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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Oct 28. 2022

충주에는 왜 철불이 많을까

충주 철불 3종과 충주 철광


새로운 재료가 등장하면 여기저기 그 용도와 한계를 시험해 보게 된다. 기존 재료의 물성을 이어받을 수 있는지, 새로운 장점은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장인의 욕망이리라. 철불(鐵佛)은 철로 만든 불상이다. 철불은 압도적인 느낌이다. 크기와 재료가 가지는 느낌이 석불이나 금동불과 차이가 있다. 철은 농기구나 무기를 만들던 재료로 일반인에게 친숙한 재료였다. 그래서 중앙의 귀족층이 아니라 지방의 호족이나 일반인이 접근하기 쉬웠을 것이다. 


철불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사이이다. 지방 호족층을 중심으로 불교 종파로는 선종의 확산과 함께 나타났다. 시기적으로는 통일 신라시대인 9세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크게 유행했다. 쉽게 산화되고 충격에 약하다는 단점으로 짧은 기간 유행하다 사라졌다. 아마도 고려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귀족 체계에 편입된 호족 세력의 위축에 따라 서서히 금동불상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2021년 9월 현재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철불은 총 18개로 국보가 3개, 보물이 15개이다. 지역별로는 충주에 3개로 가장 많다. 시대별로는 통일신라 ~ 고려시대에 몰려 있다. 왜 충주라는 지역에 철불이 많이 남아 있는지 각각은 어떤 특징인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충주 철불 3종


충주에 있는 철불은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이다.  앞의 두 개는 매우 유사한 형식이고 위치도 충주 시내에 있다. 차로 10분 거리이다. 백운암 철불은 형식도 약간 다르고 시내에서 떨어진 엄정면에 있다. 모든 철불은 원래 장소에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곳에서 발견되어 현 장소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대원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이 철불은 98cm의 크기로 큼직한 머리카락인 나발로 되어 있는 머리에는 중간 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머리가 커서 인체 비례가 어긋나 있다. 눈은 활처럼 올라가 있고 입꼬리는 양쪽으로 축 쳐져 있다. 자비로워 보이는 모습은 아니다. 이런 얼굴 표정은 대단히 특이한 형태라고 한다. 나발 머리에 중간 육계가 있고 양미간에 백호가 있다. 가사는 통견의이고 주름은 U자이다. 내의로 보이는 것을 묶은 매듭이 가슴에 있다. 무릎 주름도 도식적이고 부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손목은 따로 끼운 것으로 수인은 아미타불 구품인 중품중생인을 하고 있다. 좌대는 따로 없이 화강암 덩어리 위에 올려져 있다. 충주 철조여래좌상이라고 통칭된다.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보물)


단호사(丹湖寺) 철조여래좌상


건국대 충주캠퍼스 인근 단호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철불은 130cm 크기로 대원사 철불보다 크다. 하지만 머리와 얼굴 모습, 가사와 주름의 형태는 매우 유사하다. 좌대가 철로 되어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개금불사 되어 철불인지 모르다가 1968년에 철불인 게 밝혀졌다. 학계에서는 같은 제작소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절은 달천동 오거리에 접해 있어 찾기가 쉽다. 절내에는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있고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볼만하다. 대원사 철불과 함께 고려시대 철불로 추정된다.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보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철불은 원래 있던 곳을 알지는 못한다. 보존처리 과정에서 철불임이 확인되었다. 크기는 87cm이고 육계와 계주는 보이지 않는다. 몸에 비해 얼굴이 작은 편이라 아이돌 같은 느낌이 든다.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큼직하고 비례가 잘 맞는다. 가사는 우견편단이며 삼도가 있고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앞의 두 철불에 비해 도식적이지 않으며 신체의 균형도 잘 잡혀 있다. 가슴과 팔 양측으로 이어 붙인 선이 보인다.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보물)


