터리

1983년. 알리체는 스키 사고로 다리를 절뚝이는 부상을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1984년. 미켈라와 쌍둥이로 태어난 마티아는 내내 자폐 증상이 있는 동생 미켈라를 돌봐야 했다. 3학년이 되어 처음 반 아이에게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날, 마티아는 동네 공원에 미켈라를 두고 혼자서 파티에 참석한다. 그 이후로 마티아는 미켈라를 다시 보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마티아에게는 자해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p.112~113
어머니는 이야기를 하다 중간에 그만두는 일이 잦았다. 마치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사이 끝말을 잊어 버리는 것처럼. 미처 나오지 못한 말들은 어머니의 눈과 허공에 허망한 거품을 남겨놓았고, 마티아는 그걸 손가락으로 찔러 터트리는 상상을 했다.
“반 애들이 다 보는 데서 칼로 손을 찌르는 게 이상하지 않으면 뭐가 이상해. 옛날 일은 이제 다 끝났다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또 헛짚은 것도 이상한 일이라고.”


1991년.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알리체는 이성에게 관심을 받고 싶고 여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인 비올라의 곁에 서는 친구가 되고 싶다. 현실은 비올라와 그 무리에 놀림을 받고 있지만. 마른 몸을 유지하고 싶어 거식증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가족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지낸다.

한편 마티아는 시도 때도 없이 자해를 일삼는다. 그리고 마티아 곁을 친구의 감정을 넘어선 데니스가 늘 지키고 있다. 어느 날, 비올라의 생일파티에서 만난 두 사람. 알리체와 마티아는 서로의 상처를 마주한다.


p.134~135
“봐도 돼?” 마티아가 주먹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는가 싶더니 곧 천천히 펼쳤다. 흔들림 없이 곧은 납빛 자상이 손바닥을 사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주위엔 하얗게 보일 정도로 짧고 분명한 흉터들이 있었다. 흉터는 역광 속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처럼 손바닥 가득 얽혀 있었다.
“나도 흉터가 하나 있어. 볼래?” 알리체가 말했다.
(중략) 툭 솟아오른 골반뼈 위로 기다란 흉터가 나 있었다. 알리체의 흉터는 마티아의 흉터보다 두껍고 돌출되어 있었으며 폭이 넓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상처에 직각으로 꿰맨 자국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해적 변장을 하고 카니발에 갈 때 얼굴에 그리는 흉터와 비슷해 보였다.


마티아는 공부에 전념한다. 공부는 안전하다는 생각에.


p.136
공부는 혼자 할 수 있고,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이미 죽어서 싸늘해진데다 곱씹을 수 있어 좋다고 그는 알리체에게 말하고 싶었다. 교과서의 모든 페이지는 똑같은 온도를 지녔고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주며 우리에게 전혀 해롭지 않고 우리도 그것을 해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도.


아빠의 강압스런 태도 밑에서 자란 알리체는 자신의 신체만이 유일한 자기의 것으로 느꼈을까. 그래서 시간이 흘러 결혼한 뒤에도 임신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로 의도치 않게 변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을까. 사고로 인해 이미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변한 것을 감당하고 살았어야 했으므로 그 이후에는 더더욱 알리체에게 변하지 않는, 그대로의 몸이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p.155
거울에 비친 바이올렛을 보자 자신의 몸을 영원히 바꿔놓은 생애 두 번째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와 불안이 기분좋게 뒤섞이며 전율이 몰아쳤다. 그녀는 이 몸이 자기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원하면 파괴할 수도 있고, 흔적이 남을 정도로 망가뜨릴 수도 있고,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꺾었다가 땅바닥에 버려 시들어가는 꽃처럼 비쩍 마르게 내팽겨둘 수도 있다고.


1995년. 마티아와 알리체는 여전히 우정의 이름으로 서로의 옆을 채우고 있었다. 어느 날 알리체는 엄마의 웨딩드레스를 찾아 입고는 마티아에게 아버지의 정장을 입힌다. 그리고 카메라로 찰칵.


p.173~174 고교 시절은 마티아와 알리체에게 결코 아물지 않을 깊고 쓰라린 상처였다. 둘은 숨쉬는 것조차 꾹 참으며 그 시간을 지나왔다. 마티아는 세상을 거부하는 마음으로, 알리체는 세상에 거부당하는 기분으로 견뎠지만, 차츰 그 두 가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인 우정을 쌓아갔다. 오랜 부재와 기나긴 침묵으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우정은 학교 담장이 조여와 질식할 것 같을 때, 유일하게 숨 돌릴 수 있는 순수하고 텅 빈 공간이었다. 좀더 시간이 흐르자 사춘기의 상처 또한 아물어갔다. 상처 가장자리의 살갗은 조금씩 지속적으로 움직여 서로 가까워졌다. 새로운 상처가 생길 때마다 딱지가 떨어져나가며 더 짙고 두꺼운 딱지가 고집스레 그 자리를 대신하더니 마침내는 매끄럽고 단단한 새살이 돋았다. 불그스름했던 흉터는 서서히 하얘지며 다른 피부와 같아졌다.


1998년. 대학 1학년 때 마티아는 ‘쌍둥이소수’에 대해 배운다. 자신과 알리체가 그런 사이라 생각한다.


p.192 외로이 방황하는 두 소수, 가깝지만 실제로 서로 닿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쌍둥이소수. 알리체에게 그런 생각을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던 알리체는 아빠가 선물해준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p.202
알리체는 사진의 결과물보다 찍는 행위 자체를 사랑했다. 빈 카메라의 뒷면을 열고 새 필름을 몇 센티미터쯤 풀어내 홈에 끼우면 되는 간단한 과정이 좋았다. 백지상태의 필름이 곧 뭔가 의미 있는 게 되겠구나 생각하면서도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른 채 아무렇게나 몇 컷 찍어보고, 무언가를 겨냥해 초점을 맞추고, 앞뒤로 몸을 기울이며 그녀의 눈에 비친 현 실의 편린을 담을지 뺄지 결정하고 확대하고 변형하는 그 행위가 좋았다.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서 알리체는 의사 파비오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마티아는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대학 연구직을 제안받아 떠난다. 서로를 곁에 두고 싶었으면서도 감정에 서툴러 기회를 놓치는 두 사람.

2003년. 알리체는 사진작가로 처음으로 고등학교 때 자신을 괴롭힌 비올라의 결혼식에 일하러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속 시원하게 카메라 속 필름을 풀어버린다.

2007년. 마티아와 알리체는 각자의 삶 속에서 위기를 겪는다. 언제까지 혼자일 수 없는데도 고독을 자처하는 일상을 살던 마티아는 알리체의 엽서 한 장 속 메시지 “넌 여기 와야 해” 한 문장에 단숨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둘은 작별 인사를 했다.


이 소설은 참 잘 읽혔다. 계속해서 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서 며칠에 걸쳐 손에 들고 읽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30대가 될 때까지, 긴 시간에 걸쳐 서로의 삶에 영향력을 발휘해왔으면서도 어떤 소유도 호소하지 않은 두 사람.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았어도, 어쩐지 인연은 거기까지였음을 인정하고 문을 닫아두는 것도 서로를 위해 좋은 선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인으로 맺어지는 것만이 해피 엔딩이 아니니까.

마티아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 그 장소를 자신도 모르게 마티아를 데려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리고 그 동생을 본 것만 같았던 알리체는 결국 마티아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마티아도 남편 파비아 와 헤어진 듯한 알리체를 알아차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위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택하는 것.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바라보는 것. 마지막 페이지는 덮였지만 둘의 이야기는 여전히 나란히 흘러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