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치는 사랑에 빠져나오기가 쉬운가요

정대건 <급류>

by 에디터리

소설을 읽는 내내 기억 속 오래전 일기장을 꺼내 읽는 기분이 들었다. 10대 시절의 풋사랑부터 사랑에 관해 잘 모르면서 주어진 눈앞의 사랑에 허겁지겁 온몸과 온 마음으로 맞닥뜨리며 여기저기 상처를 내던 20대를 지나,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나를 위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눈치나 비난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는 30대에 이르는 기분.


나는 저들에게 아주 불행한 사람으로 기억되겠지. 그들의 삶이 힘들 때마다 적어도 내게는 저렇게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잖아, 나는 행복한 거야, 라고 위안 삼을 만한 불행의 표본이 되었겠지. 온 세상이 자신을 속이고 몰래카메라를 찍는 기분이었다. p.84


태어날 적부터 곁에 있던 부모님은 자식인 나를 위해서 온전한 보호자로서 남아 있어야 했다. 걷잡을 수 없이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무모한 사랑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건너 다 아는 작은 도시에서 도담의 아빠 창석과 해솔의 엄마 미영의 사고는 남은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어차피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 나를 싫어하게 될 거야.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p.100


도담은 불행의 크기를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양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비교했다. 도담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이 가장 크고 가장 값졌다. p.135


무엇보다 도담은 자신이 좋아하던 해솔과 떨어져야 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과 불행이 옮을까 다가오지 못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외롭게 버텨야 했던 도담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독한 마음을 먹고 자랐다. 그러다 다시 재회한 해솔.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동시에 같은 죄책감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하지만 마음껏 사랑하기에는 각자 품고 있는 죄책감과 슬픔의 크기가 너무 컸다. 상처는 아물 줄 모르고 덧나기만 하던 스물하나.


도담과 해솔 사이에는 잘못 디디면 휩쓸리는 소용돌이가 도사리고 있었다. p.144


서로를 할퀴다 헤어진 두 사람이 수년이 흘러 재회한 그때에 이르러서 둘은 비로소 처음인 듯 한 걸음씩 천천히 서로를 향해 다가선다. “아무도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라던 정미의 저주 같은 말을 털어내듯, 피하고만 싶었던 그날의 그곳을 직면하면서. 비로소 서로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샅샅이 살피고서야 두 사람은 서로를 정면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생이 영원하다면 사랑의 가치는 그만큼 없어질 테지. 영원한 사랑이 아니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 사랑을 지독히 파고든 소설은 참 오랜만이었다. 벼락처럼 찾아온 사고로 떠나보낸, 사랑하는 두 사람을 이제야 애도하고 떠나보내며 둘은 오롯이 서게 되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을 때라야 비로소 시작되는 게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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