다인철소 이야기


충주와 철 이야기에는 다인철소(多仁鐵所)를 빼놓을 수 없다. 충주시 대소원면 본리 노계마을에 있던 고려시대 야철지이다. 현재는 야철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만 해도  마을 뒤편 경작지에 쇠를 재련하고 남은 찌꺼기인 쇠똥이 산을 이룰 정도로 많이 쌓여 있어 시멘트공장에서 실어갔다고 전한다. 다인철소지는 노계마을에서 조사된 세 곳의 야철지와 겹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시대 철소는 생활 용구나 무기류의 제작에 필요한 철을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특수민들의 집단 거주지이다. 다인철소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충주 서쪽 30리”에 있었다 하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당시 이 지역이 ‘충주목 이안면’으로 편성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계마을과 비슷한 위치라고 한다.


다인철소가 있던 노계마을과 유학산의 위치, 출처:네이버 지도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은 기마병답게 전투 중에 소요되는 식량과 무기를 거의 현지에서 조달하였다. 특히 철은 기병의 소모품인 편자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재료였다. 그러므로 몽고군으로서는 철산지와 기술자를 확보하는 것을 전술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충주는 고려의 중요한 철산지로 다인철소 외에도 관내에는 여러 곳에 철산지가 있었다. 이에 따라 고려뿐만 아니라 몽고군에게도 전략적으로 중요하므로 이곳에서 공방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몽고군이 침입하자 다인철소민은 철광석과 제련된 철, 여러 가지 제련 도구, 무기나 도구를 만드는 시설 등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유학산성에 이동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254년 9월 차라대가 지휘하는 5,000여 명의 몽고군이 제철 기술자와 철과 무기류를 확보하기 위해 유학산성을 공격했다. 주민들은 다인철소의 향리를 맡고 있던 지씨(池氏)와 어씨(魚氏)의 지휘 하에 몽고군을 격퇴하였다고 한다. 유학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장성리 산 81-1번지와 금곡리 산 16번지에 걸쳐 있는 유학산[396m] 정상 8부 능선에 흔적이 남아있다. 


충주, 철의 고장


충주 지역은 지질학적으로 옥천대에 속한다. 옥천대는 경기육괴와 영남육괴 사이에 낀 폭 약 80km의 지역이다. 지하자원이 많이 나와 경제적으로 중요하며 암상이 복잡하여 아직도 성인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는 지역이다. 학자마다 이론이 다른 상황이다. 대체적으로 제천-문경 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변성을 받지 않은 암석이고 서쪽은 변성 작용을 받은 암석이 나타난다. 충주는 제천-문경선의 서쪽에 있다.


충주시는 동쪽에 계명산(774m), 남산(636m), 대림산(489m), 물레산(394m)이 남북방향으로 발달되어 있다. 이 산들을 넘으면 충주호가 나온다. 지질학적으로는 계명산에서 음성군 어래산(392m) 방향인 동북-남서 방향으로 변성 퇴적암인 계명산층이 노출되고 있다. 이 계명산층은 백악기 불국사 화강암에 의해 관입되면서 주변부가 변성 작용을 받고 있다. 철광물들이 호상 또는 괴상으로 발달한다. 특히 상대적으로 침식을 많이 받은 음성군 대소원면, 소이면 쪽에 많이 나타난다.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철을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제가 중원지역으로 진출한 후 철광산을 개발하고 철을 생산한 것이 그 시초로 보인다. 2012년 중원문화재연구소의 자료 따르면 제철 관련 유적은 20개소에 달한다. 


충주시에만 칠금동, 하구암리, 노계마을, 본리, 완오리 등 총 11개소에서 96개의 제철유적이 조사되었다. 이 중 칠금동 유적은 백제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단 반제품인 철정을 만들어 남한강을 따라 다른 장소로 공급하거나 그 자리에서 가공했을 것이다. 원료를 채광하던 곳은 인접한 창동 쇠꼬지 철산이나 연수철산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충주시의 제철유적을 시대별로 보면 50%에 해당하는 48개소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서 언급한 다인철소 이야기와 일치한다. 노계마을을 중심으로 짧은 기간 동안 광범위한 제철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충주 철광


충주 철광은 충주시 대소원면 만정리 인근에 위치한다. 충주시 주변에는 연수동, 금곡, 창동 철광상이 분포하며, 소규모의 광상으로 최근까지 가행되어 왔다. 대규모의 철광석 생산은 1917~1923년까지였으며, 현대적 탐광과 개발은 1963년부터 영풍광업에 의해 실시되었다. 매장량은 확정 48만 톤, 추정 102만 톤으로 총 151만 톤에 달하였다. 값싼 철광석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1980년 중반기에 폐광했다. 

충주 철광,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인철소 인근으로 충주 철광의 맥이 지나간다. 아마도 옛날에는 노천채굴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현재 사용하는 철광의 대부분은 호상 철광상이다. 호주에 있는 그 퇴적 철광상이다.  하지만 충주 철광은 다르다. 충주 철광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층상규제형(strata-bound type) 철광상의 하나이다. 어떤 종류의 층을 이루는 암석층을 따라 형성되는 광상을 의미한다. 광산 주변 지질은 규암 및 편마암류인 변성 퇴적암과 이를 후기에 관입한 화성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발견되는 철광석은 주로 변성암의 편리를 따라 나타나며 호상(banded) 광석이나 괴상(massive) 광석으로 나뉜다.


변성 퇴적암이란 원래 쌓여 있던 사암이나 셰일 같은 퇴적암이 광역변성작용을 받아 생긴 것이다. 아마도 철은 퇴적암인 시대에서부터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후 변성 작용을 받는 과정에서 철광석이 풍부한 층과 빈약한 층이 층상구조를 만들며 2차적으로 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괴상으로 나오는 철광석은 주로 화성암(주로 불국사 화강암)과의 접촉 부분에서 불규칙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자철석과 함께 다량의 희토류가 산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은 운송 수단의 발달로 철의 산지와 철 제품 생산지가 멀리 떨어져 있다. 포스코가 사용하는 철광석은 멀리 호주에서 온다. 하지만 옛날에는 철의 산지와 철 제품의 생산지는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다. 철불은 전국적으로 분포하는데 이는 철산지의 분포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충주 부근에는 지금도 쉽게 파악될 정도로 철광상이 존재한다. 그것도 지표면에 노출되거나 약간만 지표를 걷어내도 철광석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가격이 싼 수입산 철광석에 밀려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삼국시대~조선시대까지는 충분한 채굴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남한강을 통한 땔감이나 완제품의 이동이 쉬운 점 등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충주는 철불뿐만 아니라 무기, 농기구 등 다양한 철제품을 생산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의 이름으로 하면 ‘충주종합제철단지’였던 것이다.


이렇듯 문화재는 지질학적 요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도 한다. 특정한 문화재가 특정 지역에 많이 있다는 것은 지질학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적인 조건이 안정적으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관련 학계에서 학제간 연구를 통하여 보다 입체적인 모습을 그려 내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1.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2, 중원의 제철유적

2.     김근수, 박맹언, 엔조지 마모루, 1994, 충주지역 호상 및 괴상 철광상의 성인에 관한 연구(I): 지질 및 광석의 산출특성, 자원환경지질, 제27권 제6호, p. 523 ~ 535

3.     김주환, 2001, 충북 충주지역의 지질 및 지형에 관한 연구, 한국자연보전협회 조사연구보고서 제41호 p.13~25

4.     디지털충주문화대전

5.     이현구, 문희수, 오민수, 한국의 광상, 2007, 이카넷

6.     최성은, 철불, 1995, 대원사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Kim G. S. and Park, M.E., 1995, Skarn Formation in Metamorphic Rocks of the Chungju Mine Area, Econ. Environ. Geol, Vo. 28, No. 3, p.185-197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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